IN GAME[연재중단]

20번

Gravatar


N G에이그리고

20번

W. 설하

굉음과 함께 무너져내리는 절벽의 돌무더기를 가볍게 피한 태형이 마른 기침을 뱉어냈다. 콜록콜록, 잔기침을 몇 번 더 뱉어낸 그는 큰 손으로 손부채질을 하며 시야를 가리는 흙먼지들을 걷어냈다. 뿌연 흙먼지들로 인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태형이 서 있던 곳을 가득 메웠던 흙먼지가 가라앉을 때 즈음, 따끔거리는 눈을 비비적거리던 태형이 제 옆에서 몸을 비틀거리는 인영을 잡아챘다. 그 덕에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면한 호석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태형에게 감사를 표했다.

[메인 퀘스트 : 수색(2)]

필수 퀘스트

퀘스트 진입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메인 퀘스트 : 수색]이 계속 진행됩니다.

크레아 제국 : 북부지역 의 수색을 계속합니다.

제국 북부 지역은

'이상 현상'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배치된 지역을 수색하여

'근원'을 파괴하십시오.

플레이어 : 반테 라 루미안 / 김태형

배치 지역 : 데할 산맥

[조건] 데할산맥 '근원' 파괴

성공 보상 : ???

실패 시 : 플레이어 사망

퀘스트 완료 조건을 달성하여

보상을 수령할 수 있습니다.

보상을 수령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끝났네. 수고했어."

"태형 씨가 다 했는데요 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건네는 호석의 말에 태형이 피식하는 웃음을 흘렸다. 옷에 덕지덕지 붙은 흙먼지 따위를 툭툭 털어낸 태형이 조금 쉬었다 출발하는 게 어떻겠냐 말하자, 호석이 대번 고개를 끄덕였다. '근원'을 찾기 위해 온종일을 돌아다닌 탓에 다리가 퉁퉁 부어있기도 했고, 데할 산맥이 몹시 가파르고 험한 산맥이라는 것 또한 그의 결정에 한몫했을 것이다. 시야를 죄 가릴 정도의 흙먼지가 가라앉을 때쯤, 태형은 잠시간 앉아 쉴만한 돌덩이를 발견하고는 호석을 향해 손짓했다.

그들이 데할 산맥으로 오게 된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단지, 정국이 '비비안의 기록'을 완전히 해석함과 동시에 두 개의 메인 퀘스트가 생겨났고, 굳이 다섯이서 두 개의 퀘스트를 굳이 하나씩 하나씩 해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는 율리아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태형과 호석이 맡은 '수색'퀘스트와는 다르게, '자료 찾기'의 퀘스트 수행 장소에 태형과 호석은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것도 그들이 데할 산맥으로 오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메인 퀘스트 : 자료 찾기(2)]

필수 퀘스트

[자료]의 일부를 획득했음을 확인합니다.

[메인 퀘스트 : 자료 찾기]가 계속 진행됩니다.

당신과 협력한 플레이어 중 누군가가

[오래된 지도]를 획득하였습니다.

대륙에 존재하는 [자료]를 모두 모아

'비비안의 기록'을 완성하십시오.

<퀘스트 완료 조건>

- 리지아네 공작 저의 [자료] 획득

- 리지아네 공작 저의 [자료] 열람

성공 보상 : 비비안의 기록 중 일부

어디로 간다고 했더라, 태형이 근처의 돌덩어리에 걸터앉으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진입할 거냐는 호석의 물음에 율리아가 한 대답을 듣고는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던 건 기억이 나는데, 정작 어디로 간다 했는지, 그 말만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뭐, 어쨌든 그들은 잘 해낼 것이다. 율리아의 계획 속 그들의 모습이 자신에게는 조금 우습게 느껴졌을 뿐, 남들이 보기엔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모습으로 '자료'에 접근할 테니까. 태형은 인벤토리를 뒤적여 거의 새것 같은 수첩 하나와 만년필 하나를 꺼냈다.

"나머지 분들은 잘 하고 계시겠죠?"

"적어도 우리보다 험한 꼴은 덜 보지 않을까."

"그건… 그건 그렇겠네요."

호석과 눈을 마주친 태형이 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호석이 드물게 웃음을 터트렸다.

태형은 수첩의 빈 공간을 펴, 유려한 손놀림으로 날짜를 적어내려갔다. 제국력 117년,까지 만을 적어둔 태형이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날짜가…, 하며 고민하던 것도 잠시였다. 숫자 몇 개를 수첩의 가장 윗줄에 적어 넣은 태형이 그 아래로 슥, 슥,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에 흙먼지가 내려앉은 태형의 앞머리가 살짝 흩날렸다. 태형은 기분이 싱숭생숭해짐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일기였으나, 일기처럼 가볍게 적어내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오늘은 무얼 했고, 어떤 일을 했고, 이제 무엇을 할 것인지, 일기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일상생활을 조각조각 옮겨놓은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태형, 자신이라는 점과, 이 기록을 적는 것도 태형, 자신이라는 점은 그의 기분을 심란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너는 아마, 김태형으로써의 기억이 점점 사라지고 있을 거야."

그 말이 맞았다. 태형은 하루가 다르게 기억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이 수첩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대충 글을 끄적이는 것을 마친 태형이 앞서 적어둔 장들을 펼쳐보았다. '김태형'일적의 기억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드라마 속,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주인공의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이만 돌아갈까요?"

호석의 물음에 태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을 덮었다. 인벤토리에 수첩과 만년필을 집어넣은 태형이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도 흙먼지가 잔뜩이었다. 빨리 돌아가 씻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라 태형이 걸음을 재촉했다. 죄 부서진 계곡 너머 절벽에서 우르릉, 하는 섬뜩한 소리가 나든 말든, 그들은 산맥을 내려가는 걸음을 빨리할 뿐이었다.

게임 내에서

덜컹이는 소리를 내며 거리를 지나는 마차 안에서 나는 색색의 불빛으로 가득한 거리로 시선을 던졌다. 길 한복판에 자리를 잡은 채 신나게 연주하는 길거리 악단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길거리에 주르륵 깔린 노점상의 갖가지 먹을거리들을 손에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어린아이들도 몇몇 보였다. 누가 뭐래도 축제의 밤거리의 모습으로 보이는 풍경이었다. 그 풍경 너머에서, 나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꼭 이런 방법이어야만 했나?"

그것도, 아주 잘 차려입은 전정국과 함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반대편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말하는 그에 나는 눈을 부릅뜬 채 그를 흘겨보았다.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아니? 하는 내 말에 전정국의 표정이 한층 더 불퉁해졌다. 발에 꼭 맞는, 번쩍거리는 가죽 구두가 그의 발끝에서 요란하게 흔들거렸다. 정신 사나우니까 좀 얌전히 있으란 내 말에 그마저도 잠잠해지긴 했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외출은, [낡은 열쇠]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낡은 열쇠],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얻은 이 열쇠가 또 다른 메인 퀘스트, 즉, '비비안의 기록'을 손에 넣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낡은 열쇠]

기타 아이템

사용 시, '비비안의 기록' 중 일부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사용처 : 리지아네 공작저 / 별채 서고

열쇠의 사용처가 하필이면, 제국의 둘뿐인 공작가 중 하나라는 사실이었다. 아니, 오르테 공작 저면 오죽 좋을까. 하필이면 연고도 없는 리지아네 공작 저에 기록이 남아있는 탓에 나와 전정국은 머리를 싸매고 '기록'을 찾아올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도무지 방법이 없어 다른 지역을 먼저 확인해보려 해도, 무엇보다 열쇠가 없거니와, 우리에게 부여된 퀘스트부터가 문제였다.

[메인 퀘스트 : 자료 찾기(2)]

필수 퀘스트

[자료]의 일부를 획득했음을 확인합니다.

[메인 퀘스트 : 자료 찾기]가 계속 진행됩니다.

당신과 협력한 플레이어 중 누군가가

[오래된 지도]를 획득하였습니다.

대륙에 존재하는 [자료]를 모두 모아

'비비안의 기록'을 완성하십시오.

<퀘스트 완료 조건>

- 리지아네 공작 저의 [자료] 획득

- 리지아네 공작 저의 [자료] 열람

성공 보상 : 비비안의 기록 중 일부

굳이 콕 집어 리지아네 공작 저의 자료를 획득하라는 것이 그랬다. 결국, 퀘스트 완료를 위해서든 뭐든 우리가 리지아네 공작 저로 가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무려 공작씩이나 되는 이가 거주하고 있는 곳에 무단으로 침입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자마자 어쩌면 이런 방면에서 내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갔다. 바로-,

"매해 5월마다 리지아네 공작령에서 연극제가 열리긴 해. 공작 저에서는 연회도 열리고. 기억엔 없겠지만 너도 한두 번 정도 간 적이 있고. 공작 저에 들어가는 게 목표라면 연회에 참여하는 게 좋겠지. …근데, 심각한 일은 아니지, 리아?"

진 비안 오르테, 그래, 율리아의 오라버니 되시겠다. 그리고 그의 답변은 결국 나와 전정국이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게다가 몹시 화려한) 옷차림을 한 채 같은 마차를 타고 죽상을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리지아네 공작 저의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알맹이에 누가 들어있건 간에 공녀라는 신분까지 달고 있는 마당에 혼자 연회에 참석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진이 부득불 붙여준 파트너가 황태자 카일로스, 즉, 전정국인지라, 그 또한 함께 마차에 타게 된 것이었다.

딱 거기까지였으면 그나마 괜찮았으련만. 안타깝게도 이 제국에 있어 사교계라 함은 그저 그런 입씨름 따위가 아니었다. 사소한 흠이라도 잡혔다 하면 온 제국의 연회와 살롱에서 말이 도는 것, 그것이 바로 제국의 사교계였다. 그래서 진은 내가 연회에 참석할 것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주, 아주, 두꺼운 종이뭉치들을 들고 내 기숙사를 찾았다. 어마어마하게 쌓여있는 종이 더미에 내가 질린 표정을 짓든 말든, 그는 그 종이뭉치들을 내 품에 안겨주며 이 정도는 필수적으로 기억하고 있어야 할 정보라고 했다. 역사서 다섯 권은 거뜬히 넘길 분량 같은데, 하는 내 말을 진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완벽하게 외워둘 필요는 없지만, '율리아 비안 오르테'로써 행동하려면 어느 정도는 알아두는 것이 옳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상념에서 깨어난 것은 마차가 리지아네 공작 저에 다다랐을 때 즈음이었다. 마부가 열어준 마차의 문으로 전정국이 먼저 내려섰다. 구김이 진 재킷을 툭툭 털어낸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꼭 맞는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 위로 레이스 장갑을 낀 내 손을 살포시 얹었다. 수많은 시선들이 날아와 꽂혔다. 날카로운 시선들이 전정국과 나를 훑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입을 가리고 수군거리는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자, 전정국이 긴장 풀라는 듯, 엄지손가락으로 내 손 등을 살살 쓸었다.

"수고했네, 돌아갈 때도 부탁하지."

"예, 아가씨."

허리를 깊게 숙여 전정국과 내게 예를 표한 마부가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마부의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스치듯 마주쳤다. 살포시 접히는 새까만 눈. 나는 웃음을 꾹 참은 채 전정국의 손을 잡고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 수고해-, 하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민윤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래부터 마부였다고 해도 믿겠군."

"그럴싸하지?"

전정국은 황태자, 나는 오르테 공녀라는 그럴싸한 신분이 있었으나 민윤기는 그렇지 못했다. 그가 이 세계에서 사용하는 이름은 슈가, 성조차 없는 평민으로 살아온 그가 공작가씩이나 되는 가문에서 주최하는 연회에 초대장 하나 없이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생각해낸 방법이 이것이었다. 굳이 모두가 별채의 서고로 향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 전정국과 내가 연회장에서 몰래 빠져나와 별채로 가는 것보다야, 민윤기를 몰래 공작저 내로 들여보내 별채로 향하게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손님을 태운 채 리지아네 공작 저에 들어선 마부, 그 마부에 대해 의심하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전정국의 손을 힘주어 잡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마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민윤기가 모는 마차는, 이대로 리지아네 공작 저의 마차 보관소로 갈 것이다. 내가 준 오르테 공작가의 문장이 찍힌 반지를 들고서.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마부는 리지아네 공작 저의 장원으로 향할 것이다. 물론, 그 이후로 마부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나는 곁눈질로 마차가 마차 보관소 쪽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전정국을 슬쩍 잡아끌었다. 이제 우리가 연회장으로 들어가야 할 차례였다.

딱 적당할 정도의 소음으로 가득하던 연회장은 나와 전정국이 연회장의 입구에 발을 딛는 순간 찬물을 끼얹기라도 한 듯 고요해졌다. 경쾌한 음악을 연주하던 악단의 연주자 중 한 명이 삐끗하는 탓에 난 정체 모를 악기의 이탈음이 연회장에 크게 울린 것을 기점으로 시작된 침묵이었다. 마차에서 내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시선들이 우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황태자와 공녀, 이 수상쩍은 조합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한 의문에서부터 비롯된 수많은 시선들에 질식할 것만 같아 나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긴장감으로 인해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차라리 민윤기를 시종으로 변장시키고 우리가 별채로 가는 편이 훨씬 괜찮았을지도 몰라."

"내가 마부로 변장하면, 그대는 뭐, 말 흉내라도 낼 셈인가?"

"그 반대가 그림이 더 괜찮지 않을까?"

"헛소리를 많이 하는 걸 보니, 긴장되는 모양이군."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아본 게 처음이라 그래. 온몸이 찌릿하네."

"곧 사라질 관심들이니, 좀 편하게 있어도 된다."

어색함과 긴장감에 딱 굳어버린 날 연회장의 가장자리로 이끌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던 전정국이 내 입에 딸기 하나를 내밀었다. 입을 벌려 받아먹은 딸기는 새콤달콤하니 맛있었다. 나는 멍하니 딸기를 씹으며 연회장을 주욱 둘러보았다. 방금 전정국의 행동으로 인해 수군거림과 우리를 향한 시선들이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만 빼면, 완벽한 연회장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다 율리아가 미래의 황태자비로 점 찍혔다는 소문이 나도는 거 아닐까. 어쩐지 흐뭇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귀부인들의 모습으로 보아, 아주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닐 듯싶었다. 망했네.

악단의 연주가 다시금 시작되자 홀의 중앙에서 뱅글뱅글 춤을 추는 이들이 늘어났다. 자연스레 우리를 향해있던 시선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음악이 몇 번이나 바뀌면서, 이제는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벽의 꽃을 자처한 채 서로와 대화를 나누는 전정국과 나에게 굳이 말을 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회 초반에는 그나마 다가오는 사람이 몇 있었으나, 전정국의 반응이 유독 시큰둥한 탓에 죄다 떨어져 나갔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달갑지 않음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황태자는 제아무리 뻔뻔한 귀족이라 한들 기꺼운 대화 상대가 되기엔 무리가 있는 법이니까. 나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카일로스'의 기억이 남아있는 전정국과는 다르게 내게는 '율리아'의 기억이 없었다. 눈치를 보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럼에도 연회의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아름답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파트너를 몇 번이고 바꾸어가며 경쾌한 스텝을 밟았고, 홀에서 살짝 떨어진 채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리지아네 공작가의 장남이 연회장에 등장했을 땐 그 분위기가 절정에 다다르다시피 했다. 벽의 꽃을 자처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황태자나 공녀보다야, 이 연회의 주인공인 소공작에게 더욱 시선이 가는 것은 당연한지라, 이제는 우리를 신경 쓰는 이들이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즈음이었다.

전정국이 느닷없이 손을 내밀었다. 새카만 장갑이 덧씌워진 그의 손에 내가 뭐냐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전정국이 재촉하듯 제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에 못 이겨 내 손을 올려놓자마자 연회홀의 중앙으로 나를 끌고 가려는듯한 전정국에 당황해 몸을 뺐다.

"야! 나 춤 못 춰!"

"괜찮아."

내가 잘 추니까. 이어진 그 말에 나는 벙진 채 전정국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제법 뻔뻔한 표정을 한 채 내 손을 잡은 그가 보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올라있는 것이 보였다. 하기야, 진짜 '카일로스'라면 몰라도, 내가 아는 '전정국'은 이런 뻔뻔한 말을 입에 담을 위인은 되지 못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입꼬리만 봐도 그랬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나는 기꺼이 홀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떨어졌던 시선들이 다시금 우리에게 다닥다닥 붙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나 진짜 춤 못 춰,"

"괜찮다니까."

그래, 너 알아서 해라.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전정국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간 전정국과 수다를 떨며 곁눈질로 익혀두었던 기본자세가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치였다. 전정국의 커다란 손이 내 허리에 와닿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그가 발을 움직였다.

춤을 잘 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통나무와 비슷할 정도의 뻣뻣함을 자랑하는 나를 데리고서도 전정국은 꽤 그럴듯하게 춤사위를 흉내 냈다. 단조로운 박자에 스텝을 밟는 꼴이 익숙해 보여서, 나는 눈을 내리깐 채 춤을 추는 전정국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왜? 하며 나와 눈을 마주칠 때까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춤을 추재?"

"…심심하잖나. 네 얼굴에 지겨워 죽겠다고 써져있었다."

"그랬나?"

"그리고, 연회에 왔으면 한 번쯤 춤을 춰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우리가 또 언제 이렇게 춤을 춰 보겠어, 입꼬리를 예쁘게 끌어올리며 전정국이 말했다. 그의 말이 맞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춤을 추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는 도중에 내가 몇 번이고 전정국의 발을 밟는 일이 있었는데도, 전정국은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이끌고 춤을 출 뿐이었다. 하필이면 굽이 꽤 있는 구두를 신었던 터라, 나는 죄책감에 전정국에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미안'하며 소곤거렸다. 전정국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춤을 추고 난 뒤에는, 우리는 아까와 다를 바 없이 벽의 꽃을 자처한 채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지루한 연회가 중반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해서. 그리고 마침내, 내가 몰래 가지고 들어왔던 통신석에서 무언가가 느껴지는 순간에, 나는 전정국을 이끌고 비어있던 발코니로 몸을 숨겼다. 연회장 내부에 통신석과 같은 마도구를 들고 오기에는 내 차림새나 전정국의 차림새가 상당히 화려하고 불편했기 때문에, 나는 허벅지에 자그마한 가방을 매달고 그 속에 통신기를 숨겨두는 수밖에 없었다. 전정국이 귓바퀴를 빨갛게 물들인 채 돌아서 있는 동안에, 나는 서둘러 허벅지의 가방에서 통신석을 꺼내들었다. 예상대로, 민윤기의 통신이었다.

리지아네 공작 저의 별채에 몰래 들어가, 낡은 열쇠를 통해 비비안의 기록을 찾아낸 뒤 통신할 것. 그것이 민윤기와 내가 사전에 나누었던 약속이었다. 전화처럼 서로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누는 통신석을 두 개나 마련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기에, 현대에서의 문자처럼 짧은 문장만을 전달할 수 있는 통신석을 나눠가지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공했을 때의 문장과 실패했을 때의 문장을 만들어두었다. 사실, 실패했을 때 보낼 문장을 만들면서도 나는 안일하게 설마 실패하겠느냐-, 따위의 생각을 했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누가 공작 저의 서고에 침입해, 하등 쓸모없는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칠 생각을 할까? 우리와 같이, 이세계로 떨어진 이방인들이 아니고서야 말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비비안의 기록'을 누군가가 가로채리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자연스레 민윤기에게서 온 이 통신이 '성공'을 뜻하는 문장일 것이라 믿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불과 며칠 전, 전정국의 '오래된 지도'에서 누군가가 '비비안의 기록'에 먼저 손을 댔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참으로 안일하게도 말이다.

'엑스'

그래서, 민윤기로부터 온 통신이 '실패'를 뜻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전정국과 나는 적잖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 보낸 거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할 정도로 말이다. 전정국이 급하게 '오래된 지도'를 꺼내고, 내가 황급히 퀘스트 창을 열 때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했다. 민윤기가 실패했을 리가 없다고. 그러나 전정국의 '오래된 지도'에 리지아네 공작저 별채가 'X'표시로 빨갛게 물들어있다는 것과, 내가 연 퀘스트 창의 내용이 바뀌어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민윤기의 통신이 정말로 실패했음을 뜻하는 통신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퀘스트 실패]

메인 퀘스트 : 자료 찾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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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퀘스트 : 자료 찾기(3)]

필수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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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조건>

- 레티안트 신전의 [자료]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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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메인 퀘스트 : 자료 찾기(2)]를 완수하지 못하였습니다.

연계 퀘스트의 원활한 진행을 위한 [단서]가

지급되지 않습니다.

성공 보상 : 비비안의 기록 중 일부

"…이런,"

쯧, 하며 혀를 차는 전정국의 소리가 들렸다. 나와 눈을 마주친 그는 그 즉시 오래된 지도를 품에 넣은 채 발코니를 열어젖혔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홀의 입구를 통해 빠져나가는 우리의 등 뒤로 수많은 시선들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들을 신경 쓸 틈도 없이 우리는 공작 저의 대문으로 난 길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한달만이네용...

어떻게든 완결은 내겠다는 의지를 담아

꾸역꾸역 써왔읍니다...ㅋㅋㅋ

늦어져서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