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이었다.
어릴적 책이나 드라마에서 보던 사랑은 위대하고 강력했다. 벚꽃잎 휘날리는 거리에서 그 사람을 제외한 모든것이 페이드아웃 되는 상황을 경험하고, 상대방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것은 기본으로 장착되어있는 옵션인줄 알았다. 나에게 있어 어릴적부터 배운 사랑의 정의는 그러했다. '첫눈에 반하고, 그 사람을 위해 모든것을 다 해줄 수 있는것.' 그렇기 때문이었을까. 내 사랑의 첫시작은 그리 거창하지는 않았으며 사랑이라는것을 인지하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그는 첫눈에 반한다는 그런 클리셰들은 모조리 깨버릴 그저 재수없는 재수탱이 정도였다. 내 1등을 가져간 콧대높은 재수탱이. 조금 더 그에 대해 묘사해보자면 그는 나와는 정반대의 결을 가진 누가 빛이라도 쏴주듯 항상 밝고 주변에 사람이 많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를 처음 알게된것은 고등학교 1학년 중간고사 성적이 나온 날이었다. 그의 존재는 하루에도 열번씩 반 안에서 언급이 되고 있었던 상태였기에 익히 알고 있었다. 잘생긴 외모에 큰 키, 다정함, 게다가 공부까지 모두 갖춰 많은 여자애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던 아이였다. 매일 생글생글 웃으며 지나다니던 그가 처음으로 거슬리기 시작했던것은 중간고사 성적이 나온날 그가 우리반을 찾아오면서 시작되었다. 모두에게 무관심하던 나와 달리 그는 언제나 곁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렇기에 그가 나의 존재를 알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안녕, 난 전정국. 넌 구혜원 맞지?"
"너 나 알아?"
종례시간에 성적표를 나눠주신 선생님이 나간 후 처음으로 받아보는 '2등'이라는 성적에 충격을 먹어 앉아있던것도 잠시 '나'만이 존재했던 반에서 들려오는 꽤나 밝은 목소리에 성적표에서 눈을 뗀 후 올려다보자 내 눈앞에는 매일 들려오는 소문의 주인공인 전정국이 서있었다.
"음.. 당연하지? 너 공부 엄청 잘한다며. 고등학교 오기 전까지 계속 1등만 했다고 친구들이 말해줬어"
"나한테 볼일 있어? 공부 관련은 아닐텐데. 내가 알기로는 네가 전교 1등이라는 소문이 들려서 말이야. 혹시 1등인거 자랑하고 싶은거라면 네 주위에 있는 애들한테 해."

"이번엔 운 좋았던거야. 공부 때문만은 아니고 너랑 친구하고 싶어서 왔는데 너무 차갑네.."
처음 내려간 등수에 멘탈이 깨져있었는데 그와중에 등장한 1등이라는 놈이 친구를 하자고 하다니. 지금 이게 꿈인가 싶어 눈을 잠시 감고 흐트러진 정신을 차렸다. 이미 주변에 널린게 친구인 그가 굳이 나에게 와서 이러는 이유는 내 기준 단 하나였다. 그를 대적할만한 상대는 2등인 나이기에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왔을거라는 추측만이 내가 현재 할 수 있는것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 학교에 친구나 만들려고 온게 아니라서. 그리고 너 주변에 친구 많은데 굳이 왜 나한테 친해지자고 하는건지 모르겠어. 할말 끝났으면 이제 그만 가줄래? 나 공부해야해서."
"그럼 이렇게 하자. 난 이제부터 계속 너랑 친구하기 위해 노력할거야. 그게 싫으면 이번 기말고사에서 날 제치고 1등해봐. 그럼 그때부터 거슬리게 하는 일은 없을거야. 대신 만약 그때도 내가 1등을 한다면 그때는 내 소원 하나 들어줘. 어때?"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싫으면 나랑 친구하던가~"

갑자기 찾아와서 친구를 하자고 하질 않나, 친구를 하기 싫으면 기말고사에서 자신을 제치고 1등을 하라고 하질 않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에 머리가 아파왔고 이런곳에 시간낭비를 한 시간이 없어 가방을 챙기고 그를 그냥 지나쳐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오면서 아까의 상황들이 생각이 나긴 했지만 조금 지나 다시 정신을 차린 후, 영어단어를 외우며 집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간 집가는 길을 괴롭히던 그에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지만 다행히 하교시간에만 나를 보러왔기에 여러 아이들의 질문폭탄을 감당할 일은 없었다. 어제까지는 그러했다. 집가는길, 더이상 하교시간에 괴롭히지 말라는 말을 한 이후 어떤 상태를 경험하게 될지 모른채 다음날을 맞이했다. 아침에 집을 나와 어김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자 양쪽에 이어폰을 끼고 인강을 들으며 교실로 향했다. 원래부터 아침마다 화장하느라 시끄러운 여자애들과 게임하는 남자애들로 인해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볼륨 한칸을 올리고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어 책상위에 오늘 아침에 자습할 책과 필통을 꺼냈다. 인강을 듣던중 너무 한자세로 고정한채 공부했는지 목이 아파 이어폰을 잠깐 빼고 목을 돌리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혜원아,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