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 단편 모음
내 교육의 방해꾼

정화랑
2026.08.20조회수 5
"지석아, 제발." 나는 실제로 읽지도 않은 교과서의 한 단락을 격렬하게 형광펜으로 칠하며 중얼거렸다. "나 이번 중간고사 망치면 전적으로 네 탓이야."
"나? 내가 뭐 어쨌다고?" 지석은 사무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다리를 꼬고 한쪽 팔을 등받이 위로 편안하게 걸쳤다. 우리 사이에 놓인 낮은 테이블 위로 산더미처럼 쌓인 단어 카드에는 전혀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지석은 지나치게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너 숨소리가 너무 커." 나는 시선을 페이지에 고정시킨 채 거짓말을 했다.
"나 여기 진짜 조용히 앉아 있는데." 지석이 콕 집어 말했고, 그의 목소리에는 위험할 정도로 짙은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리는 전술적 오류를 범했다. 아주 큰 실수였다. 지석은 눈가를 살짝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부드럽고 유혹적인 선으로 둥글게 말아 올린 채, 바로 그 특유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내 뇌 속에 얼마나 거대한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듯, 몹시 만족스러워 보였다. 지석은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 펜 한 자루를 위태롭게 올려놓고는, 내가 고통받는 모습을 구경하며 유유자적하게 펜을 돌려댔다.
"너 공부 안 하고 있잖아." 나는 형광펜으로 그를 가리키며 쏘아붙였다. "너 지난 20분 동안 노트 필기 한 페이지도 안 봤어."
"그야 너를 보는 게 훨씬 더 재밌으니까." 지석이 입꼬리를 더 넓게 말아 올리며 매끄럽게 받아쳤다. 그는 소파 위에서 내 쪽으로 몇 인치 더 가까이 미끄러지듯 다가왔고, 우리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자 그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하고 깔끔한 코롱 향이 내 코끝에 닿았다. "에이, 그러지 말고 15분만 쉬자. 네가 단어 카드로 나 테스트하게 해줄게."
"너 단어들 하나도 모르잖아."
"어디 한번 확인해 봐." 지석이 도발하듯 말했다. 그의 시선이 찰나의 순간 내 입술로 뚝 떨어졌다가 다시 내 눈으로 빠르게 돌아왔고, 그의 치명적인 미소는 거의 범죄 수준으로 짙어졌다. "만약 내가 연속으로 세 개 다 맞추면, 너 바로 책 덮고 나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러 가는 거다."
나는 펼쳐진 교과서 위로 형광펜을 툭 던지며 그의 도발을 받아들였다. " 좋아. 딱 세 단어야. 만약 하나라도 틀리면, 너 꼼짝 말고 조용히 앉아서 나 이 단원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 해."
나는 단어 카드 뭉치를 쥐고 중간에서 한 장을 슥 뽑아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첫 번째 단어. 신진대사(Metabolism)."
지석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그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띤 채 턱을 손바닥에 고여 받쳤다. "쉽네. 네가 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올 때마다 내 심장 속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작용이지."
"지석아! 그거 진짜 그런 뜻 아니잖아!"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숨을 들이켰다. 나는 최대한 로맨틱하지 않은 단어를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카드를 섞었다. "좋아, 두 번째 단어. 속도(Velocity)."
"네가 그 책을 덮는 순간, 내가 너한테 그 아이스 커피를 사다 주려고 달려가는 바로 그 정확한 스피드." 지석은 눈빛에 장난스러운 광채를 띤 채,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고 곧바로 말을 받아쳤다.
"너 진짜 못 말린다." 나는 패배를 인정하며 어깨를 툭 떨어뜨렸다. 나는 마지막 카드를 한 장 더 뽑아 테이블 위에 거의 내던지듯 올려놓았다. "마지막이야. 중력(Gravity)."
지석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우리 어깨가 거의 스칠 정도로 내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너에게로 끊임없이 끌어당기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 거봐, 나 천재 맞지? 세 개 다 맞췄어."
"됐다, 나 안 해!" 나는 소파 쿠션에 머리를 쾅 기대며, 완전한 패배의 의미로 멜로드라마 같은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지석은 조용한 방 안을 환하게 울리는 승리의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는 소파에서 거의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더니, 마치 그 자리에 몇 시간 동안이나 갇혀 있었던 사람처럼 다리를 털었다. 그러고는 젖은 재킷을 집어 들어 한쪽 팔에 걸치고, 아래로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격렬하게 흔들어댔다.
"가자, 가자, 얼른 가자!" 지석은 조금 전의 자신만만했던 미소는 어디 가고 아랫입술을 쏙 내밀며 귀엽게 징징거렸다. "이놈의 과학 때문에 내 뇌가 다 타버릴 것 같아. 이 방에 5분만 더 있다간 나 진짜 인간 교과서로 변해버릴걸.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우리 이름을 부르고 있잖아!"
나는 눈을 크게 흘겼지만, 입꼬리에 걸리는 미소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너 진짜 인류 역사상 최악의 공부 파트너야. 내 교육의 완전한 방해꾼이라고."
"난 네 교육의 영감이 되어주는 존재지." 지석은 내가 백팩 속으로 형광펜과 흩어진 종이들을 마구 밀어 넣기 시작하는 동안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매끄럽게 정정했다.
"방해 공작이겠지." 나는 가방 지퍼를 거칠게 닫으며 중얼거렸다. "나 이번 시험 망하면 교수님이 왜냐고 물어볼 때 네 이름이랑 네가 말한 그 엉터리 정의들 다 인쇄해서 제출해 버릴 거야."
지석은 묵직한 내 백팩 끈을 어깨 너머로 가볍게 넘기는 나를 바라보며 그저 킥킥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문을 향해 단 한 걸음도 떼기 전에, 그가 손을 뻗어 내 손을 붙잡았다.
그의 길쭉한 손가락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고, 그의 따뜻하고 단단한 손바닥이 내 피부에 맞닿았다. 방금 전까지 귀엽게 징징거리던 모습은 간데없고, 한순간에 지극히 자연스럽고 자신만만한 매력으로 훅 치고 들어오는 그의 온도 차에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지석은 반 걸음 더 다가와, 아까 전의 그 사람을 완전히 홀리는 파괴적인 비주얼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다 덤터기 쓸게." 지석이 낮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고 부드러운 음역대로 가라앉는 순간, 내 심장은 위험할 정도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대신 가방은 내가 들게 해줘."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비어 있는 한 손으로 내 어깨에서 백팩을 가뿐하게 벗겨내더니, 마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스웨터 조끼 위로 슥 걸쳐 멨다. 하지만 내 손은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우리 손가락을 단단히 맞잡은 채, 내가 복도로 걸어 나갈 수 있게 길을 이끌며 손가락 마디를 장난스럽게 꽉 쥐었다.
지석이 눈가에 부드러운 주름을 잡으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가자. 아이스 커피랑 데이트할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