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부 전선배
점심 시간, 혼자 학식을 먹으러 온 여주. 다미는 소개팅을 하느라 못 오고, 유진은 다음이 공강이라 바로 집으로 갔다. 혼자 온 만큼 맛있게 먹으려고 돈까스를 선택했는데, 손에 나이프를 쥐자마자 후회했다.
세 시간 넘게 물구나무 자세로 버티느라 후들후들 거리는 팔. 반대쪽은 상처가 있는 손이라 나이프를 쥐기가 애매하고. 그냥 국밥이나 시킬 걸, 하며 대충 숟가락으로 돈까스를 푹 퍼냈다.
"어? 응급실?"
"...?"
"왜 여기서 혼자 먹어. 그때 본 친구들은 어디 갔어?"
깜빡. 깜빡.
정국이 맞은편 의자를 빼내어 앉는다. 그 수순을 끝까지 지켜본 후에야 여주는 정국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아... 다들 약속 있다고 해서요. 혹시나 덜덜 떨리는 팔이 보일까, 얼른 다른 손을 빼내어 숟가락 옆에 두었던 물을 홀짝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선택 미스. 붕대 감은 손으로 물컵을 들자 정국의 시선이 그쪽으로 따라갔다. 손은 괜찮아? 반쯤 마신 물컵을 내려놓는 타이밍에 맞춰 정국이 물었다. 네, 뭐.... 상처에 대한 관심이 보이니 저절로 그때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여주는 대충 긍정을 표하며 말을 돌렸다.
"선배는... 오늘 안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아, 그러려고 했는데 친한 형이 밥 사준다고 해서. 그게 학식일 줄은 몰랐지만."
"그럼 여기 병원비,"
"됐어, 그걸로 음료수 사 먹어. 무슨 땀을 비오듯 흘리네. 많이 더워?"
"...."
아차. 팔 떨리는 것만 생각해서 땀은 생각도 못했다. 조금... 덥네요. 하하.... 여주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애꿎은 물만 벌컥벌컥 마셨다. 왠지 아까 있었던 일을 정국에게 말하면 뭔가 되게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입을 꾹 다물게 됐다. 뭐, 사실 말을 전하는 게 좋은 일도 아니고.
"야, 너 거기서 뭐... 어? 여주?"
"...안녕하세요. 선배."
헙. 이쪽으로 다가오는 석진을 본 여주의 눈이 커졌다. 무의식적으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리며 인사를 하자 석진은 여느 때와 같이 예쁘게 눈을 접어 웃으며 마주 인사해 준다.
"혼자 밥 먹으러 왔어? 친구들은?"
"약속... 있어서 다들 먼저 갔어요. 선배도 밥 먹으러 온 거예요?"
"응. 정국이 제대했다는 소식 듣고 밥 한 끼 사주려고 했지."
"그 밥 한 끼가 학식일 줄은 전혀 몰랐네. 이왕 사 줄 거면 기름칠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형?"
"차라리 벼룩의 간을 떼 먹어라. 나 요새 돈 없어, 인마."
"형이 돈이 없으면 누가 돈이 있어. 이번에 사격 금메달 따고 광고도 찍었다며. 소문이 자자하던데?"
"뭐래, 오버 하지 마. 그 정도 아니야."
석진이 식판 두 개를 들고 자연스럽게 테이블로 와 정국의 옆에 앉는다. 여주의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주위에서 힐끔힐끔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이번만큼은 여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근데, 둘이 아는 사이야? 여기서 둘이 얘기하고 있어서 깜짝 놀랐잖아."
"같은 유도부잖아. 술자리에서 보기도 했고. 난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 게 신기한데? 사격부랑 유도부는 접점이 없잖아."
"왜 없어. 만들면 생기는 게 접점인데. 그치, 여주야."
"네? 아,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여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손에 땀이 차는 게 물구나무 때문이 아닌 것 같다. 여주가 석진의 시선을 피하며 숟가락으로 돈까스를 쿡쿡 찌르고 있자, 그 모습을 본 석진이 손을 뻗어 여주의 식판을 가져갔다. 곧이어 예쁘게 잘린 돈까스가 여주의 앞으로 돌아왔다.
"손 다쳤네. 무슨 일 있었어?"
"아뇨, 그냥... 유리 조각에 조금 베였어요. 감사합니다."
"뭘 이런 걸로 감사해. 불편해 보이길래 조금 도와준 거야. 내가 사 준 건 아니지만, 맛있게 먹어."
포크를 쥔 손이 떨렸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씨익 웃는 석진에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푹 숙이고 꿋꿋하게 밥만 퍼 먹었다. 이게 어떤 맛인지 느껴지지도 않는다.
"뭐야? 형이 되게 챙겨주네. 형 나한테는 안 그러잖아."
"내가 널 왜 챙겨. 알아서 잘 하는데."
"응급실은 알아서 잘 못 해?"
"응급실? 갑자기 무슨 말 하는 거야. 우리 같은 주제로 대화하는 거 맞아?"
석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찬으로 나온 계란말이를 쿡 찍어 먹었다. 정국이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려는 기색이 보이자, 그보다 먼저 팔을 뻗은 여주가 정국의 입에 소시지를 쏙 집어넣었다.
"...."
"...."
어색한 분위기. 알 수 없는 눈빛 교환. 여주가 입을 꾹 다물고 현란하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니, 그 의미를 알아챈 정국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의 입에서 빠져나간 포크가 다시 여주의 식판 옆으로 돌아왔다. 이 상황을 바로 앞에서 목격한 석진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여주와 정국을 번갈아 쳐다봤다.
"...둘이 사귀어?"
"아니,"
"아니요!!!!"
정국의 목소리를 덮는 여주의 목소리. 여태 여주가 이 정도까지 크게 말한 적이 있었나 생각할 정도로 여주의 목소리는 컸다. ...그렇게까지 부정할 필요가 있는 거였나.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한 정국이 시선을 돌리자 붉어진 얼굴의 여주가 뒤늦게 실수를 깨달아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여주야, 그렇게까지 싫었어? 내가 미안."
"...아니에요...."
"근데 정국이가 그렇게 별로인 애는 아닌데... 전정국, 너 설마 여주한테 뭐 잘못했냐?"
"뭐래, 이제 두 번째 보는 건데. 나도 지금 좀 상처 받았거든? 내가 어디 가서 빠진다는 소리는 안 들었는데."
"죄송... 합니다...."
"사과하지 마라. 그게 더 나빠, 후배님."
"...."
정국이 입가에 묻은 양념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내며 여주가 입에 넣어준 소시지를 씹어 삼켰다. 석진은 예능을 보는 것마냥 큭큭대며 웃고, 정국은 태연하게 식사를 시작한다. 여주는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 반쯤 남은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먼저 가 볼...."
"오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 굳이 고개를 들어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았다. 누구를 그렇게 밝게 부르는 건지도.
"석진 오빠!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
"어, 여주야."
"...."
여주야. 그 부름의 주인은 '고여주'가 아니다.
"...정국, 오빠."
"...."
석진의 옆에 앉은 사람이 정국인 걸 알아차리자마자 환하게 웃고 있던 윤여주의 얼굴이 굳어갔다. 윤여주를 바라보는 석진, 정국을 바라보는 윤여주, 묵묵히 숟가락을 내려놓는 정국,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고여주.
윤여주를 바라보는 석진의 눈빛이, 정국을 바라보는 윤여주의 눈빛이, 석진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빛과 같다는 걸 눈치채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주는 주제 파악을 잘한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넘보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석진을 좋아하면서도 고백 한 번 하지 못하고 마음에 담기만 했다. 대회에 나갈 때마다 메달을 걸고 들어와 한국체대의 자랑이라고 불리는 석진은 감히 막 메달을 모으기 시작한 여주가 탐할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의 옆을 윤여주가 차지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여주는 지금 마치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두 남자주인공과 한 명의 여자주인공으로 이루어진 삼각관계에서 눈치 없이 끼어들어 남자주인공을 짝사랑하는 흔하디 흔한 조연1.
"여주야."
석진의 입에서 나온 '여주야'라는 부름이 자신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게, 그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게 너무 화가 났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이 근육통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냥... 학식 먹지 말 걸, 하고 의미 없는 후회만 남길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