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부 전선배
오늘 또 시간 맞춰 왔다고 누가 지랄할까 봐 훈련 시작 30분 전에 도착했다. 여주는 유진과 다미가 함께 있는 단톡방에 먼저 왔다고 톡을 남기곤 여유있게 도복으로 갈아입었다.
"어, 저, 선배!"
"?"
탈의실을 나와 훈련장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자 어제 생리통으로 주저앉았던 그 신입생, 아니 아진이 들뜬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훈련장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주니 아진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인형을 건넸다.
...인형? 연갈색으로 복실복실한 털을 가지고 있는 팔뚝 길이의 얇은 강아지 인형. 이걸 왜 주나 싶어 이리저리 둘러본 여주는 곧이어 허리를 홱 숙이는 아진에 놀란 눈을 했다.
"어제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대학교에서 하는 훈련은 처음이라 잘 몰라서... 아니, 핑계는 대지 않겠습니다!"
"...저기,"
"훈련 끝날 때까지 물구나무 서셨다고 들었습니다! 저 때문 맞죠...?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사실 제가 가진 재주가 손으로 아기자기한 거 만드는 것뿐이라, 운동은 적성에 안 맞습니다! 근데 이 학교에 어떻게 들어온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안 듣는구나. 응, 안 듣고 있어. 여주는 자신을 향해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는 아진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누가 이 장면을 본다면 이제 막 들어온 신입생한테 똥군기 잡는다고 욕 먹을 짓이었다.
일단 애부터 진정시켜야겠다 싶어 아진의 어깨를 잡으니 되려 아진에게 손을 붙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됐다. 키가 한 150은 되려나. 꽤 작은 아진이 올망똘망한 눈으로 올려다 보자 여주는 잔뜩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귀여운 건 위험하다.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여주의 귓볼이 빨갰다.
"비록 제 부족한 실력으로 만든 인형이지만 제발 받아주세요...!"
"어, 어... 알겠으니까, 일단 이것 좀 놓고...."
"제가 진짜... 어제 그렇게 집 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선배한테 정말 죄송하고, 고맙고... 어제 상황은 정말 무서웠지만 앞으로 산다면 선배처럼 살고 싶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건 좀 억지인 것 같은데,"
"앞으로 제 롤모델이 돼 주세요, 선배님!"
아, 얘 뭐야... 어제 배 아파서 다 죽어가던 애 맞아? 유진에 버금가는 파워 E 성향에 진땀이 다 흘렀다. 가까스로 억지로 힘을 줘 아진의 팔을 떼어냈다. 뭔가 대단한 감정을 담아내고 바라보는 눈빛에 여주는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그리고 여주가 가장 잘하는 '그것'을 실행한다.
"...그래, 몸은 좀 괜찮아?"
바로, 말 돌리기.
"네! 어제 하루종일 찜질하고 오늘도 약 먹고 왔더니 이젠 괜찮습니다!"
"다행이네. 어제 하루 쉬었으니까 오늘은 열심히 운동해. 인형은 고마워. 그럼 이만...."
은근슬쩍 말을 마무리하며 훈련장을 들어가자 아진이 닫히는 문을 탁 잡고 같이 들어선다. 아, 맞다. 얘도 유도부였지.
"선배님! 제 롤모델이 되어주세요!"
"...내가 되겠다고 하면 되는 거야?"
"네! 그럼요!"
"그럼 싫어. 안 할래."
"네? 왜요!"
"그걸 해서 내가 얻는 게 뭔데?"
"저요! 절 얻으실 수 있어요!"
"...."
말이 안 통한다. 거의 뭐 이유진급. 유진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주저리주저리 한다면, 아진은 상식을 벗어난 말들을 했다. 그러니까... 영양가 없는, 뭐 그런 거.
"...그래, 마음대로 해."
그리고 여주는, 말이 안 통하는 상대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았다. 무시하거나 행동으로 보이거나. 이번 선택은 전자였다.
"헐! 진짜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
"꺄악! 제가 진짜 잘 모실게요! 감사합니다!"
...맞는 선택을 한 건지는 조금 더 봐야할 것 같지만.
* * *
"네가 왜 여기 있어?"
"...네?"
"넌 어제처럼 물구나무나 서. 지금 너한테 가장 필요한 건 인내심이야."
"...."
부과대의 뒤끝이 이렇게 길 줄은 몰랐다. 열을 맞춰 서 있는 여주를 콕 집어 불러내더니 어제처럼 벽에 대고 물구나무를 서란다. 여주에게 가장 필요한 건 인내심이라면서.
여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부과대를 바라봤지만 어림도 없었다. 빨리 안 가? 사나운 눈빛으로 힘껏 쏘아보는 부과대에 결국 어제 서 있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하아...."
물구나무 자세를 유지한 지 세 시간째. 어제 느꼈던 근육통이 다시 찾아왔다. 머리에 피가 쏠려 시야가 어지럽고 다친 손 때문에 무게가 쏠려 팔이 저렸다. ...B조 오려면 한 시간 더 남았네.
8시부터 12시까지는 A조가, 2시부터 6시까지는 B조가 훈련장을 사용한다. 그 외 시간에는 강의를 듣던 훈련장을 쓰던 자유이고. 여주는 어제 물구나무를 선 자신을 바라보는 B조 사람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게 왜 일찍 와서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냐는 눈빛. 뭐든 좋으니 그들을 보기 전에 끝냈으면 좋겠다.
"어? 형,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아직 B조 타임 안 됐는데."
"일찍 와서 스트레칭 하려고 했지. 왜. 내가 먼저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봐, 돌돌이-."
"그런 거 없거든요!"
누가 온 건가, 갑자기 훈련장이 소란스러워졌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도 들리며 간간이 의미 없는 대화 소리도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주는 오로지 시계만 바라보며 A조 타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본다. 그때 되면 부과대도 지치겠지, 싶어서.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매번 듣던 소리가 아닌 걸 보니 부과대는 아니고. 누구지? 하며 눈을 굴린 여주는 딱 마주친 시선에 어... 하는 멍청한 소리를 냈다. 저도 모르게 코어에 힘을 빼 버려 다리가 흔들렸다. 이대로면 100퍼센트 넘어진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질끈 감으면, 누군가 여주의 발목을 붙잡아 천천히 바닥으로 내렸다.
"응급실."
"...."
"너 왜 이러고 있어."
안전하게 바닥에 누워있는 자세가 됐는데도 여주는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눈이 마주친 상대가 낯이 익은데, 귀에 들어오는 목소리가 낯이 익지 않아서. 정확히는, 무서울 정도로 음정이 낮아있어서.
"응급실."
"...."
"고여주."
아... 그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 석자에 결국 여주는 눈을 떠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