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부 전선배
"미안. 내가 더 일찍 말렸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선배가 사과할 일 아니잖아요."
식당 근처 벤치에 나란히 앉은 정국과 여주. 편의점에 들려 각자 맥주를 산 다음, 입술을 축일 정도만 머금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례되는 질문인 거 아는데, 아까 제 이름을 들어서요. 저랑 비교질 하지 말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
"아...."
"그... 석진 선배는 윤여주 좋아하고, 윤여주는 선배 좋아하는 것 같던데. 제가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요?"
여태까지는 그들만의 사정이 있겠거니 하며 넘어갔지만 정국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온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저 얼굴과 이름만 알 정도로 대면대면했던 윤여주가 갑자기 화를 낸 이유도 모르겠고.
정국은 여주의 질문에 뜸을 들이다 이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들켰네. 좀 창피하다. 이어 나온 한숨이 밤공기에 섞여들었다.
"뭐가 창피해요. 막말로... 선배가 차인 것도 아닌데."
"선배가 돼가지고 안 좋은 모습만 보였잖냐. 욕하고, 화내고."
"보기 좋았어요. 저 대신 화내준 거잖아요."
"...."
"사실 저 거기서 욕하려고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선배가 먼저 나서줘서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졌지만."
진심이 담긴 여주의 말에 정국이 장난스레 웃으며 머리를 쓸어넘긴다. 아쉽네. 욕하는 고여주 또 볼 수 있었을 텐데.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잠시 생각에 잠긴 여주는 맥주를 한모금 마시곤 조금 긴장한 얼굴로 정국에게 물었다.
"근데... 왜 아까부터 고여주라고 불러요?"
"응?"
"아니... 원래는 응급실이라고 불렀잖아요. 갑자기 이름으로 불리니까 적응이 안 돼서...."
양손에 쥔 맥주만 만지작만지작. 가만 있지를 못하는 여주의 손가락을 본 정국이 픽 바람소리를 내며 맥주를 마셨다.
"고여주니까 고여주라고 부르지."
"...."
"오늘 윤여주한테 얘기 들어보니까 네 마음 알 것 같기도 하고."
"네?"
"너는, 괜찮아?"
"뭐... 뭐가요?"
"너 석진이 형 좋아하잖아. 아까 거기서 석진이 형이 윤여주만 챙기는 거 바로 앞에서 봤는데 괜찮냐고."
"아...."
여주의 물음에 답하던 정국이 재빨리 말을 돌려 여주에게 질문했다. 정국이 윤여주에 대해 얘기하는 걸 피해 말을 돌린 걸 알면서도 여주는 정국의 질문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당연히...
"제, 제가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정국에겐 석진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으니까.
"그걸 어떻게 몰라. 같이 있을 때 보니까 티가 확 나던데."
"아...."
"그래서, 괜찮냐고."
정국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이번에는 다 마신 맥주를 내려놓은 채 여주를 똑바로 바라보고.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눈빛에 걱정이 서려있다는 것이 느껴져 여주는 괜히 고개를 돌려 큼큼거렸다.
"...괜찮아요.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뭘?"
"석진 선배가 윤여주를 좋아하는 것도, 둘이서 키스했다는 것도."
"...."
"사실 제가 봤거든요. 둘이 키스하는 거."
하하... 어색하게 쓴웃음을 지은 여주가 손에 든 맥주를 손가락으로 콕콕 건드렸다.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몰라요. 석진 선배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존경심이 들 정도로 정말 대단한 사람이니까, 여주랑 잘 어울리죠. 아, 저 말고 윤여주요. 예쁘고, 날씬하고, 성격도 좋... 이건 잘 모르겠으니까 취소."
장난스레 웃으며 뒤늦게 말을 덧붙이자 잠깐의 공백을 메우듯 진지한 정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고여주는 안 되는데? 여주가 정국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네? 듣긴 들었지만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질문. 두 눈을 깜빡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너 중학생 때부터 복싱하다가 고3 때 유도로 전향한 거라며. 근데 유도 시작한 지 1년도 안 돼서 한국체대 들어온 거잖아."
"어, 어, 그건 어떻게 알았...."
"있어. 시도때도 없이 네 자랑만 하는 네 열성팬."
팬...?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정국이 됐다며 손을 휘저었다.
"아무튼, 그렇게 따지면 네가 윤여주보다 더 열정적이고 석진이 형보다 더 대단한 사람인데.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해. 너 응원하는 사람 김 빠지게."
"...."
"남들이 너보고 독종이라고 하든 고구려하고 하든 신경 쓰지 마. 다 너보다 실력 없는 것들이고 네 발 밑에도 못 기어오르는 애들이야."
"...."
"아, 생각할수록 화나네. 내가 돌돌이한테 고구려가 뭔 뜻이냐고, 뭔데 그 새끼가 널 고구려라고 부르냐고 물어봤다가 의미 듣고 빡쳤잖아. 넌 그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었냐."
무거워진 분위기를 없애보려 정국이 과장되게 머리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밉지 않게 흘겨보는 시선에 여주는 치 웃으며 입술을 삐죽였다. 방금은 신경 쓰지 말라면서요. 그 말을 내뱉자마자 눈이 정통으로 마주치자 여주와 정국은 거의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정국이 일어났으니 여주도 일어날 겸 엉덩이를 들썩였다가, 조심스레 어깨를 잡아 꾹 누르는 정국의 손에 다시 벤치에 앉았다.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도 잠시, 정국이 다가와 한쪽 무릎을 굽혔다.
"신발끈 좀 잘 묶고 다녀."
"...."
"넘어지면 아프잖아."
"...."
"다음엔 안 묶어준다."
신발끈 매듭을 꽉 조이고 정국이 굽혔던 무릎을 펴 여주의 앞에 섰다. 가자. 데려다 줄게.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가자며 고갯짓 하는 정국. 여주는 그런 정국을 한 번, 단단히 묶인 신발끈을 한 번 번갈아 보다 천천히 벤치에서 일어났다.
"감사... 합니다."
오른쪽 신발끈은 석진이, 왼쪽 신발끈은 정국이. 같은 상황 속 예상치 못한 두 남자의 손길을 받아서 그런가, 오늘따라 유난히 심장이 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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