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사귀는 거 맞아요? 여주 본인도 왜 그런 얘기를 꺼냈는지 모르겠다. 사랑의 세레나데가 질릴 만큼 듣고 싶은 뭇 여자의 심리라든가 하는 게 아니야, 그저 연애 기간 내내 속에 꽁쳐놨던 원론적인 궁금증이 툭 튀어나온 것이었다. 물론 발동 스위치는 있었다. 잠시 잊고 지내던 지점을 부주의하게 건들인 건 근래 주변 동기들의 반응이 한몫했다. 3월. 한창 노가리 깔 시즌이라 과팅 나가자고 두루두루 불러모으는 이름에 제가 끼면 왠지 뻘쭘해졌고, 만나는 사람 있다고 줄줄이 설명해야 하는 상황은 말도 안 되게 껄끄럽고. 그 와중에 한둘은 너무 비밀스러워서 사귀는 줄도 몰랐다 몇 마디 던져 당사자 심경을 한층 복잡하게 했다.
누구랑 연애한들? 딱히 숨길 것도 아니다. 일단 저는 아닌데. 상대도 그렇게 생각할까가 문제였다.
단순 문답에 쓸데없이 시간을 질질 끈다. 최적의 답안을 고심하고 있는 것인지, 침묵에 대강 묻으려는 것인지. 생각에 잠겨 있던 눈동자가 도리어 차분하게 여주를 향했다.
"맞아."
"......"
"새삼스럽게."
군더더기 없는 대답. 그렇지만 강여주는 조금 더 물고 늘어지고 싶었다.
1 | 무미건조한 xx
성격이 원래 저렇다. 특별히 어디 모난 것도 아니고, 허허실실 간 쓸개 다 빼줄 만큼 착한 건 더더욱 아니지만. 민윤기는 알고 지내면 좋을 법한, 적당히 주변인들 호감을 사는 과묵한 과에 속했다. 저야 이때까지 활달하고 밝은 분위기 메이커 위주로 만났다지만 여주는 첫만남에 그를 나쁘게 보진 않았다. 오히려 눈에 딱 꽂힌 축이었다. 동아리 옮긴 후로 처음 호출 받은 술집 화장실 앞에서 마주쳤었다. 관은 같지만 겹치는 강의는 잘 없던지라 드문드문 소식을 전해 듣는 게 다였다. 몇 주 전 군휴학 후 복학했다는 것, 그 전까진 매나 단정한 스타일만 취급하던 사람이 어느 날엔 검었던 머리를 샛노랗게 탈색까지 하고 와 여학우들 사이에선 파장이 컸다는 것, 등등. 구두로만 듣던 인물의 실제적 강림은 가히 신비로웠다. 그날 우연찮게 얻어 걸린 자리도 하필 맞은편이었으므로 여주가 선뜻 서로간 이야기의 포문을 연 전적이 있다.
첫마디가 뭐였더라, 그래,
"철학과 김 교수님 아세요?"
다 터놓고 말하건대, 그때까지 민윤기와 사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물며 그런 비슷한 상상도 한 적이 없다. 틀림없이 양쪽 모두의 관심사가 아닐 아무개 교수 이름이나 꺼내든 것도 순전히 아는 사람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하는 인간 수집가의 정신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강여주는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이 있었고. 십수년동안 변함없이 직관적이었던 취향이 그 짝사랑남을 거슬러 민윤기에 당도하기까지의 과정은 맹세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둘은 사귄다. 사귀고 있다. 그게 작금의 결론이며 쟁점이다.
그렇다면 문제란 무엇이냐. 강여주는 지금, 저와 민윤기 사이의 관계성이 관계성 확립 전보다도 싫다는 것이다. 민윤기 그는 3학년줄의 학생으로, 외부 활동에 잦게 참여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에 뺨치게 과제 수행과 자기계발에 열성적인 부류였고, 다음 학기에는 대기업 인턴십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미래 보장형 인재였다. 그러니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 내일이로다 하는 강여주와는 성향부터가 다를 수밖에. 데이트는 철저히 주말 위주였다. 혹시나 싶어 평일에 시간 있냐 전화하면 답변은 배로 무뚝뚝했다.
-미안, 이번주에는 스터디 때문에 바쁠 것 같다. 영화는 다음주 토요일에 보자.
라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흠 잡을 데가 없다. 구체적이기도 해. 그런데 그는 묘하게... 우리가 사귄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아서. 여주는 줄곧 그래서 서운했다. 두 살 어리고 많은 정도로 어른이 되고 말고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강여주는 민윤기가 너무 어른스러워서 싫었다. 어른스럽다는 말은 불필요한 행동은 거두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굳이 내색하지 않는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여전히 인기가 좋지만 남에게 사적인 얘기는 잘 꺼내놓지 않는다는 굳은 철칙이 있다. 거기에는 아마 우리의 연애도 포함되어 있나 보다. 여주는 문득 속이 얼얼해졌다. 어느 저녁에. 그와 마주보는 식사 자리에서.
"그거 알아요? 제가 선배 얘기 하면 다들 놀라요."
"놀라?"
앞머리에 가린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갔다. 약간도 정말, 아주 많이 약간이라서 제법 예민한 눈썰미가 아니었더라면 대화가 끝나도록 캐치하지 못했을 미미한 반응이지만. 여주는 대수롭지 않은 척 말을 맺는다.
"둘이 만나는 줄 몰랐다고."
맞은편의 남자는 가만 생각한다. 미묘한 공백.
"응,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네."
학교에서는 얼굴 제대로 못 보잖아. 잠시간 조용하던 민윤기는 곧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투로 추측을 덧댔다. 천장에 달린 조명이 불시에 번뜩였다. 둘 다 아무 말도 않고 있으려니 그는 물을 벌컥 마신다. 여주는 연어 포케나 뒤적거리던 숟가락을 멈췄다. 효과음이라고는 서빙 직원이 바쁘게 홀을 오가는 발소리, 주위 하하호호 웃어대는 소리가 다. 입맛이 통 없이 인간들 뭐 하는지나 구경하려는데, 이 둘과 다름없이 분위기 좋은 밥집 찾아온 커플들이 태반이라 자연히 시선은 그들을 따랐다. 껴입은 외투 주머니에 사이좋게 끼워넣은 두 손. 밀착한 어깨와 애정어린 입맞춤. 여주는 고개를 돌려 제 앞사람의 반지 하나 없이 말끔한 맨 손가락을 바라본다.
그래, 이상해. 우린 이상하게도 저런 모습이 된 적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