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얼마 남지 않아 서서히 사물함을 비워야 했다. 수능 시험장을 만들기 위해 사물함을 옮기는 과정에서 안에 있는 물건들을 분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진도를 끝낸 지 오래인 과목들 교과서나 교재는 치운 지 오래라서 우석은 딱히 챙겨갈 것도 없었다. 주요과목 교재들을 챙기니 그 속에 있던 플래너가 뚝 떨어졌다. 학교에서 매년 나눠주는 플래너다.
“이게 여기 있었네.”
학사 일정은 물론 모의고사나 수능 관련 일정이 다 적혀있는 플래너인데 몇 달 전에 분실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작에 사물함 뒤져볼 걸. 우석은 먼지가 좀 쌓인 플래너를 넘겨 그동안 있었던 일정들을 살펴봤다. 3학년들의 일정은 모의고사와 학교 지필고사가 전부인데 1, 2학년을 대상으로 행사는 잔뜩 있었다.
“3학년은 이 학교 학생도 아니라는건가.”
괜히 투덜거리면서 우석은 이번 달 일정을 살펴봤다. 플래너에 있는 것 중에 3학년을 위한 일정은 딱 3개가 기록되어 있다. 수능, 학교 마지막 시험, 그리고 졸업. 정말 끝이 다가오기는 하는구나 싶던 찰나 우석의 눈에 1, 2학년을 대상으로 한 행사 하나가 들어왔다.
“인문학이 빛나는 저녁...”
1학년 때도 2학년 때도 우석이 참가했던 행사다. 솔직히 올해도 참가하고 싶기는 한데 3학년은 절대 가지 못하게 하는 행사인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괜히 남은 아쉬움에 심통도 난건지 우석은 플래너를 다시 사물함 안에 넣었다. 이 플래너가 영영 사라지든 말든 우석이 알 바가 아니었다.
올해 인문학이 빛나는 저녁은 늘 그랬듯 강당에서 진행한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우석은 괜한 아쉬움에 집에 가는 길에 들린 강당 앞에서 멈칫했다. 아직 행사가 시작하기 전이라 강당 내부는 음악소리와 학생들의 수다소리에 차있었다. 생기부 내용을 채우기 위해 1학년 때 들었던 행사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뜻깊었기에 2학년 때에도 참가했고 솔직히 올해도 참가하고는 싶었다. 3학년도 참가할 수 있는 행사였다면 말이다.
“..!”
저처럼 강당 앞에서 멈춰 문만 바라보고 있는 학생이 3학년일거라 생각한 우석은 그 학생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 학생은 이한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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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한결은 이미 집으로 가버린 우석에 멍하니 서있었다. 저번처럼 우석이 대놓고 자신을 아는 척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석이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듯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우석이 움찔한 것을 똑똑히 본 한결은 중얼거렸다.
“알아봐서 그런건가?”
행사가 시작하기 직전이라 그런지 강당 안에 있던 한 교사가 문을 열어 바깥을 확인했다. 그러다 한결을 발견하고는 학번과 이름을 물었다.
“저 이 행사 신청 못했어요.”
“신청 안했어도 참가하고 싶으면 여기 들어와도 괜찮아. 학번과 이름?”
“아, 20621 이한결이요.”
“네가 한결이구나. 들어와.”
“아까 선배도 여기 참가하고 싶어했던 것 같은데...”
강당 안으로 들어오면서 한결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교사가 입을 열었다.
“선배면 3학년? 3학년은 절대 이 행사 참여 못해.”
“아...”
“그러고보니 우석이가 여기 되게 오고 싶어했겠다.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이 행사 좋아했는데.”
한결이랑 대화를 한 게 아니라 그냥 혼자 중얼거리는 말인데도 한결은 괜히 뜨끔했다. 절대 그 선배가 우석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쩜 그 많은 3학년 학생들 중에 우석을 언급하시는건가 싶었다. 그만큼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가.
“먼저 1학년 대표 학생이 쓴 시 낭송이 있겠습니다.”
생각해보니 한결은 약 1년 전에 데뷔를 했고 한달 후에 이곳 무대에 올랐었다. 이 학교의 학생이 아닌 신인아이돌 그룹의 멤버로 말이다. 뭐, 친구들이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룹 자체보다는 같은 학교 학생이라는 한결에게 더 관심을 가졌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결은 자신이 올해, 내년에 또 아이돌의 자격으로 이 무대에 설 줄 알았다. 근데 지금 상황상으로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이 창작한 시를 낭송하는 학생을 보고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제목, 나만 알고 있는 비밀.
비밀이란 모든 사람이 알 수 없는 사실.
그럼에도 나만 알고는 있지 않는 사실.
비밀, 그건 모순이다.
몇 번이나 힘껏 외치던 나만 아는 비밀.
그럼에도 나만 아는 게 좋지 않은 비밀.
적어도 그대라는 사람과 함께 알고픈 그런 사실.
오늘도 그대에게 슬쩍 보내고 전하는 그런 사실.
비밀, 그건 모순이다.
그러면서도 진심이다.”
낭송이 끝나자마자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열심히 박수를 치는 몇몇 사람들은 아무 생각이 없어보인다. 그냥 예의상 박수를 쳐준다는 느낌이랄까. 박수소리도 없어서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것보다 낫기는 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결 역시 낭송이 끝나자마자 박수를 쳤다. 예의상 쳐준 건 아니다. 깊은 뜻이 담겨져있는 시는 아니었지만 그 시에 나름 공감했다는 뜻을 담은 박수였다. 나만 알고 있는 비밀. 한결이 어쩌면 그 사람과 함께 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비밀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게 만든 시였다. 강당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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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정류장에 도착한 우석은 달려온건지 살짝 숨을 헐떡였다. 누가 그를 쫓아온 건 아니었다. 그냥 강당에서 최대한 빨리 멀어지고 싶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만나서 그런지 표정 관리를 너무 못했던 것 같다.
“하... 부담이 되었으면 어쩌지.”
오늘도 그 애를 봐서 좋았다는 감정보다는 이 걱정이 앞서는 우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