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산을 나눠 쓰며 걸었다.
그런데 키가 작은 나와 달리 180cm가 넘는 운학 선배에게는 우산이 낮았는지, 머리에 자꾸 우산이 닿았다.
운학 “내 머리를 계속 때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내가 들게 해주는 게 나을 텐데ㅋㅋ”
여주 “아 죄송해요”

그렇게 운학 선배에게 우산 손잡이를 넘겨주고 어색한 분위기가 찾아왔다.
우산이 큰 편은 아니라 자꾸 어깨가 맞닿는 것이 신경 쓰였다.
운학 선배는 우산이 작은 걸 인지했는지 은근 손잡이를 내 쪽으로 기울여 우산을 잡았다.
우산을 안 기울여도 된다고 말하려 했지만 내 우산인데 내가 좀 젖는 게 억울하다 생각이 들어 말을 하지 않았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운학 선배의 얼굴이 보였다.
얼굴이 정말 내 이상형이긴 하다.
웃을 때 되게 예쁜 그런 눈에 완전 두부같은…
정신을 놓고 운학 선배를 빤히 쳐다보니 선배가 나를 쳐다보았다.
왜인지 심장이 뛴다.
아니야. 이건 그냥 비 오는 날에 남녀 둘이 우산을 쓰니까 자동적으로 그러는 거야.
계속해서 맞닿는 어깨에 괜히 움직임을 의식하게 된다.
눈치 없는 귓볼이 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운학 “너 이쪽으로 걸어. 차 많이 다닌다.”
선배가 자연스럽게 내가 차도 쪽으로 걷지 않도록 자리를 바꿨다.
사소한 배려가 오늘따라 좋다.
활발한 성격 탓에 조용한 이 순간을 참지 못한 듯한 운학 선배는 스몰토크를 남발한다.
운학 “너 김여주 맞지? 어제 신입생 환영회에서 본 것 같은데”
여주 “아 네. 어떻게 아셨지? 완전 반대편에 있었는데?”
운학 “아 자고 있길래 눈에 띄어서ㅋㅋ”
여주 “아ㅠㅠ 그때 보셨구나ㅠㅠㅋ 하필ㅠ”
여주는 운학 선배한테 술 먹다 뻗은 후배로 이미지가 보이고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운학 “난 김운학. 4학년이야.”
여주 “알고 있어요. 워낙 유명하시잖아요”
운학 “? 내가 왜 유명해?”
여주 “몰라서 물으세요? 그…”
운학 “아니 왜 뭔데?? 나 4년 동안 사고 하나도 안 쳤는데?”
여주 “귀엽다고…ㅋㅋㅋ”
여주 “자기 자랑하려고 계속 물어보신 건가ㅋㅋㅋ“
운학 “아니 그런 거면 좀 뻘쭘해지는데..”
여주 “ㅋㅎㅋㅎㅋㅋㅋㅎㅋㅋㅋ”
운학 선배의 말투와 이 상황, 표정까지 너무 웃겨 박장대소해버렸다.
운학 “아하잇 너무 웃네? 선배가 귀엽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질 않나 이렇게 비웃질 않나 너무 선배를 물로 보는 거 아니야??ㅋㅋ”
여주 “앜ㅋㅋ 죄송해요ㅋㅋㅋ”
겉으로 봤을 땐 그저 시끄러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상하게 기분을 좋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뭐라는 거야 진짜..
운학 “그래서 너 어디 쪽으로 가는데?”
여주 “저 ~~역 쪽으로 가요”
운학 “난 저기 저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주면 돼”
조금만 더 걸음을 옮기면 도착할 수 있는 버스정류장을 보고 왜인지 아쉬워졌다.
이게 무슨 감정이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데.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운학 선배는 눈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가야 했는데 발걸음이 잘 안 떼졌다.
그러다 운학 선배는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운학 “전화번호 좀 줘. 비 오는 날에 우산도 빌려줬는데 보답해야지”
굉장히 놀라 2초 동안은 가만히 있었던 것 같다.
급히 선배의 핸드폰을 잡아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여주 “여기요..”
운학 “그래 조심히 들어가!”
운학 선배는 금방 와 버린 버스를 타고 갔다.
하지만 내 심장은 아직 여운이 남는 듯 뛰고 있었다.
‘어..? 진짜 왜 이러지?’
집으로 걸어가면서 감정을 정리해 보니, 명확히 이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 알게 되었다.
‘아 나 운학선배 좋아하나 보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해도 선배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뭘 좋아할지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21년 모솔 김여주가 단단히 김운학에게 빠진 것 같다.
주고받은 연락처를 보며 혼자 웃기도 한다.
이런 내 모습이 낯설다.
이 도파민 터지는 사건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친구라곤 태산과 다빈밖에 없는 나란 사람.
다빈은 만난 지 2일밖에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저번에 내 스타일 아니라고 말해 놓고 번복하는 것이 가볍게 보이지 않을까?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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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리링 띠리링
통화 연결음이 울린다.
태산 “여보세요?”
여주 “야 한태산“
태산 “왜”
여주 “내가 재밌는 거 들려줄까? 너한테만 얘기하는 거임”

태산은 자신에게만 이야기해준다는 것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태산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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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나 좋아하는 사람 생긴 듯”
태산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없는 애가?
말을 하지 못한 이유는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여주 “야! 안 들려?”
난 너를 좋아하는데. 넌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태산 “… 끊어”
여주 “? 뭐여 그래 끊는다”
뚜뚜뚜-
통화 종료음이 울린다.
여주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염치없이 알고 싶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
알게 되는 순간 정말 끝날 것 같아서.
그런데도 자꾸 궁금하다.
10년 동안 난 무엇을 해왔던 걸까.
좋아하면서도 소꿉친구라는 이유로 네 곁에 있는 것에 만족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란 걸 알면서도.
이게 진정한 음침함이지 않을까?
핸드폰 화면에는 아직도 여주와의 통화 기록이 남아 있었다.
한참 동안 그 화면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나는 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차지할 수도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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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뭐야.. 왜 다짜고짜 끊재’
왜 갑자기 한태산이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으니까.
여주 “그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