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브 허티] 쪽팔려 게임

3화. 대답 못 하는 질문

다음 날 연습실 분위기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예준은 스피커 앞에서 동선을 다시 맞춰보고 있었고, 하민은 물을 마시며 안무 순서를 중얼거렸다. 노아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리했고, 은호는 평소처럼 크게 웃고 장난을 쳤다. 문제는 밤비였다. 밤비가 조금만 가까이 와도 은호는 괜히 몸에 힘이 들어갔다. 어제 복도에서 어깨가 닿았던 순간이 계속 떠올랐다. 아무것도 아닌 거리였는데, 이상하게 그 짧은 감각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밤비도 평소와 똑같은 척하고 있었다. 멤버들이 말을 걸면 잘 웃었고, 안무가 틀리면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그런데 은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만큼은 달랐다. 아주 잠깐 멈췄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돌렸다. 은호는 그게 더 신경 쓰였다. 차라리 피하면 피하는구나 싶을 텐데, 밤비는 자꾸 보다가 피했다. 마치 보고 싶은데 들키기는 싫은 사람처럼. 은호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스스로 놀라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을 이렇게까지 하냐고,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은호야, 집중.” 예준의 목소리에 은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하고 있어.” “하고 있는 사람 표정이 아닌데?” 하민이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 밤비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은호는 반사적으로 밤비를 봤다. 밤비는 모르는 척 물병 뚜껑만 만지고 있었다. 은호는 괜히 더 크게 말했다. “다시 해. 이번엔 안 틀려.” 음악이 다시 시작됐다. 은호는 일부러 더 정확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마주 보는 파트가 오자 또 문제가 생겼다. 밤비가 이번엔 웃지 않았다. 대신 똑바로 바라봤다. 그게 더 힘들었다.

연습이 끝나고 멤버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어제처럼, 그제처럼, 이상하게 두 사람만 늦게 남았다. 이제는 우연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은호는 가방에 이미 넣은 물병을 다시 꺼냈고, 밤비는 벗어둔 후드집업을 접었다가 다시 펼쳤다. 둘 다 시간을 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문이 닫히자 연습실 안이 조용해졌다.

 

 

 

 

밤비가 먼저 웃었다. “오늘도 하게?” 은호는 괜히 무심한 척했다. “네가 하고 싶어 보이는데.” “난 네가 할 줄 알고 기다린 건데.” “나?” “응. 어제 네가 먼저 물어본다고 했잖아.” 은호는 그제야 어젯밤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음엔 내가 먼저 물어볼 거야. 그때는 분위기에 휩쓸려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밤비는 그걸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은호는 천천히 밤비 앞에 앉았다. 밤비도 자연스럽게 마주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물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물건인데, 괜히 선처럼 보였다. 은호는 그 물병을 옆으로 밀었다. 밤비가 그걸 보고 아주 작게 웃었다. “왜 치워?” “방해돼서.” “뭐가?” 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또 이상해질 것 같았다.

 

 

“질문해.” 밤비가 말했다. 은호는 한참 동안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언제부터 나랑 있으면 불편했어?” 밤비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예상보다 바로 깊은 질문이었는지, 장난기 어린 얼굴이 조금 사라졌다. “그걸 첫 질문으로 해?” “응.” “되게 치사하다.” “도망가기 없기라며.” 밤비는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러다 천천히 말했다. “정확히는 불편한 게 아니라…” “응.” “의식하게 된 거.” 은호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밤비는 시선을 바닥에 둔 채 말을 이었다. “예전엔 그냥 편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네가 옆에 있으면 내가 어떻게 앉아 있는지도 신경 쓰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은호는 숨을 조용히 들이켰다. 밤비의 말이 이상하게 자기 마음과 비슷해서였다. 밤비는 손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니까 불편하다기보단, 쪽팔려.” “또 그 말이네.” “그러게.” 밤비가 작게 웃었다. 은호도 따라 웃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웃기엔 마음이 너무 간질거렸다. 은호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밤비를 봤다. “그럼 이제 네 질문.” 밤비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조금 진지했다. “너는?” “뭐가.” “너는 언제부터 나 의식했어?” 은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밤비가 물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들으니 말문이 막혔다. 언제부터였을까. 연습 중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인지, 밤비가 웃을 때마다 따라 웃게 됐을 때부터인지,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였는지 알 수 없었다. 은호는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 “모르겠어.” 밤비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건 대답 아니야.” “진짜 몰라서 그래.” “그럼 벌칙?” 은호는 잠깐 밤비를 바라봤다. 예전 같았으면 벌칙을 골랐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은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답할게.” 밤비의 손이 멈췄다. 은호는 말하기 전부터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처음엔 몰랐어. 그냥 네가 웃으면 나도 웃기고, 네가 장난치면 받아치는 게 편하고, 네가 옆에 있으면 연습이 덜 힘든 정도라고 생각했어.” 은호는 잠깐 숨을 골랐다. “근데 요즘은 아니야. 네가 웃으면 왜 웃는지 궁금하고, 조용하면 무슨 생각하는지 신경 쓰여. 나만 보는 건지, 그냥 다들한테 그러는 건지도 신경 쓰이고.” 말을 끝낼수록 은호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겠어. 언제부터인지.”

 

 

밤비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호는 괜히 후회가 밀려왔다. 너무 많이 말했나. 이 정도면 게임이 아니라 거의 고백 아닌가. 은호가 시선을 피하려는 순간, 밤비가 작게 말했다. “그거 되게 반칙이다.” 은호가 고개를 들었다. “뭐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라고 해.” “네가 물었잖아.” “그건 맞는데.” 밤비는 웃으려다가 실패했다. 귀 끝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은호는 그걸 보고 마음이 더 이상해졌다. 밤비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여러 번 봤지만, 오늘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밤비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은호는 순간 움찔했다. 밤비의 손은 은호의 손등 근처에서 멈췄다. 닿지는 않았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밤비는 그 상태로 말했다. “벌칙 하나 해도 돼?” 은호는 손을 빼지 않았다. “누가 벌칙인데.” “나.” “왜.” “나도 대답 애매하게 했으니까.” 은호는 밤비의 손을 내려다봤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이 짧은 간격이 오늘따라 너무 크게 느껴졌다. “뭔데.” 밤비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손 잡고 10초 있기.”

 

 

은호는 바로 밤비를 봤다. “그게 무슨 벌칙이야.” “쪽팔리잖아.” “너한테?” “응.” 밤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말이 오히려 은호를 더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은호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손끝이 먼저 닿았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밤비가 조심스럽게 은호의 손을 잡았다. 연습으로 뜨거워진 손이었고, 조금 떨리는 손이었다. 은호는 그 떨림이 자신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 손도 떨리고 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나.” 밤비가 작게 숫자를 셌다. “네가 세?” 은호가 낮게 물었다. “그럼 누가 세.” “빨리 세지 마.” 말하고 나서 은호는 입을 다물었다. 밤비가 은호를 봤다. “왜?” 은호는 시선을 피했다. “그냥.” 밤비가 웃었다. “또 그냥?” 은호도 결국 웃었다. 손은 여전히 잡은 채였다. 밤비는 숫자를 천천히 셌다. 둘. 셋. 넷. 숫자 사이가 너무 길었다. 은호는 원래라면 빨리 끝내라고 했을 텐데,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열까지 세고 나서도 둘은 바로 손을 놓지 않았다. 밤비가 먼저 손가락에 힘을 풀었다. 은호는 그제야 천천히 손을 뺐다. 손등에 남은 온기가 너무 선명해서, 은호는 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밤비도 아무 말 없이 후드집업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연습실 안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명이 밝게 켜져 있었지만, 둘 사이에는 방금 전과 다른 무언가가 생긴 것 같았다.

 

 

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음 질문.” 밤비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해?” “응.” 은호는 잠깐 망설였다. 이 질문을 해도 되는지 몰랐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피하고 싶지 않았다. “너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어?” 밤비의 표정이 굳었다. 은호는 그 반응만으로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밤비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작게 말했다. “있어.” 은호는 웃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래?” “응.” “누군데.” 밤비는 은호를 바라봤다.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은호는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밤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너무 조용해서, 너무 선명해서. 은호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순간, 밤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야.” “나 지금 더 하면 진짜 쪽팔릴 것 같아.” 밤비는 웃는 척했지만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은호는 붙잡고 싶었지만, 무슨 말로 붙잡아야 할지 몰랐다.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다시 묻는 것도, 방금 그 눈빛이 나냐고 묻는 것도 너무 어려웠다.

 

 

 

 

밤비는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멈췄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다음엔 네가 맞혀.” 은호는 그 자리에 앉은 채 밤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문이 닫히고 나서도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 손에는 아직 밤비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은호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열까지 세고도 놓지 못했던 손.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대답처럼 느껴졌던 눈빛. 은호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게임은 이제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은호는 다음 질문이 조금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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