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만 제 아내가 되어주세요.

EP.1

서울 한복판을 내려다보는 SH그룹 본사 최상층.

통유리 너머로는 회색 빌딩 숲이 끝없이 이어졌지만, 박성호의 시선은 그 풍경이 아닌 책상 위 서류에 머물러 있었다.

"대표님, 오전 일정 시작하셔야 합니다."

비서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도 성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결재 서류에 마지막 사인을 남긴 그는 만년필 뚜껑을 닫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스물여덟.

SH그룹 전략기획실 대표이사.

그리고 모두가 인정하는 차기 후계자.

직원들은 그를 완벽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빈틈없는 업무 처리, 냉정한 판단력,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성격.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가장 귀찮은 것이 하나 있었다.

'결혼.'

탁.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진동했다.

[할아버지]

짧은 이름 하나만 떠도 성호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잠시 망설인 끝에 전화를 받았다.

박회장 "지금 당장 집으로 와라."

성호 "...회의가 있습니다."

박회장 "취소해."

성호 "중요한 안건입니다."

박회장 "내 말이 더 중요하다."

뚝.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성호는 미간을 손끝으로 눌렀다.

"...또 시작이네."


한 시간 뒤.

박가 저택.

넓은 응접실에는 무거운 공기가 깔려 있었다.

박회장은 지팡이를 짚은 채 창밖을 바라보다 성호가 들어오자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박회장 "왔냐."

성호 "무슨 일이십니까."

인사도 짧았다.

둘은 원래 이런 사이였다.

애정 표현도, 안부도 없었다.

오직 필요한 말만.

박회장은 책상 서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성호 앞으로 밀었다.

박회장 "읽어."

성호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변호사 명의의 문서가 들어 있었다.

몇 줄 읽던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굳었다.

"...유언장?"

박회장 "정확히는 수정 유언이다."

문서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박성호가 1년 안에 혼인하지 않을 경우 SH그룹의 모든 후계 권한을 김운학에게 넘긴다.'

정적이 흘렀다.

성호는 다시 한번 문장을 읽었다.

오타도 아니었다.

농담도 아니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호 "...진심이십니까?"

박회장 "그래."

성호 "회사를 사람 장난감처럼 이용하실 생각입니까."

박회장 "장난이 아니다."

박회장은 성호를 똑바로 바라봤다.

박회장 "넌 일은 잘한다."

"

"하지만 사람을 믿을 줄 모른다."

"

"그런 놈이 그룹을 이끌면 회사는 커질지 몰라도 집안은 끝난다."

성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할아버지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기대본 적도 없었다.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 효율 없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애도 하지 않았고, 결혼은 더더욱 생각조차 없었다.

박회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박회장 "사랑해서 결혼하라는 게 아니다."

"

"그냥 결혼해."

"

"1년이다."

그 말만 남긴 채 박회장은 먼저 응접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성호는 손에 쥔 유언장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때, 문이 다시 열리며 사촌 김운학이 느긋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입가에는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운학 "형, 들었어요?"

성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운학 "결혼 안 하면 회사가 제 거라던데."

운학은 피식 웃으며 성호의 어깨를 툭 쳤다.

운학 "형은 연애도 안 해봤잖아요."

"

"1년 안에 결혼?"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운학 "불가능하겠네."

운학이 사라진 뒤에도 그 말은 응접실 안에 메아리처럼 남았다.

성호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

평생 지켜온 자리.

반드시 이어받아야 하는 회사.

그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건 단 하나.

'결혼.'

처음으로 그의 완벽하게 계획된 인생에,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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