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의글] 라이즈 원빈이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2화. 왜 나만 챙겨?

다음 날도 현장은 똑같이 정신없었다.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였고,

여주는 어제보다 더 열심히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문제는 일이 아니었다.

자꾸만 생각났다.

 

“여주 씨.”

 

원빈이 자기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여주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야. 진짜 이상한 거 아냐.’

 

이름 한 번 불렸다고 이러는 게 더 웃겼다.

그냥 다들 부르는 걸 들었으니까 기억한 거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주 씨, 이거 먼저 옮겨줄래?”

“아, 네!”

 

여주는 급하게 상자를 안아 들었다.

생각보다 조금 무거웠다.

 

그래도 티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걸었다.

그런데 두 걸음쯤 갔을 때였다.

 

“잠깐.”

 

또 익숙한 낮은 목소리였다.

여주는 흠칫해서 돌아봤다.

 

원빈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무거워 보여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

“진짜 괜찮아요!”

 

여주가 괜히 더 크게 말하자, 원빈은 상자를 한 번 보더니 그대로 한쪽을 들어 올렸다.

 

“같이 들면 되잖아요.”

“네?”

“어디까지 가요?”

 

여주는 얼떨떨한 얼굴로 앞쪽을 가리켰다.

 

“저기… 테이블 옆이요.”

“가요.”

 

그 말 그대로였다.

원빈은 아무렇지 않게 상자 한쪽을 든 채 걸었고,

여주는 반대쪽을 든 채 거의 끌려가듯 따라갔다.

 

주변에 있던 스태프 몇 명이 흘끗 이쪽을 봤다.

여주는 괜히 더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니, 제가 혼자 할 수 있었는데…”

“혼자 하려고 했죠.”

“네…”

“근데 힘들어 보였어요.”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원빈은 정말 별일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상자를 내려놓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됐네.”

“감사합니다…”

“네.”

 

짧게 대답한 원빈은 그대로 돌아섰다.

정말 딱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여주는 잠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아니, 원래 다정한 사람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 이럴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한 여주는 일부러 원빈 쪽을 안 보려고 했다.

괜히 또 의미부여할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런 다짐은 오래 못 갔다.

 

“여주 씨, 물병 여기요.”

“아… 감사합니다!”

 

여주가 다른 물건 정리하느라 손이 모자라 헤매고 있자, 원빈이 먼저 테이블 위 물병을 집어 건넸다.

 

조금 뒤엔,

 

“이거 떨어졌어요.”

 

이번엔 여주가 주머니에서 흘린 립밤을 주워줬다.

 

또 조금 뒤엔,

 

“손 시려워 보여요.”

 

 

하고는 누가 가져다둔 작은 핫팩을 여주 쪽으로 밀어놨다.

여주는 멍한 얼굴로 핫팩을 내려다봤다.

 

‘뭐지?’

 

진짜 뭐지?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

이름 부른 것도 그렇고,

상자를 같이 든 것도 그렇고,

물병도, 립밤도, 핫팩도.

 

 

너무… 자주였다.

여주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혹시 원빈이 원래 다 이런 사람인가 싶어서.

 

그런데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원빈은 다른 스태프와 짧게 대화하다가도 금방 조용해졌다.

예의는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여주한테 했던 것처럼 먼저 뭘 챙겨주거나,

그렇게 눈에 띄게 다정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여주 심장이 괜히 또 이상하게 뛰었다.

 

“왜 그래?”

 

옆에서 일하던 스태프 언니가 물었다.

 

“얼굴 빨개졌는데.”

“네? 아, 아니에요!”

“더운가?”

“조금요…”

 

여주는 황급히 핫팩을 뒤로 숨겼다.

숨기고 나서야 더 수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 왜 숨겨.’

 

혼자 속으로 괴로워하는데,

멀리서 누군가 웃으며 말했다.

 

“원빈 오늘 되게 친절하네?”

 

여주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멤버 중 한 명이 장난스럽게 말한 거였다.

 

“원래 저렇게 안 챙기잖아.”

 

순간 공기가 아주 조금 묘해졌다.

여주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가만히 있었다.

원빈은 잠깐 그 말을 들은 듯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그냥 힘들어 보여서.”

 

짧고 담백한 대답이었다.

다들 “아~” 하고 웃으며 넘어갔다.

그런데 여주만 못 넘어갔다.

 

그냥 힘들어 보여서.

 

그 말이 더 이상했다.

왜 하필 자꾸 자기만.

왜 하필 계속.

 

그날 오후, 여주는 일부러 원빈 근처를 피했다.

정확히 말하면 피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현장이 좁으니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오히려 피하려고 하면 더 자주 마주쳤다.

 

“여주 씨.”

 

또 불렀다.

여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채 돌아봤다.

 

“네?”

 

원빈이 여주 앞에 작은 초콜릿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네?”

“아까부터 아무것도 못 먹은 것 같아서.”

 

 

여주는 진짜로 말문이 막혔다.

초콜릿을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얼굴로 가만히 있자, 원빈이 낮게 말했다.

 

“안 먹어요?”

“아, 아니요… 먹어요.”

 

여주는 얼른 받아 들었다.

손끝이 아주 잠깐 스쳤다.

 

진짜 잠깐이었는데, 여주는 그 짧은 감각 때문에 더 얼어붙었다.

원빈은 그런 여주를 잠깐 보더니 말했다.

 

“또 놀라네.”

“…안 놀랐어요.”

“맨날 놀라요.”

“안 맨날요…”

“어제도 놀라고, 오늘도 놀라고.”

 

여주는 괜히 입술만 달싹였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원빈은 아주 살짝 웃은 것 같기도 했다.

정말 살짝이라 착각일 수도 있었다.

 

“먹고 있어요.”

“아…”

“안 그러면 또 쓰러질 것 같으니까.”

 

그 말을 남기고 원빈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여주는 손에 쥔 초콜릿만 내려다봤다.

포장지도 안 뜯긴 작은 초콜릿 하나.

별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너무 크게 느껴졌다.

 

‘나만 왜 이래.’

 

아니, 원빈이 왜 이러는 건데.

그냥 착한 사람이라서?

내가 너무 티 나게 힘들어 보여서?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여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옆 스태프 언니에게 슬쩍 물었다.

 

“언니.”

“응?”

“원빈 씨… 원래 이렇게 친절하세요?”

 

언니는 손을 움직이던 채로 눈만 깜빡였다.

 

“누구한테?”

“…네?”

“아니, 그냥. 사람마다 다르지 않나?”

“아…”

“근데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주는 너무 급하게 대답해 버렸다.

언니는 여주를 빤히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래. 아무것도 아닌 얼굴은 아닌데.”

“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

“알았어, 알았어.”

 

더 묻지 않았지만, 여주는 혼자 더 찔렸다.

 

그날 스케줄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여주는 잠깐 복도 쪽으로 나와 숨을 돌리고 있었다.

 

안은 덥고 정신없고,

심장은 하루 종일 이상하게 뛰고,

머릿속은 더 복잡했다.

그때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여주는 별생각 없이 돌아봤다가 그대로 굳었다.

 

원빈이었다.

복도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원빈은 여주를 보더니 잠깐 멈췄다.

그리고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초콜릿 먹었어요?”

“…네.”

“맛없었나?”

“아니요!”

 

여주는 또 괜히 크게 대답했다.

원빈은 그 모습을 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근데 왜 자꾸 나 피해요?”

 

 

순간, 여주의 머릿속이 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