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댕동- 띵동댕동- 단조로운 종소리가 수능의 끝을 알렸다. 다른 수험생들에게는 해방의 종소리쯤 되려나. 하나같이 최대한 빠른 속도로 교실을 벗어나는 걸 보니 맞는 듯 싶다. 아마 마음 맞는 친구들을 만나 놀러 나가는 거겠지. 승우나 승식이를 부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들은 나와 달리 고3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놀기엔 아직 이르다는 생각에 그들을 부르는 건 조용히 내 선에서 접었다. 유일한 친구들이라 그들을 부르지 않으면 내가 놀러나갈 수는 없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겐 13명이나 되는 가족들이 있으니까.
“여주…라고 했나요?”
수험표에는 여주가 아닌 마음으로 적혀있었고, 명찰이 달려있는 것도 아니라 여주라는 이름을 알 길은 없었다. 민규 오빠한테서 들었다고 해도 버스 사건 이후 그는 나를 마음으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누군신데 그 이름을 아시죠?”
“여우영이요.”
그 순간, 그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중학생 때 나쁜 기억을 심어준 사람. 내가 성폭행을 당했단 사실을 학교에 악의적인 의도로 소문을 퍼뜨린 사람이었다. 나보다 1살 어리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여우년이었다. 남의 남친 홀리고 다니는. 그리고 그 남친이 그녀에게로 오면 쓰다 가차없이 버린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파다했다. 지금 이 장소에 와있는 걸 보면 여우영도 검정고시를 친 거겠지
“만날 사람은 다 만난다고. 오랜만이에요, 언니.
우리 진짜 인연인가봐요.”
“인연이 어찌 그리 쉬울까요.
같은 중학교, 같은 수능. 이게 인연의 조건이라면
여기서 적어도 몇 십 명은 인연일텐데.”
“그것만이 조건이 아니란 걸 알텐데요”
그녀의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근데 말이야, 네가 그러는 거에 상처 받고 혼자 울던 그런 나는 몇 개월 전에 완전히 사라졌거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변하냐고? 네가 생각지도 못할 사람들이 내 곁에 머물러주고 있어서.
“그건 네가 억지로 만들어낸 하나의 찌질한 일이지.
아, 그리고 그 때 그 사건, 공론화해줘서 고마웠어.
물론 그 사람이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기사는 좀 났더라고.”
“아, 언니. 내가 일부러 그려러던 거였는데.”
“악의적이었다는 건, 그 중학교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알아. 그리고 내가 언제부터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어?”
“언니라는 표현이 잘못됐어?”
“어쭈, 이제 반말까지 쓰시겠다? 너 솔직히 말해봐.
너 내가 민규 오빠랑 있는 거 봤지?”
“응, 봤어. 언니도 알잖아. 그게 내 특기인 거.”
“그런 특기는 빨리 버리길 바래.
난 네가 시간이 지나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지
안 봐도 눈에 선하거든”
언제 이렇게 말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었을까. 그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아는 사람도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여주야.”
바로 저 사람들 덕이지. 물론 지금은 한 명밖에 없지만, 한 사람만이라도 충분히 든든한 내 편이다. 근데 이 와중에 또 여주라고 불러주네. 내가 여우영에게 마음이란 이름을 알리고 싶지 않아한다는 걸 알아챘나보다. 여주란 이름보다 마음이란 이름이 점점 더 소중해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우영이라고 해요.
여주 언니 중학교 후배고요.”
그녀의 말에 그의 반응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여우인 걸 눈치채지 않아도 된다. 조금은 그녀에게 동요해도 된다. 원래 그러는 게 그녀가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내 편을 들어주길 바랬다. 내가 그의 편을 들어주는 것처럼.
“여주야, 왜 여우랑 말을 섞고 있어.”
순간 그의 말에 놀라고 말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우 구별을 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는데 그에게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응? 얘가 먼저 말을 걸어서…”
그럼 나도 조금 연기를 해볼까. 연기의 대가이신 여우영 님 앞에서.
“가끔은 무시해도 돼.”
그나저나 민규 오빠의 말투가 저렇게 단호했었나. 지금 내가 상처받았을까 걱정하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은 아닌 것 같고.
“저… 그냥 여주 언니 만나서 반가워서 그랬는데…”
“왜 여주한테 붙는지 다 보이는데요.
제가 학교 다닐 때도 이런 사람들 많았거든요.
덕분에 여사친 하나 못 만들었죠.”
아, 그래서 구분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민규 오빠의 외모나 키 그리고 성격까지 여자들에게 인기 많을 스타일이다. 그게 친구든, 연인이든. 민규 오빠는 여사친에 대한 로망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여우들 때문에 여사친을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지고 있다는 것이란 것도 안다.
“오해에요, 오빠. 전 다시 연락하면서 지내고 싶었거든요”
여우영은 한 마디도 지지 않는다. 하지만 민규 오빠는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그럼… 내가 얘랑 사귀고 있다면요?
그럼 이제 아예 대놓고 유혹할건가요?”
분명히 존대하고 있고, 말투도 상대가 그리 기분 나빠할 만큼의 말투는 아니다. 하지만 왜인지 말 안에 뼈와 살기가 동시에 공존한다. 그런 속뜻을 여우영도 눈치챘는지 순간 흠칫한다.
“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여주 언니보단 내가 낫잖아요”
흠칫한 것도 잠시, 그녀는 바로 말을 잇는다. 민규 오빠는 나를 자신의 뒤로 숨긴다. 말은 들려도 그녀의 얼굴을 보며 상처받지 말라는 뜻의 배려겠지.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에요, 우영 양.”
깍듯한 태도. 화가 약간 난 것처럼 보이지만 공인으로서 잘 참고 있다. 이와중에 기특하네, 민규 오빠.
“그리고 약간 흠칫하셨는데.
여주랑 다시 연락하고 싶은 게 저 때문이죠?”
그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마 민규 오빠가 정곡을 찔러서였겠지.
“가봐도 될까요?”
여우영이 아무 반응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자 민규 오빠는 내 손을 잡았다. 그냥 잡고 싶었던 건지, 아님 사귄다는 거짓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인건지. 암튼 그는 부드럽게 날 잡아당겼다. 왜인지 그의 눈동자에 파동이 일었다.

사귄다는 말을 벌써 2번째로 하는데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다. 학교 정문을 바라보는 학교 건물 1층의 문 앞에 서있다.
“난 오빠가 여우 구별할 줄 아는 거 몰랐어”
“이런 얼굴에다 연예인으로 살아봐.
구별할 줄 알게 되어있어”
대답은 하지만 내 신경은 온통 다른 데에 가있다. 아쉬움을 겨우 숨기고 그녀에게 묻는다.
“넌 내가 너랑 사귄다고 하면 신경 안 쓰이냐…”
나는 존나 설레는데. 그게 현실인 것만 같아 기쁘고 행복한데.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뭐든지 다 버릴 수 있을 텐데.
“이 질문 벌써 두번째네.
내 대답은 여전히 ‘응’이야.
대체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야?”
눈치 빠른 그녀는 유독 이런 부분에만 눈치가 느리다. 혼자 짝사랑하고 썸타고 다하는데, 당사자인 너는 모르는 것 같다. 비는 뚝뚝 떨어지고 너는 손을 뻗어 비를 만진다. 그 순간 깨닫고 말았다. 정말 나만 너를 좋아하는 거라는 걸. 씁쓸했지만 슬프진 않았다. 그녀의 옆에서 나도 손을 뻗어 비를 만진다
“가끔 고아원에서 이러고 있었거든.
좀 힐링되는 느낌이야.”
“응, 깨끗해지는 느낌이네.”
좋아해달라고 빌지만 않는다면, 매달리지만 않는다면 이 감정은 소중한 것이 아닐까? 대신 작은 욕심 하나 품어볼게. 내가 너에게 해주는 행동에 대해 작은 설레임이라도 느꼈으면 좋겠어. 내가 바라는 건 오직 그거 하나야, 마음아. 널 좋아하는 한 남자로서.
“근데, 치마 봐도봐도 너무 짧다.”
내 말에 그녀는 빵 터진다.
“남친 아니라 걱정할 필요 없다면서요”
“신경은 쓰여…”
그녀는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무엇을 알겠다는 거지. 약간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분명 단을 줄였다던 치마 길이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와있었다.
“뭐야…”
“접은 거였지롱~ 오빠 반응 재밌었어. 설레기도 설렜고”
푸흐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래, 훨씬 보기 좋아.”
“교복 치마는 길어야지.
대신 다른 치마를 짧게 입고 다닐거야!”
“치마, 내가 사줄게. 네가 원하는 거 다 사줄게”
“안 그래도 지금 홈쇼핑으로
오빠들 돈 열심히 쓰고 있어, 굳이 안 그래도”
“잘 하고 있네. 근데… 비 오는 거 좋아해?”
난 비오는 날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 바람까지 불면 온통 젖어버리곤 하니까.
“응, 많이. 해가 비치는 날보다 적어서 좋아했어.
아무래도 적은 게 소중한 법이니까”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이유마저도 그녀답다. 적은 게 소중하다,라. 맞는 말이지만 세븐틴처럼 많은 것도 소중했으면 좋겠다.
“사람은 예외야.”
가끔 얘가 내 속을 읽을 줄 아는지 의심할 때가 있다. 어쩜 이렇게 딱 맞는 답을 내주지?
“승철이 형한테 전화해볼까?
우리가 얼마나 북카페에 있을 수 있는지 확인해보자”
“응, 그러자.”
그녀의 대답이 이어지자마자 주머니 속에서 폰을 꺼내 단축번호 4번을 누른다. 아, 참고로 1~3번은 순서대로 아버지, 어머니, 민서다.
“여보세요. 벌써 마쳤어?”
“응, 우리 마쳤어. 여주도 옆에 있고.”
여주의 존재를 알리자 마음이가 신나서 물어본다.
“오빠들 어디야?”
“미안… 스케줄은 마쳤는데 차가 엄청 막히네?”
“아마 수능날이라 더 그럴거야. 얼마나 걸릴 거 같아?”
“한… 2시간?”
“미안해, 여주…!”
전파 너머로 순영이 형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한테는 미안하지도 않은가보다. 아, 순영이 형이 있는 거 보면 승관이랑 순영이 형은 차에 태운 모양이다. 하긴, 스케줄 장소가 서울고랑 엄청 가깝긴 했지.
“민규야, 너 지갑 있지?”
명호의 말에 약간 어이없어 웃는다. 당연하죠. 멤버들 늦을 거 예상하고 어디라도 들어가 있으려고 했는데.
“카페라도 들어가 있어.
비와서 추우니까 여주 따뜻한 거 먹이고.
보니까 만성 비염이더라…”
“오올… 석민이 오빠 관찰력 좋은데?”
난 네가 그런 걸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네. 아무리 만성 비염이 아침에 심하다고 하더라도 널 조금만 더 지켜봤더라면 쉽게 알 수가 있었을텐데. 아직 너의 곁에 서기에 많이 모자란 거 같아 미안해.
“여주는 걱정하지 마. 내가 잘 챙기고 있을게”
“빗길인데 운전 조심해!”
지금 누가 운전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참 그녀답게 따뜻한 말이다.
“다정한 거 봐. 알았어, 조심할테니까
여주도 감기 안 걸리게 따뜻하게 있어요~”
슈아 형이다. 역시 정한이 형과 슈아 형이 이 경쟁에서 최고의 라이벌이 아닌가 싶다. 물론 마음이가 이 경쟁에 관심이 있는 한에서.
“넹~”
애교와 비음이 잔뜩 섞인 대답으로 통화는 종료되었다.
“비 맞는 거, 괜찮아?”
내가 마음이에게 묻는다. 안 괜찮다 하면 내가 비를 맞고 우산을 사올 생각이다. 착한 그녀는 아예 대놓고 안 괜찮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불편해보이면 내가 갈 것이다.
“비 맞는 건 좋아해. 근데 그럼 그 다음날……”
말 끝을 흐렸다.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 다음날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아프다는 뜻이 되겠지.
“그럼 내가 가야겠네. 저기 편의점 보이지?”
“보이기는 한데… 저기까지 뛰어간다고?”
음… 생각보다 먼 거리이긴 했다. 한 15m 정도 되어보인다.
“비 맞으면서 달려본 적은 없지만…
운동한다 생각하고 갔다올게. 기다리고 있어.
무슨 일 생기면 소리 지르거나 전화하고. 알았지?”
걱정 한 바가지 그녀의 앞에 털어놓는다. 그녀는 그런 걱정이 싫지 않는 눈치다.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네엡. 비 맞고 집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씻어야 돼, 오빠. 알았지?”
너도 나한테 걱정 한 바가지 쏟아붓네. 서로 걱정을 주고 받는 사이란 얼마나 바람직한지. 나에게 너도, 너에게 나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증거니까.
“응, 그럴게.”
짧게 대답하고 가방의 모자를 꺼내쓴다. 물론 스케줄을 하는 게 아니라서 잘생겨보일 필요는 없지만 머리 그대로 비를 맞는 건 별로였다. 결정적으로 그녀 앞에선 항상 잘생겨보이고 싶었다.
“사람들이 오빠 알아보면?”
“그럴 일 없어요, 소녀야”
피식 웃어보이곤 빗속을 뛰었다. 초록색 네온 사인이 빛나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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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앞으로 쓸 내용 진짜 엄청 많은데, 시즌 2로 나눠서 시즌 2는 비주얼 팬픽으로 써볼까 해요. 괜찮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