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펜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쭈욱 폈다. 오랜 시간 한 자세로 있다보니 몸이 살짝 굳은 것 같았다.
다시 수정에 집중하려는데 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누구인지 확인해보니 찬이다.
“음, 저 전화 좀 받고 올게요”

“너 왜 이렇게 늦어? 인터뷰만 하고 오는 거 아녔어?”
“지금 회사야. 곡 수정보러 왔어.
그리고 네가 뭔 상관이래~?”
“야, 이런 흉흉한 세상에!”
“야, 이제 12시야!”
“아, 몰라몰라. 빨리 나오기나 해.”
“어딜?”
“어디긴 어디야. 너네 회사 앞이지”
“너 나 회사에 있는 것도 몰랐잖아!”
“다 아는 수가 있지. 간만에 나랑 단둘이
데이트나 할까, 마음아~”

“뭐래. 우리가 연인도 아니고 웬 데이트”
“야, 사전적 의미로 데이트요.
그런 로맨틱하고 오글거리는 데이트 말고”
“그런 데이트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던데…”
“시로…? 진짜 시른 거야?”
“애교는 사절이야, 이찬.”
“그래서 나온다는 거야, 안 나온다는 거야?”
“나갈게. 어차피 작업도 점심 먹으려고
잠시 미뤄두려고 했거든. 어디에 있는데?”
지금쯤 신나서 방방 뛰고 있겠지. 본인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로. 어쩌면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 장면이 머릿속에서 막힘없이 상상됐다. 그런 찬이를 보는 게 한 두 번이 아니라서. 그래서일까. 내 얼굴에 예쁜 미소가 지어지는 게.
“기분 좋은 일 있나보네? 누구랑 통화했어?”
“찬이, 그러니까 디노랑 통화했는데,
데이트 하러 가자네요. 그냥 사전적 의미의 데이트.”

“근데 왜 기분이 좋으실까~? 그 친구 좋아해?”
“그냥 현실친구입니다”
“음, 철벽 굳이 칠 필요 없어.
원하면 연애도 자유롭게 해도 돼”
“나머지 수정은 저도 해볼게요.
그리고 모르는 거 있으면
연락드리고 찾아뵙구요”
“마음이 진짜 열정적이야.
장마음, 엄청난 워커홀릭이라니까.
그래도 마음아, 건강 생각하며 해, 알았지?”
싱긋 웃으며 찬이를 만나러 가기 위해 가는 길, 누군가와 강하게 부딪혔다.
“으앗…! 죄송합니다!”
“아, 괜찮아요. 꽤 강하게 부딪힌 거 같은데,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어, 장마음 님!”
“저… 아세요?”
“그럼요. 이제 마음 후배님이신가.
같은 소속사 첫 후배라 기분이 좀 남달랐어요.”

“바쁘셔서 저 잘 모르실 줄 알았는데…
감동이에요, 선배님…”
“나 그렇게 무정한 사람 아닌데~
그것도 첫번째 후배님께는 더더욱?”
“우리 멤버들 만나고 갈래요?
지금 회사에 다 있는 데다가
멤버들 다 마음 양 보고 싶어했어요.
게다가 지금이 점심 때니까 딱 좋을 것 같은데”
허나 지금 찬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의 인맥도 가족부터 챙긴 후에 챙기는 것이 맞았다.
“말씀은 너무 감사드려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선약이 있어요…”
“오, 이런. 마음 양을 불편하게 하는 말이
아니었길 바래요”
“그런 것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제가 해야할 말인 걸요.
다음에 꼭 밥 한 번 사주세요, 선배님!”

“자, 찬아. 나는 지금 방탄 선배님의 제안도
거부하고 나왔단다?”
교복을 입어서 그런 걸까. 그런 거라 쳐도 처음 교복 입은 날과는 기분이 확연히 달랐다.
계속 나만 쳐다보고 있는 게 설레서 그런 걸까. 집이나 평소에는 13명 공평히 바라보고 있는 마음이가 나만을 바라보고 있어 미치도록 설레서일까.
아, 이 이유인 것 같다.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심장이 뛰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너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다.
“뭐 어쩌라는 걸까”
“좀 잘해보는 건 어때?”
“싫은데”

아니, 적어도 그녀가 나에게 한 번이라도 설렌 적이 있을 때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널 좋아하고 있다고.
그래서인지 말이 차가워지고 그녀의 눈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상처에 무척 예민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데 그녀는 나의 마음을 오해했는지 속상하게 말했다.
“그럼 나 들어갈래. 선약 취소됐다고 그래야지…”
내 쪽으로 지나가는 그녀의 손목을 탁 잡아챘다. 그럼에도 마음이는 밖으로 나가려는 의지를 꺾지 않았고, 살짝 더 힘을 주어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
힘 조절에 실패해 생긴 하나의 불상사였을 뿐인데, 심지어 전에 이런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이때까지 느껴본 적 없을 정도로 심장이 빨리 뛰었다. 내게 가까웠던 짧은 그 순간은 어떤 때보다 길었다.
“ㄲ, 꺼져”

바보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마음이는 아직 연애에 감정이 없다는 걸 아니까. 이제 막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시작했으니 연애로 발목을 잡고 싶지 않다.
세븐틴 내에서도 그녀를 좋아하는 형들일지라도 용서는 못했다. 연애는 그녀가 준비가 된 시간에, 그녀가 선택할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거니까.
연애는 한 순간의 유희가 아니라 평생의 배우자를 골라가는 하나의 과정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