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 빙의글] 메리지블루

1화. 계약서 위의 결혼

여주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

계약서.

정확히는 혼인 계약서였다.

 

 

법률 사무소 특유의 차가운 공기, 유리창 너머로 흐릿하게 번지는 오후의 빛,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성현까지. 모든 게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읽어봤어요?” 성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급하지도,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오늘 이 자리가 결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단순한 업무 미팅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주는 겨우 시선을 들어 성현을 바라봤다.

“네. 대충은요.”

“대충 말고 제대로 읽어야죠.”

성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손끝으로 테이블을 한 번 가볍게 두드렸을 뿐이었다.

 

 

여주는 다시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계약 기간 1년.
외부에는 정상적인 부부로 보일 것.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을 것.
필요한 행사에는 동행할 것.
계약 종료 후, 별도의 이의 없이 관계를 정리할 것.

 

 

글자는 선명한데, 내용은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건조할 수 있다는 걸 여주는 처음 알았다.

“이거 정말 괜찮아요?” 여주가 물었다.

 

 

 

 

성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여주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

“괜찮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 아닙니까.” “성현 씨한테는 손해잖아요.” “손해 아니에요.” “왜요?”

“나도 필요한 게 있으니까.”

 

 

사실 여주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집안 문제를 정리하려면 결혼이라는 형식이 필요했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성현은 어릴 때부터 집안끼리 알고 지낸 사이였다. 친하다고 하기엔 멀었고, 남이라고 하기엔 가까웠다.

명절이나 중요한 자리에서 몇 번 마주친 정도. 그때마다 성현은 늘 조용했고, 여주는 그런 그가 조금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말했다.

결혼합시다.

 

 

사랑해서가 아니라, 서로에게 필요한 조건이 맞으니까.

처음 들었을 땐 기가 막혔다. 그런데 며칠을 고민하고 나니 그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없었다.

 

 

여주는 펜을 집어 들었다. 펜촉이 계약서 위에 닿는 순간, 손끝이 아주 살짝 떨렸다. 성현의 시선이 그 손끝에 머물렀다.

“무서우면 지금 그만둬도 됩니다.” 여주는 멈칫했다. “그만두면요?”

“다른 방법 찾아보면 되죠.” “성현 씨도 곤란해지는 거 아니에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말은 무심했지만 이상하게 다정하게 들렸다.

 

 

여주는 괜히 입술을 꾹 눌렀다. 성현은 늘 이런 식이었다. 차갑게 말하는데, 완전히 차갑지는 않았다.

선을 긋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빠져나갈 틈은 만들어줬다. 그게 더 어렵게 느껴졌다.

 

 

“아니요. 할게요.” 여주는 결국 이름을 적었다.

서여주.

짧은 세 글자가 종이 위에 남았다.

 

 

성현은 그제야 자신의 펜을 들었다. 망설임 없는 손길이었다. 성현의 이름이 여주 이름 아래 나란히 적혔다.

엄성현.

 

 

그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 감정 없는 계약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름 두 개가 같은 종이 위에 놓인 것만으로 마음 한쪽이 묘하게 무거워졌다.

“이제부터 우리는 뭐예요?” 여주가 작게 물었다.

성현은 계약서를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법적으로는 부부겠죠.” “그거 말고요.” “그럼?” “우리끼리는요.”

 

 

성현은 여주를 바라봤다. 대답을 고르는 듯 잠시 침묵했다. “같은 편.” 의외의 대답이었다.

여주는 눈을 깜빡였다. “부부도 아니고요?” “그건 밖에서 하면 되고.” “그럼 안에서는요?”

“안에서는, 적어도 서로한테 불리한 사람은 되지 말자는 뜻입니다.”

여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편.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법률 사무소를 나온 뒤, 두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방금 막 결혼을 약속한 사람들치고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거울에 두 사람이 비쳤다. 여주는 거울 속 성현을 힐끗 봤다.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운 단정한 모습, 흐트러짐 없는 표정,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없는 눈.

 

 

정말 이 사람과 결혼을 하는구나. 그 생각을 하자 뒤늦게 실감이 밀려왔다.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성현이 말했다. “괜찮아요. 저 혼자 가도 돼요.” “오늘부터는 그러면 이상하죠.”

“뭐가요?” “계약 첫날부터 아내를 혼자 보내는 남편은 좀 그렇잖아요.”

 

 

 

 

아내.

그 단어에 여주는 순간 숨을 멈췄다.

 

 

성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혼자만 이상하게 반응한 것 같아 여주는 괜히 고개를 돌렸다.

“역할에 충실하시네요.” “그래야죠.” “진짜 남편처럼요?”

 

 

성현은 잠깐 여주를 바라봤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성현은 먼저 걸음을 옮기지 않고, 여주가 나갈 수 있게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필요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여주는 그 말을 듣고도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성현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안에 장난도, 가벼움도 없었다.

 

 

필요하면.

그 말이 마치, 원한다면, 하고 들려서.

여주는 괜히 손에 든 계약서를 더 세게 쥐었다.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차가웠다. 성현은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 섰다.

“추워요?” “조금요.”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성현이 자신의 재킷을 벗어 여주 어깨에 걸쳤다.

 

 

여주는 놀라 그를 올려다봤다. “이런 것도 계약에 있어요?” “없어요.” “그럼 왜요?”

성현은 차 문을 열며 짧게 대답했다.

 

 

 

 

“감기 걸리면 곤란하니까.” “누가요?” “내가.”

여주는 더 묻지 못했다.

 

 

차 안은 조용했다. 라디오도, 음악도 없었다. 성현은 운전에만 집중했고, 여주는 창밖을 바라봤다.

 

 

계약 결혼. 사랑 없는 결혼. 1년 뒤 끝날 관계.

분명 그렇게 정리했는데, 이상하게 오늘 하루가 끝이 아니라 시작처럼 느껴졌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여주는 안전벨트를 풀다가 잠시 망설였다.

“성현 씨.” “네.” “우리 진짜 괜찮겠죠?”

성현은 핸들 위에 올려둔 손을 천천히 내렸다. “뭐가요.”

“이 결혼이요.”

 

 

성현은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여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게 만들어야죠.”

“우리가요?” “네. 우리가.”

우리가.

 

 

 

 

여주는 그 말에 조용히 웃었다.

계약서에는 그런 말이 없었다. 우리라는 말도, 괜찮게 만들자는 말도.

그런데 이상하게 그 한마디가 계약서보다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여주는 성현의 재킷을 벗어 돌려주려 했다. 하지만 성현은 받지 않았다.

“입고 가요.” “내일 돌려드릴게요.” “그래요.”

 

 

여주는 차에서 내려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봤다. 성현은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여주가 공동현관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려는 듯, 조용히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여주는 그 모습을 보다가 괜히 심장이 한 번 이상하게 뛰는 걸 느꼈다.

 

 

이건 계약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여주는 성현의 재킷 자락을 손끝으로 꼭 쥐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혼잣말했다. “큰일 났네.”

아직 결혼식까지는 한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 결혼이 조금 무서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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