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결혼까지 생각한 건 대체 뭔가. 전정국은 지독하게 제 살 길을 파고드는 종자였다. 이 바닥 아는 사람끼리만 아는 펀드매니저와 좋은 자리를 잡아주겠다는 구실로 불과 며칠 전까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동창 A를 만나던 날, 제 양심껏 딱 삼천만 삥땅치려던 계획에서 어쩌다 함께 알게 된 그의 사촌누나로 노선을 틀게 된 것은 다만 우연이 아니었다. 미혼 30대 중반. 도곡동 가로수길 대단지에 딸린 작은 상가 소유. 그 누나 아버지가 골프 사업 하신다고? 중고 거래에서 맞춘 새검은 정장 깃을 탁탁 정리하며 정국이 어렵게 고뇌하는 척했다. 누군 이렇게 해 고작 몇 푼 벌어먹는 게 단데 인생 씨발... 하는 비루한 속마음을 읊는 줄도 모르고 눈 앞에는 잔뜩 기대를 머금은 얼굴의 동창 A가 앉아 있다. 그리고 찰나에 마주한 카페 옆 유리창 속 제 자신.
진실로 처량하고, 볼품없고......
잘생겼다.
정국은 그때 스파크처럼 탁 튀는 혜안을 감지한다. 삼십에 접어들 무렵 이 짓도 오래 못해먹겠다는 자각이 있긴 했지. 슬슬 정착이 필요한데다,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이성 한 명쯤은 각 잡고 거뜬히 꼬여낼 수 있는 상태. 한창 날릴 땐 유부녀 두 명을 동시에 파산시킨 적도 있었으므로, 심지어는 그게 고작 몇 년도 채 안 된 일이었으므로 시도해보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로서는 이대로 이리저리 쫓기는 사기꾼으로 남을 것이냐 돈 많은 여자랑 결혼까지 골인해 신발 밑짝까지 야무지게 뜯어먹고 살 것이냐의 선택이었다. 이 이상 무엇을 더 고민하리. 마음을 다잡은 얄쌍한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돌아오는 길, 전정국 손에는 급전 대신 그보다 더한 값어치의 연락처가 쥐어져 있었고. 그후로는 거리낄 것도 없이 속전속결이다.

맨스 비즈니스
남자의 사업
2.
"매번 연애는 두 달을 못 넘기고. 선 보는 남자들은 죄다 돈타령 집타령에... 괜한 소리가 아니라, 나는 진짜 이대로 결혼은 물 건너간 줄 알았다니깐."
어, 니 성격 진짜 지랄맞긴 하더라. 생각하며 말없이 은주를 향해 곱게 눈꼬리를 접었다.
"어떻게 너랑 나랑 이렇게 딱 좋은 시기에 만났을까? 정국아. 진짜 너무 꿈같다."
"우리가 만날 인연이라서 그래, 누나."
장장 일 년을 이러고 살다 보면 진심이 아닌 말을 할 때도 그다지 속이 메스껍지 않다. 원래부터가 거짓말을 물 새듯 줄줄 하는 게 정국의 천성인 건지도 모르겠다. 안 친한 동창 A, 의 사촌누나 김은주는 난놈의 핏줄답게 콧대가 셌으며, 막상 만날 기회가 있다 쳐도 그 잘난 콧대 덕에 뭇 남정네들은 말 한 번 붙이기 애먹을 타입이었다. 그래서 정국은 그녀가 건물주 일로 검문을 도는 날마다 꽃다발을 사다 바쳤다. 정성과 얼굴로 연타를 차지게 맞은 건지 첫만남에 아주 철옹성같던 김은주 씨는 단 2주 만에 정국에게 마음을 활짝 열었다. 너같은 애는 처음이다, 네가 진짜 내 마지막이다, 혼기 차고 사랑에 눈 먼 여자의 마음이란 대개 그렇다. 그 옆에서 순진무구하게 웃고 있는 전정국 양심의 가책? 별로 못 느끼는데. 도덕이고 뭐고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지금이 마냥 낭만의 시대도 아니고 속은 쪽의 단촐한 생각머리에 죄를 묻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냐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요컨대, 사귄 지 한 달 되었을 즈음만 해도 전정국은 이미 상상의 나래 속 저 집안네 재산을 반 가까이 털어먹는 짓까지 생생히 시뮬레이션 돌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안녕."
"네 처음 뵙겠습..."
"은주 남자친구라며?"
"아, 옙."
말을 끊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평이하게 지나가는 듯했던 그날, 정국은 어쩐지 눈앞의 이 사람이 제 적수가 될 만한 재목임을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위만큼 아랫 속눈썹이 긴, 조금 휘어진 눈매가 인사차 꾸벅 숙이는 저를 내려다 본다.
"듣던 것보다, 많이 어리네."
애인이 처음으로 저를 본가에 데려간 날이었다.
남자의 사업
3.
전정국. 직업 현재 무직(은주에게는 약간 프리한 아웃소싱 업체에 있다고 구라쳤다). 전공 경영. 회계사 시험 준비 중. 그 준비를 대략 5년 넘게 이어가고 있는 입장으로서 본인도 순혈 백수라 딸랑 말하기 몹시 그런 와중에 남 보기 꿀리지 않기 위해 덧붙인 변명일 뿐이지 준비 같은 건 옛적에 말아먹었다 봐도 무방했다. 더군다나 대학서 배운 건 얕은 시사 용어들, 또래 여자 후리는 법, 투자 사기를 위한 빌드업 등등 착실하게 등록금을 종이쪼가리 만들기에 일조하는 것들밖에 없기에 누군가 그 지점을 끈질기게 물어뜯기 시작한다면 정국은 입 다물고 얌전히 뜯기는 것 외엔 아무런 방법이 없다, 라는 거다. 그렇게 준비해둔 화려한 입담과 재치는 저녁 식사 자리에 쓰이지도 못하고 장렬히 폐기됐다. 다름아닌 김은주의 친오빠라는 작자 때문에.
"나도 경영 나왔는데. 지금은 뭐, 어디 회사 다니고 있다고?"
"아 저는 외주 일 하면서 회계사 준비를 좀..."
"CPA? 언제부터."
"그게, 졸업 전부터 공부를 시작하긴 했는데..."
"나이가 스물 아홉 아니었나."
"네... 그쯤..."
"아이, 오빠 왜 그래. 애 밥 먹는데 체하게."
하하... 정국이 머쓱한 웃음을 내지었다. 드문드문 날아오는 문장은 그리 길지 않은 대신 하나하나가 끝이 서늘하게 잘 갈려 있는 비수였다. 사기꾼도 사기를 치지 못할 때가 있다. 전정국이 고딕 무늬 금테가 둘러진 숟가락으로 냉국을 저으며 눈을 굴렸다. 동생의 만류에 별 내색없이 침묵하던 남자는 이내 그런 정국을 시선으로 잡아둔다. 막막하도록 새까만 검은자에 비친 제 모습이 문득 쫄아 있다고 느껴졌다. 그래, 딱 저런 인간. 빈틈을 보이면 자비도 없이 원투 날리고 바닥에 내리꽂을 것 같은 인간 앞에서는. 절대. 아직까지 저지른 일로 덜미를 잡혀본 적은 없으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정국아, 나 잠깐 전화. 동그랗게 찬 미소를 보이고는 멀어지는 은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관망한다. 둘만 남아도 분위기 뭐하긴 마찬가지이나 이대로 목석처럼 굳어 있기엔 수년간 다져온 전정국 말빨이 아깝기 그지없다. 그나저나 이름이 뭐였던가. 김태영이던가, 김태형이던가.
"저, 은주 누나한테 형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00 전자 다니신다고."
"응. 맞아."
"거기 제 동기 중에 인턴 했던 애가 있어 아는데, 어지간한 스펙으로 되는 데가 아니라면서요? 막 해외 엘리트들도 들어가기 어렵다던데... 여튼, 진짜 대단하십니다."
"그냥 회산데 뭘."
아무리 첫인상이 개판났기로서니 틀린 이름을 지껄일 순 없어 대충 형님, 하고 살랑댔다. 여자 한정으로 쓰임새가 있던 눈웃음이 지금 나오기에 적합한가를 따지기도 전에 전정국 뇌내 세포에 진하게 새겨져 있던 아부 dna가 튀어나온 판이다. 그러자 상대편은 방금까지 무상하게 만지작거리던 물컵을 놓고는, 전에 비해 조금 풀어진 기세로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은주 맞춰주는 게 보통 일 아니지?"
"어... 네?"
"아니, 그냥. 워낙 까다로운 애니까."
스치듯 희미한 미소. 전정국은 순간 제가 꾸린 이 거대한 연극의 존재 자체를 까마득하게 잊은 사람처럼 어리숙해진다.
"정국아, 지금 한강쪽으로 드라이브 나갈래? 아빠 차 한 대 빈다더라."
나이스 타이밍. 제 사랑 누나가 저만치서 따낸 승기를 자랑하듯 차키를 손가락에 대롱대롱 걸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떠 차종을 대강 유추해보려던 짜치는 근성이 정국의 남은 이성에 의해 납작하게 짓눌려 사라진다. 앞엣 사람의 아우라가 너무 강했던 탓이다. 으흠, 흠. 멋쩍은 헛기침 두 번. 나는 좋지. 누나는 안 피곤하겠어? 예의상 던져 물은 정국이 슬쩍 다시 돌아보니 그는 다행히 덧대는 소리 없이 바로 식사를 끝내고 일어나려는 모양이었다. 은주랑 결혼하면 분가하겠지? 불편해서 뭔, 겸상을 못하겠네. 긴장에 뻐근한 뒷목을 매만지며 정국이 아닌 척 테이블에 몇 초 가량 머물렀다 떠나는 곧은 손을 흘깃했다. 실거래가 6천의 V사 시계. 대화하느라 자세히 못 봤던 윗옷은? S사 170만짜리. 존심 같은 건 개나 줘버리고 옆에서 딸랑거리는 쪽도 나쁘진 않으려나... 생각했던 것은 아주 잠시.
4.
예비 장인어른.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입밖으론 못해도 머리로는 김은주 아버지라 명명하는 것이 편하다. 숨긴다고 숨겨지는 빈티가 아니라 첫 대면에서는 마음에 안 드는 기색이 역력하시더니, 딸내미 완강한 마음에 반기를 들지 못해 어느새 본가로 정국의 잦은 왕래마저 용인해주고 있는 형국이었다. 정국이 은주 찬지 걔네 집안 공용 찬지 모를 좀 비싼 차에 들어앉아 핸들에 얼굴을 붙이고 쩌억 하품했다. 어제 못 잤어? 옆좌석 은주가 묻는다. 아니. 그냥, 누나 집 갈 때 선물 뭐 사갈지 고민하느라. 참한 예비 사위처럼 내놓은 답안은 여지없이 거짓말. 정국아, 말하지 그랬어, 그래서 연락 안 됐구나? 정국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창밖 신호대기불을 응시했다. 꾹 깨물어 새하얗게 질린 입술이 금세 핏기를 되찾는다. 실은 니네 아버지한테 받은 시계 차고 술집에서 날샜어. 동창들, 봉급 꼬박꼬박 받는다고 잘난 척 졸라 하던 새끼들 그거 보여주니까 입이 턱 닫히더라. 그걸 니가 봤어야 하는데. 혀끝에 비릿하게 머물러 있던 진심은 바뀐 신호와 함께 사라진다.
"아, 오빠 집에 있었네?"
집에 단 둘뿐이라 생각했던 정국이 느리게 신발을 벗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 은주야. 정국이도 안녕."
"안녕하세요 형님, 또 뵙네요."
어째 올 때마다 자꾸 마주친다. 따로 집 있다고 들었는데. 정국의 입이 서둘러 어색함을 지우고 완만한 호선을 띄었다.
"자주 봐서 싫으니?"
"아이, 무슨 말씀이세요. 저야 안 잊어먹게 얼굴 자주 뵙고 좋죠."
"매일 있어야겠네. 그럼."
한손에 머그잔을 들고 있던 그가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지껄이고는 마저 차분하게 한 모금했다. 어머 잘됐다, 그러면 둘이 오늘 바베큐 할 장이라도 보고 올래? 은주가 외투를 벗으며 말하기를. 친해도 질겸-이란다. 도대체가 빵빠레 한번 불고, 혼인신고서에 지장 찍고, 여자쪽 재산 야금야금 뜯어먹고 갈라서면 다 끝날 간단한 일을 왜 이리 복잡하게 꼬아놔야 하는지 전정국 본인조차 이젠 의문이었으나 소파에 걸터앉은 단정한 뒤통수가 "그래." 선 대답을 저질러버린 후였으므로 이 위험한 동행은 이제 선택이 아닌 확정의 경지에 오른다.
5.
이제까지로 치면 세번째로 고치는 생각이다. 김은주의 오빠랑은 더이상 가까이 지내선 안 된다. 옛적엔 몸에 두른 명품에 혹했던 적도 있었지. 근데 사람 감이란 게 있잖아? 한평생 눈치만 뒤지게 봐왔던 정국의 레이더가 말한다. 느낌이 쎄하다. 그건 단순히 이 김태형이라는 사람이 고기나 잔뜩 사오라 보낸 식료품 코너에서 과자를 손에 한쪽씩 들고 신중하게 고르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이한 일이지만, 사람 상대하는 데 맥이 트인 그의 동물적 감각이 경고한 즉 저 인간이 언젠가는 제 인생에 크나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리라는 사실이었다. 옆동네 따로 집 있으면서도 김은주 있는 근방만 매일같이 싸고 도는 것이, 심지어는 그녀 왈 '평소엔 얼굴 자주 비추지도 않던' 사람이 말이다. 꼭 낯선 여동생의 남자친구를 못마땅해하는 걸 넘어서 아주 의심의 범주에 넣어버리는 것 같잖냐. 이러다 결혼마저 차질이 생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땐, 정국은 제가 불과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몸 담고 있던 그냥저냥한 회사마저 때려치고 나왔다는 사실을 불가피하게 떠올렸다. 안 돼... 고새 대출도 살짝 좀 질렀는데. 이대로 결혼까지 말아먹게 되면!
"..."
"추워?"
"네? 아니요."
"손을 조금 떨길래."
"형님 과자 다 고르셨어요?"
태형이 조금 굼뜨다가 건성으로 턱짓했다. 이미 카트에 서너 봉지는 담아놓은 게 보였다.
"이제 고기랑 쌈만 챙기고 가면 되겠네요. 더 사실 거... 없으시죠?"
"응."
"아하하 은주도 참. 이 날씨에 무슨 바베큐를 한다고."
정국이 한 손 엄지로 날씨앱을 휘적였다. 여름철 강수량 15mm. 적어도 해 떨어지기 전까진 온통 비였다.
"우리 집에서 좀 더 가면 실내 바베큐장 있어."
"아? 원래 다니시는 곳?"
"자주는 아니고, 거기도 아버지 소유라. 우린 종종 가."
"아... 좋네요."
"좋지."
끝으로 할말이 떨어졌다. 노파심에 말하자면 분명 나쁜 의미에서는 아니었다. 전정국은 이 근처 바베큐장만한 땅의 실매매가가 얼만치 될까 뇌내에서 계산기 때리느라 멍하니 카트를 미는 중이었으니까. 입에서 침이 흐르진 않을까 슬슬 걱정이 되던 차에는 옆사람이 혼잣말처럼 말을 붙여왔다. 은주 좋아하니? 이때 조금만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어도 정국은 상견례 직전의 예비 사위에게 예비 신부에 대한 애정도를 테스트하는 짓 따위에 이목구비를 살살 구겨가며 기가 막히다는 티를 내주었을 터였다. 그러나 프로페셔널함이 부족했던 탓인지, 태생이 돈이 궁해 언뜻 돈 냄새만 맡아도 맥을 못 추리는 궁핍한 천성을 타고난 탓인지 전정국은 질문을 받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태형에게 얼빠진 얼굴을 해보였다. 정적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안 좋아하나 봐?"
"그게 아니라요! 그게 아니고요, 네? 당연히 좋아하죠 누나. 당연히. 그냥 밖에서 말하려니 부끄러워서..."
"부끄러워서?"
"예... 아, 저기 계산대 줄 비었네요. 저기로 가시죠 형님."
그러면서 한 손으로는 카트를, 한 손으로는 쉽게 밀리지 않을 것만 같던 남의 등판에 슬쩍 손을 댔다. 어김없이 부들부들 고급진 원단감이 손바닥 표면에 착 달라붙었다. 가시죠 가시죠. 한 두 걸음은 끌려가는 듯 내키지 않아 하더니 곧 미는 힘 없이도 몇 발자국 성큼성큼 앞서갔다.
"그래.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결혼을 하겠어."
"그렇죠."
"내가 바보같았네."
"은주 누나 아끼시는 마음, 이해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네 형님."
금방 빠진 앞순서에 정국이 계산대 레일에 상추 더미를 차곡차곡 올리며 대답했다.
"너 사기 전과가 있더라?"
태형이 잘 포장된 삼겹살을 그 옆에 툭 올린다. 한치의 고저조차 없는 심상한 어조로. 그리고 그건 전정국 인생사 지금껏 어느 공포영화보다도 살벌한 이펙트로 다가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