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게 깎인 연필이 큰 도화지를 가로지르며 모양을 그려간다. 검은 선들은 5분채 되지 않아 옆에 매달려있던 자료 사진과 동일하게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연필을 쥔 손의 주인은 세상 관심 없는 표정으로 팔만 휘적일 뿐. 그의 얼굴엔 단 일절의 감정들, 표정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저번보다 그리는 속도가 느려졌네."
"...."
"성적도 저번 학기보다 낮아졌어."
"죄송합니다."
"원상복구 시켜."
"...."
"더 올려놓으면 좋고."
고귀하다는 단어를 인물화 시킨듯한 중년의 여성. 언제 들어왔지 알아채기도 전에 그를 향해 지겨운 말을 늘어놓았다. 한발자국, 두 발자국 성큼 걸어와 연필 한번 잡아보지 않았을 거 같은 손가락들로 그의 도화지를 한번 쓱 털고선 눈을 마주친다.ㅣ
"최고의 예술가."
"...."
"그게 너의 꿈이야."
그게, 내 꿈이라. 올곧게 뻗어져 있던 그의 팔이 툭, 힘없이 떨어졌다. 깜깜한 눈동자로 비치는 그림, 그림 중간에 덩그러니 서있는 이름 모를 사람 얼굴. 외로워 보인다. 참 누구와 닮았다. 고귀하게 굴던 여자가 자릴 비우고 그는 망설임 없이 연필깎이용 커터 칼을 집어 들어 그림을 향해 크게 사선으로 그었다. 외로움을 강조하던 거 같던 그림이 두개로 나눠져 한 쪽이 앞으로 기우뚱하더니 바닥에 맞닿았다. 여전히 매달려있는 종이 상단에 투박하게 적혀있는 그의 이름.
"... 내 꿈은, 최고의 예술가."
민윤기.
"... 예술가라."
그의 이름은 민윤기였다.
"민윤기 또 1등이래."
"걘 머리에 뭐가 들었길래 심사위원들이 툭하면 1등을 주냐."
"그냥 천재인 거지."
이야깃거리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들 뒤에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지속적으로 그들의 입에 올렸다. 민윤기가. 민윤기는. 민윤기니까. 민윤기답다. 민윤기 같았다. 이젠 누군가를 표현하기 위해 쓰이기까지 하는 석 자. 한 번쯤 눈길도 줄만 하지만 윤기는 고개를 올리지 않았다. 그저 상처로 투박한 지우개의 모퉁이를 뜯고 있을 뿐.
"근데 그거 지 엄마 빽일거 같은데."
"엄마? 우리 학교 이사장님?"
"생각해 봐라. 우리 학교가 그냥 좀 크냐?"
"... 그렇긴 해."
"자기 학교 이미지 챙기려고 지 아들 이용해먹은 거지."
판단력 부족한 새끼는 그것도 모르고 신나게 연필이나 잡고 흔들고. 자극 정성이다. 꿈틀. 윤기의 심기가 뒤틀렸다. 열등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목소리들이 키득인다. 모퉁이부터 몸통까지, 하나둘씩 조금씩 뜯겨지던 지우개. 윤기의 마음을 보여주던 지우개 한 번에 두 동강 내는데 완벽히 그를 분노시킨 한마디.
"좋겠다. 그런 엄마 있어서. 아빠는 무슨 생각 하실까."
쾅! 철제 의자가 비열한 목소리들의 애들이 서있던 벽 뒤에 명중했다. 여자애들은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고 남자애들은 놀란 것도 잠시 윤기를 쳐다봤다. 범인의 예상을 빗나갔다. 오히려 윤기마저 병 찐 표정이었고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니 우뚝 서있는 여자.
"너네 부모님도 부럽다. 입만 존나 잘 놀리는 아는 아들딸들 둬서."
비열하게 올라간 입꼬리. 하지만 그녀는 웃고 있지 않았다.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독에 찬 눈으로 그들을 쳐다볼 뿐.
"부러우면 부럽다. 그거 하나 말하기가 어렵냐? 너희 병신이야?"
"저 또라이가."
"이러다 한 대 치겠다,"
"문여주 네가 진짜 미쳤구나."
"뭐. 칠 거면, 여기."
여기 요즘 덜 맞아서 괜찮을 듯. 손가락으로 제 왼쪽 볼을 톡톡 치는 여주의 행동엔, 공포심 따윈 없었다. 오히려 손을 든 쪽이 사색하고 욕을 지껄이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잘 알았다. 그들의 평소 행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고등학생이라는 꼬리표로 저들 인생의 반환점이 생길 수 있는 것도. 다. 꿰뚫고 있었다.
"아쉽다."
"...."
"선생님한테 말할거면 정확하게 말해. 때린 거 아니고 겁준 거. 선빵은 아니였다? 부모 같은 사람은 되기 싫어서 선빵은 안때렸어."
"...."
"야, 민윤기."
"... 응."
"나와. 매점 가자. 싫으면 말고."
여주가 반을 나가고 윤기도 조용히 그녀를 따라나갔다. 반에는 여주를 욕하는 목소리만 들릴 뿐. 윤기의 이름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여주의 목적지는 애초에 매점이 아니었다. 흔한 학교 뒷길. 다만, 사람의 발길이 끊긴. 뒷길 중간쯤 걸어 들었을 때 그림자가 어둑히 진 곳에 여주가 털썩, 하고 앉는다. 너도 앉아봐. 열 식히는데 여기가 최고야. 윤기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얼마 안 가 여주 옆에 앉았다.
"넌 왜 화도 안 내고 있냐."
방금 전 일을 언급한 여주, 그리고 그 언급에 움찔한 윤기. 그를 보고 여주는 피식 웃었다. 장난. 사실 봤어. 의자 던지려고 한 거. 여주의 말 한 번에 이번엔 어떻게 알았냐는 듯 토끼 눈을 하며 그녀를 응시하는 윤기였다. 윤기는 알까, 현재 그의 얼굴은, 표정은 쉴 틈 없이 바뀐다는걸. 그리고 너무 잘 드러난다는 걸.
"다 보였어. 지우개 박살 나는 것도, 애들이 말 하나씩 뱉을 때마다 눈빛 변하는 것도."
"...."
"그래서 내가 던졌어."
"...."
"눈빛이 변하는 와중에도 두려움이 보여서."
"... 고마워."
"왜? 대신 던져줘서?."
"응."
"근데 난 그거 말고."
"...?"
"괜찮아."
"...."
난 그게 듣고 싶은데. 넌 괜찮아? 동시에 윤기의 가슴 쪽이 저리게 아팠다. 저 말을 마지막으로 들어본 게 언제였더라. 들어본 적은 있던가. 저 세 글자가 뭐라고 그의 머릿속에 윙윙거리며 맴돌았다. 난 괜찮을까. 지금의 나는 괜찮을까.
이상하리 세게 흔들리는 윤기의 눈동자에 여주가 고개를 갸웃, 하며 옆으로 비슴히 틀었다. 이상하다. 무슨 말이 그의 감정선을 건드렸던 건지, 여주는 얼마 가지 않아 알 수 있었다. 괜찮을 거야. 한참 뒤에서야 들을 수 있던 그의 대답. 더불어 확실하게 괜찮다, 도 아닌 괜찮을거야. 이상하다. 똑같은 생각이 다시 들었다. 이상해. 여주는 윤기의 눈을 마주치고 물었다.
"... 나 하나 질문."
"... 응."
"넌 그림이 좋아?"
이상한 생각에 참 멍청한 질문을 뱉었다.
"...."
그러나 대답을 못 한다.
"... 진짜 그냥 궁금해서. 넌 정말."
미술이 좋아? 벌떡. 윤기가 우뚝 일어서 여주를 내려봤다. 아까와는 다르게 어딘가 궁금증이 가득한 여주의 눈. 그 두 눈에 비치는 그의 모습. 위태롭다. 윤기가 아는 단어 중 현재 자신의 모습에 딱 알맞은 단어였다. 그만 얘기하자. 여주는 아무 말 하지 않았고 윤기는 돌아섰다. 주먹을 꽉 쥔 채. 그림자가 가득했던 뒷길을 빠져나오고 해가 보이자, 자신이 걸어 나왔던 곳을 뒤돌아본다.
너와 얘기할수록 기분이 이상해져.
내가 날 부정하게 돼.
내 인생이
"최고의 예술가. 그게 너의 꿈이야."
... 헛되었다는 것처럼 느껴지게 돼.

호수가 넓게 그려진 수채화 위에 작은 붓이 물 안 흔들림 한 번에 물이 사방으로 튀어 수채화 위에 튀어내린 물들은 색을 번져갔다. 불규칙적인 선들이 뻗어가며 색을 어지럽힌다. 무슨 색이라고 단정 짓기 힘든 색.
"...."
윤기는 지금 제 마음이 어려웠다. 아니.
어렵다.
혼자 텅 빈 미술실에 앉아 해가 어둑어둑 져 내릴 때까지 연필만 꾹 쥐고 있는 윤기. 평소라면 자료 사진들과 완성된 소묘 그림들로 쌓여있어야 할 책상이 깔끔했다. 하얀 도화지는 위에 자그마나게 민윤기라는 석자만 적혀있을 뿐. 그것을 제외하면 새 도화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공기, 분위기, 방이 외로움을 띄워서 그런지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는 윤기의 모습은. 깔끔하다, 잔잔하다 보단 외로움에 가까워서. 어둑히 진 하늘을 보여주는 창문을 통해 비친 자기 자신이 너무나 쓸쓸해 보여서.
감정 욱함에 길고 날카로운 연필을 종이를 향해 내리꽂았다. 종이 찢어진 소리 바로 뒤에 연필심이 부러져 나가떨어진 소리, 그 뒤엔 의자가 뒤로 요란스럽게 넘어간 소리.
"... 그려야 해."
그려야 해. 오늘은 그려야 해. 오늘도 그려야 해. 숨을 고르고 바로 새로운 도화지를 꺼내와 의자를 바로 새운 뒤 다시 연필을 잡았다. 그리고 아무거나 그리기 시작했다. 손이 뻗는 대로, 긋는 대로. 그렇게 미친 듯이 그리기만 몇 시간. 지우개가 힘없이 툭 떨어져서야 자신의 주위를 살핀 윤기. 수많은 종이들과 짧게 닳아버린 연필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 그림의 대부분은.
"... 아."
민윤기.
제 자신이었다.
윤기는 숨이 턱 막혀왔다. 홀로 스포트라이트 아래 서있는 모습. 저 모습은, 과거의 자신이었는지, 현재에 자신인지, 미래에 자신일지. 아니면 그 모두 다인지. 하나는 확실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행복했지도, 행복하지도, 행복할 거 같지도 않다는걸.
아무 정리 없이 가방만 챙겨 개인 미술실을 빠져나왔다. 휴대폰도 체력도 방전된 상태. 무척이나 무력해지는 순간에도 윤기는 영어 단어지를 꺼내 읊었다.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갇히기 곧 직전인 교문을 지나치자 환한 빛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
"빨리도 나온다."
"... 기다렸어?"
"어."
"왜?"
"기다리고 싶어서."
"... 가."
"응. 갈 거야. 너 태우고."
타. 뒷자리 너 때문에 비웠으니까. 밝은 빛의 주인은 바이크, 바이크의 주인은 문여주였다. 윤기가 거절하기도 전, 그를 향해 안전모가 날아왔다. ... 뭐야 이 공사장에 있을법한 안전모는. 공사장에 있는 거 가져온 거라. ... 너 공사장에서 일해? 오 눈치는 있고.
"... 진짜야?"
"그럼 가짜겠어?"
"거짓말일 수도 있지."
"넌 사람이 참 고지식한 거 알지?"
"....."
"몰랐으면 타."
"알았,"
"알았어도 타."
"애초에 내 의견 따윈 필요 없었구나."
응. 없었구나. 빨리 타. 안전모 옆에 적힌 석 자. 문연후. 훔쳐 온 거 맞구나. 잠시 망설이다 안전모를 쓰고 여주 뒤에 앉은 윤기는 아무 말 하지하지 않았고, 여주도 아무말 없이 출발했다. 12시를 향해가는 평일 저녁 도로는 텅 비어 바람만이 그들을 지나쳤고 바이크 소리만 들려왔다. 같은 위치의 가로등, 불규칙적으로 켜져 있는 건물 불들. 수많은 건물 사이 도착한 곳은 미완성된 공사장이었다.
"내려."
"여기는 왜."
"옥상이 대박이거든."
으스스한 건물 내부를 들어서고, 아슬아슬한 계단을 오르는 와중에도 윤기 의심찬 표정은 풀릴 생각이 없었다. 여주는 그를 힐끗 보고선 픽 웃고 옥상 문을 열었다. 다시 불어들어오는 바람. 맑았다. 도시는 맑았다. 윤기가 옥상 문 사이로 들어온 풍경들을 향해 꺼낸 말이었다.
"... 맑아."
"뭐가? 도시?"
"... 다."
"...."
"세상이 이렇게 맑은 줄 몰랐어."
"내가 쩐다고 했지."
"그러게."
"...."

"거짓말이 아니었어."
맑은 도시 풍경. 아슬한 옥상에 서 내려다본 도시 풍경은 맑았고, 윤기는 해방감을 느꼈다. 탁탁한 연필색의 회색이 아닌 구름 한 점 없이 달과 섞인 하늘의 색. 바람 소리가 연필 지나치는 소리와 바람의 시원함은 손에 잡혀있던 지우개를 대신했다.
"오늘따라 더 반짝거리네."
"...."
"야. 나 사진 좀 찍어줘."
"사진?"
"응."
"찍을 줄 모르는데...."
"버튼 하나 안 눌러봤냐?"
"그 뜻이 아니잖아."
"그럼 안다는 거네."
"...."
"반박 못 하지? 자. 찍어줘."
여주에게서 건네받은 휴대폰은... 낡았다. 최대한 순화시켜 말한 말이었다. 테이프로 감겨있는 액정들, 잘못하면 손에 박혀버릴 거 같은 밖을 향해 솟아있는 날카로운 조각들. 그래. 후졌다. 애초에 멀쩡한 휴대폰의 형태를 잃었으니까.
"...."
"편하게 찍어. 모델이 안 좋으니까 기대 안 해."
그러나. 그 휴대폰 안에서부터 비치는 여주는. 그녀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반짝거리는 야경 사이 가만히 서있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세상의 주인공 같아서. 윤기는 제 자신도 모르게 촬영 버튼을 연속으로 눌렀다. 찍었어? 휴대폰 화면으로 마주한 여주의 얼굴은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느리게 지나쳤다. 아직. 더 보고 싶다. 선명한 모습이 더 그리웠다.
작은 프레임 안에 담긴 것들은 눈부셨고 아름다웠다.
여주. 그녀 또한. 아니 어쩌면. 문여주 네가 가장.
"찍었어."
"오래 걸렸다."
"미안."
"미안 금지."
"... 할 말이 없는데 그럼."
"그럼 됐어. 어디 사진 좀 보자."
"여기."
"뭐야. 너 사진 잘 찍네? 왜 미술 말곤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처럼 굴어.
"그런 적 없는데."
"전자는 진심, 후자는 장난."
인생샷 하나 건졌다. 너 다음에도 나 찍어주라. 배시시, 그녀의 입꼬리가 살포시 위로 걸렸다. 진심 어린 표정에, 윤기도 웃었다. 기쁨이 아닌 설렘. 해냈다는 성취감이 아닌 새롭다는 두근거림.
"이제 내가 찍어줄게."
"너 바쁘잖아."
"... 안 바빠."
"그럼, 매주 화요일. 오늘 같은 시간에 나와. 기다리고 있을게."
기다리고 있는다.
넌 날 기다리고.
난 널 만날 그날을 기다리고.
아 벌써 보고 싶다.
그날이 벌써 보고 싶어.
"그리고 다음엔. 내가 널 도우지 못할 때."
"...."
"사람들이, 세상이 널 옥죄어오면."
"...."
"딱 한마디만 해."
"늦었구나."
"... 잠시 바람 좀 쐬고 왔어요."
"바람?"
"... 네."
"그래. 들어가 봐."
"그, 다음 주부터.. 화요일마다 바람 쐬고 와도 돼요?"
"... 그래."
"...!"
집 앞마당에서 바람 쐬렴. 12시 전까지 집에 귀가하고. 울컥. 순간적으로 답답함을 입 밖으로 내뱉을 뻔 한걸 틀어막았다. 이상해. 확실히 이상해졌다. 윤기는 제 자신이, 과거와 차이점이 생겼다는 걸 알아챘다. 곧이곧대로 복종했던 그의 어머니의 말에 처음으로 불편함이란 것이 새었고, 반항심이라는 단어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찍어주기로 했는데. 그러기로 했는데. 윤기의 눈빛이 변했던 건. 불과 몇 분 전 그녀와의 약속이 떠올라서였다. 단 하루에요. 7일 중 딱 하루.
"뭐?"
단 한 번도 구겨지지 않을 거 같았던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우아한 손짓으로 쥐고 있던 찻잔이 흔들렸고 눈빛도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윤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단 하루에요. 제가 살면서 어머니 말에 의견 내본 적 없잖아요. 이게 제 첫 의견이자 생각이고 부탁인데. 안 들어주실 건가요?
"안돼."
"...."
"안돼. 마음 진정시킬 겸 올라가서 선 연습이라도 하고 있으렴. 나도 곧 따라,"
"... 안 합니다."
"... 뭐?"
"연필 잡는 거. 지긋지긋해요."
"민윤기!"
"이 말이 내 진심일지, 아니면 현재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거짓 일진. 어머니가 판단하세요."
매주 화요일. 허락 안 하시면. 직접 제가 방법을 찾을 수밖엔 없어요. 쨍그랑! 매서운 소리가 거실에 퍼졌다. 하얀 카펫은 붉은 홍차색으로 물들어갔고 금색빛 파편들은 사실하게윤기 발 밑에 널브러졌다. 그리고 그 카펫 위에서, 씩씩거리며 윤기를 노려보는 그의 어머니. 처음이었다. 평정심을 잃은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내 인내심을 시험하려 들지 마."
"... 어머니야말로."
"...."
"그리고 다음엔. 내가 널 도우지 못할 때."
"...."
"사람들이, 세상이 널 옥죄어오면."
"...."
"딱 한마디만 해."
"내 인내심을 평가하려 들지 마."
"... 제 인내심을 평가하려 들지 마세요."
"진짜 다 엎어버리기 전에."
"어머니가 곱게 쌓아 올린 제 인생. 다 엎어버리기 전에."
"이 한마디면,"
"... 화요일 만이야."
"세상은 널 건드리지 못해."
"이만, 들어가렴."
"... 네."
포기에 한층 가까워진 그의 어머니의 표정만큼 여주를 향한 윤기의 신뢰도 한층 올라갔다.
진짜였어 여주야.
아무도 날 옥죄지 못해. 그게 내 어머니일지라도.
"... 내 담임선생님. 민윤기 학생 학부모입니다."
이렇게만 한다면,
"요즘, 민윤기 학생과 어울리는 학생이 있는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미래에는, 널 더 많이 찍어줄 수 있을지도.
다음 주 화요일까지 바쁘게 시간이 지난 시점. 미술실에 덩그러니 남아 앉아있는 윤기는 저번과는 많이 다르게 들떠있었다. A4 용지에 여러개의 칸들을 나눈뒤 인물을 그려보기도, 직접 자신을 촬영해 예쁜 각도를 찾아 그리기도 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다, 멈칫. 한번 더 동그란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휴대폰 화면에 적나라나게 드러나는 웃음기 있는 그의 얼굴.
"...."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마치 누군가에게 제 감장을 들통난 듯 한 수치심이었다. 그제서야 윤기는 자신을 둘러란 스케치들이 누구를 위해 그렸다는 걸 깨닳았다. 그림을 이렇게나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미소 짓었다니. 쓰레기통에 연필 깎은 흔적들이 쌓여갔음에도. 윤기는 이 모든 상황이 여주로 의해 일어났음을 알아차렸다.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던 모든것을 문여주라는 존재로 다시 시작하니, 즐기게 된다.
"... 큰일났다."
"큰일났다. 진짜."
"뭐가 큰일인데."
"!!!"
ㄴ, 너가 왜 여기있어! 기다리기 힘들어서.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의 주인은 바이크에 앉아 윤기를 기다리고 있어야했을 여주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온하고 장난끼 있었지만, 짧은 하복 아래 들어나는 멍자국들. 윤기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굳었다. 공허했던 마음 속 이름모를 분노가 들끓었다.
"... 이거 멍 뭐야?"
"...."
"... 공사장에서 일하다 어디 부딪친거지?"
" 공사장에서 일하다 부딪친건 아니고."
"그럼,"
"맞았지."

"... 뭐?"
"공사장에서 일하다, 손 삐끗해서 맞았어."
누구한테. 누가 왜 너한테 손을 대. 그 사람이 뭔데. 그때 당시, 여주과 봤을때의 윤기는 꽤 많이 살벌한 표정이었다. 묻잖아. 누구야. 그 연필로 찌르겠다, 진정해 일단. 날카로운 연필을 쥐고 있던 손이 아래로 힘없이 툭 떨어진다. 심호흡 소리가 몇차례 들려고 묵직한 목소리가 귀를 찌른다.
"진정, 됐어."
"때린 사람은 우리 아빠. 맞은 곳은 공사장."
"...."
"... 우리 오늘은, 공사장말고 바다 갈래?"
"넌, 괜찮아?"
"아니."
"...."
"그러니까 바다가자. 오늘만 고집부릴게."
처음으로 마주한 여주의 애절한 눈빛에, 윤기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렸다. 제대로 알고지낸지 1주일. 이렇게 마주해 대화한지 단 2일. 그럼에도 윤기가 그들 사이에서 느낀건,
동질감이었다.
"... 가자."
"진짜?"
"응."
"바이크로 3시간 정도 걸려."
"...."
현재 시각 10시. 간다면 새벽일테고 돌아오면, 어쩌면 해가 떠오를 시간일 수 있다. 윤기는 망설여졌다. 만약 아침에 집으로 들어간다면 미쳤다고 화를 낼지, 왜 이렇게 변했냐고 짜증을 낼지. 그의 어머니의 반응을 예상하기 힘들었기에.
하지만 여주가 윤기를 잡고 이끌땐,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조용히 그녀를 따랐다. 어쩌면 그는.
"가자. 바다로."
여주가 그를 잡아주길 바랬을지도.
시원하다. 바다를 마주했을 때 꺼낸 첫 마디였다. 3시간동안의 바다로 향하는 길은 조용했다. 둘 다 생각에 잠겨 앞만 보고 달려왔다. 툭. 모래사장에 앉은 여주를 따라 윤기도 앉았고, 입을 열었다.
"흔히 말하는 가정폭력이야. 엄마랑 이혼하더니 실수를 용납 못 하더라."
"...."
"내가 실수로 생겼거든. 때문에 이혼했고."
"...."
"근데 예전엔 실수하면 맞았는데, 이젠 그냥 맞아. 갱년긴지. 오락가락하더라."
"...."
"너는?"
"...."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에는 그림이 존재했고 시작은 5살.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미술을 고집했다고는 하는데 당연히 거짓말이었지. 그런데도, 그림을 못 놓겠더라. 그때 동안에 시간이 아까운 건지.
아깝다고 하기엔 괴로웠고 벗어나자고 하기엔 망설여진다. 윤기에게 이 말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그림이었다. 연필을 잡으면 지루하지만 망상 놓으면 무엇을 해야 할지, 그는 몰랐다.
"아까운 게 아니라 그냥 겁나는 거지."
"...."
"넌 평생을 그림이었으니까 벗어나지 못하는 거야. 이제 그림이 없으면 안 되는 존재처럼."
"...."
"우린 평생이 부모님 아래서 한 번도 의견을 내본 적이 없어서 힘들어도 그들 아래서 벗어나지 못 하는 거야."
"...."
"... 우리 약속 하나 할래?"
"약속?"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 도망가고 싶을 때 서로한테 먼저 말하기. 그리고 도와주기. 어때. 투는 가벼웠지만, 목소리는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당장 도망가고 싶은 표정이었고, 위태로웠다. 윤기의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져려왔다. 그리고 여주의 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붉은빛은 사라지고 푸른빛이 도는 멍을 매만지며. 입을 느릿히 열었다.
"이건 동정이겠지."
"...."
"설렘이라기엔 아프고, 불쌍하다고 생각하기엔. 나와 너무 닮아서."
"동정."
"...."
"그거 좋다."
우리 서로 동정하는 거야. 여주는 눈을 감았고 윤기는 조용히. 그녀의 볼을 매만졌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들으며, 느끼며. 따뜻한 그녀의 온기가 윤기에게까지 전해지며 그는 살포시 웃었다. 행복하다. 갑갑한 인생에서 윤기는 여주만 마주하면 느끼는 감정이었다.
여주야.
문여주.
이게 청춘이라면, 그게 행복이라면.
네가 내 행복이면.
너에게 내 청춘은 너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
정말 말대로 해가 보이고서야 윤기는 집 앞에 도착했다. 언제나 익숙하게 느껴졌던 들어가는 길이 윤기는 처음으로 망설여졌다. 자그마치 하루 만에 돌아오는 제 집이, 저 집안에서 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여자의 표정이 훤히 그려져서.
굳게 닫혀 자신을 압박해왔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오히려 차분했던 그의 어머니 때문에, 그는 등골이 서렸다.
"뭐 하니. 들어오지 않고?"
"... 화 안 나셨어요?"
"오늘 학교는 조퇴 처리했어."
"네?"
"일주일 동안 넌 어제 하지 못 한 일들을 몇 배로 해야 할 거야."
"그게 무슨... "
"내 경고를 무시한 건 너야."
"...."
"난 허락했었어. 거기서 무리수를 던진 건 너였고."
"...."
말문이 막혔다. 다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윤기의 머릿속엔 어제 여주가 하나하나 새겨줬던 말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쳤다.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 우린 서로의 구원이 되어주기로 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말들이지만.
"... 전 미술이 싫어요."
그 말을 다시 듣고 싶었다.
"그만하고 싶어요."
네가 보고 싶다.
"넌, 어릴 때 네가,"
"제가 미술을 원했다고 했죠."
"...."
"어머니는 매번 그랬어요. 다 절 위한 척, 지원하는 척했지만 결국엔 어머니의 분신이길 바랐잖아요."
"민윤기!"
전 예술가라는 꿈을 언제가 졌는지, 미술을 하고 싶다고 했는지 기억이 없어요. 근데 끝까지 고집했잖아요.
난 예술가가 되야한댜고.
난 미술과 함께해야 하는 운명이라고.
지금은 사진이 좋아요. 그 사람을 찍으면서 잘 찍었다며 미소 짓는 모습이 좋아서. 그 일을 위해서라면 끔찍이 싫어하던 그림도 그렸어요.
"그 사람이 ,문여주지?"
"...."
"걘 걱정 마. 내가 곧 퇴학,"
"시키면."
"...."
그땐 어머니를 정말 원망할 거 같아요. 있던 정, 없던 정까지 다 사라질 거 같아요. 윤기는 뒤를 돌았다. 이젠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뜻이었다. 끝까지 고귀했던 그녀는 윤기가 집을 벗어나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절망했다. 울부짖음에 가까운 그녀의 목소리에도 윤기는 가방끈만 꾹 쥐고, 한 손으로 폰을 들어 메시지 창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그의 몸이 딱딱히 굳으며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 도와줘 ]
여주의 한 마디에, 한 문자에 윤기는 직감했다.
[ 살려줘 ]
여주가 지금 많이 위태롭다는걸.
무거운 가방은 바닥에 내팽개친 지 오래, 그는 온 힘을 다해 단 한 번 가봤던 공사장으로 향했다. 여주의 위치를 묻지 않았어도 죽도록 뛰었다. 그녀가 공사장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유 모르게 확신이 들었었다.
여주가 거기 있을 거라는 확신.
그래서 윤기는 달리기만 했다. 여주를 마주하면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른 채.
"이딴 새끼를, 내가 아빠라 불렀네. 응."
"너 어디 갔다 왔냐고."
바다 다녀왔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대답해도 손을 휘둘렀고, 조용히 있어도 발이 나갔다. 그냥 윤기랑 도망갈걸. 너 남자랑 자고 왔냐? 작게 속삭인 말에 아빠라고 불리는 남자는 더 크게 분노했다. 윤기 그런 애 아니야. 더러운 년. 닥쳐. 그 애새끼는 너 어디가 좋아서 잤냐? 마지막 말에 여주는 옆에 있던 소주 병을 들어 소리쳤다.
"한 번 더 지껄이면 죽여버릴 거야."
"네가 날?"
"...."
"넌 못 해."
"...."
"애비 죽일 수 있는 자식이 어디 있다고."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여주는 그의 아빠를 죽일 자신도, 힘도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아빠라는 사람 뒤, 자신에게 달려오는 윤기였다. 그때 여주는 왜 자신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것이 안도감 때문이었는지, 감동해서였는지. 그저 그의 얼굴이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
"여주야."
"너야? 얘랑 잔 애새끼?"
"... 어떻게 해줄까."
"뭐?"
"같이 도망가자."
그전에 어떻게 해줄까. 난 네가 못하는 것도 해줄 수 있어. 여주 손의 쥐여준 소주 병에 시선이 고정된 채 질문했다. 여주는 그의 뜻을 이해했지만 좌우로 저었다. 그래. 그럼. 윤기는 옆에 있던 안전모를 들어 힘껏 내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빠라 불리는 사람은 힘없이 쓰러졌고 동시에 여주는 윤기에게 달려갔다.
"... 어떻게 알았어?"
"잘 알았어."
"...."
"... 저번에 네가 나 도와준 거 갚았다고 하자."
"... 그래."
"나도 사람을 때릴 줄 알았어."
"그게 진짜 너였나 보지."
"... 그래."
이게 나였나 보다. 그림보단 사진을. 널 위해서라면 모든 걸 할 수 있는 게.
둘은 환하게 웃었다. 해가 하늘 가운대로 향하기까지. 서로를 의지하며.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며. 가장 아름답다면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