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민 시점 —
이상하다고 느낀 건, 그날 엘리베이터에서부터였다.
눈을 뜨는 순간, 머릿속으로 뭔가가 쏟아져 들어왔다.
차 안, 브레이크, 깨지는 유리, 그리고 품에 안겨 있던 사람.
분명 처음 겪는 장면인데도 생생했다.
숨이 안 쉬어질 만큼.
그 뒤로도 비슷한 장면이 자꾸 끼어들었다.
순서도 없고, 앞뒤도 안 맞았다.
어떤 날은 손을 잡고 걷는 장면, 어떤 날은 차가 부딪히는 소리.
여주를 볼 때마다 그중 하나가 튀어나왔다.
처음엔 그냥 꿈이 덜 깨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주가 커피를 내밀었을 때, 손을 거두면서 느꼈던 그 감정은 꿈이 아니었다.
분명 전에도 똑같이 손을 거둔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마음이 아팠다.
운학이랑 자료실에 같이 앉아 있는 걸 봤을 때 치밀었던 그 질투도, 처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더 오래되고, 더 깊은 데서 올라온 감정 같았다.
전부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왜 이런 장면들이 끼어드는지, 이게 진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그냥 이상한 예감인지조차 몰랐다.
그래서 여주한테 제대로 말을 못 했다.
모르겠다고, 정리되면 말하겠다고 한 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그 장면들 안에서, 여주는 항상 자신보다 먼저 위험한 쪽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은 늘 좋지 않았다.
이번에도 여주가 뭔가를 혼자 짊어지려고 하는 걸 보면서, 그 장면들이 다시 겹쳐 보였다.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어도, 이번만큼은 모르는 척 피할 수가 없었다.
회사 서버에 들어가서, 선일 캐피탈 자금 흐름을 다시 열어봤다.
전에는 분기 말마다 비슷한 구멍이 생겼다가, 정산 전에 슬쩍 메워지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 구멍이 메워지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성호 실장 선에서 더는 못 막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왜 못 막는지가 문제였다.
성호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돈이 아니라면, 그 위에서 누군가 막았거나 늦추고 있다는 뜻이었다.
결국 아는 선배한테 넌지시 물었다.
성호 실장 결재 라인 위에, 뭐가 더 있는지.
위험한 걸 알면서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 여주 시점 —
아침부터 선일 캐피탈 자료를 붙잡고 있었다.
과거 3년 치 거래 내역을 날짜별로 정리하는 중이었다.
비슷한 패턴이 몇 번 반복되고 있었다.
분기 말마다 비슷한 액수가 비슷한 계좌로 빠졌다가, 정산 전에 슬쩍 메워지는 식이었다.
이번처럼 못 메우고 넘어간 적은 없었다.
탕비실 쪽에서 물을 받으러 가다가, 통화 중인 동민과 마주쳤다.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지만, 다 들렸다.
"…그러니까, 성호 실장 결재 라인 말고, 그 위에 뭐가 있는지 보려면 어느 서버 로그를 봐야 하는데요."
심장이 쿵 떨어졌다.
운학이 알아낸 것과 똑같은 걸, 동민이 혼자서 캐고 있었다.
동민이 뒤늦게 사람 기척을 느끼고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통화를 서둘러 끊었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방금요."
거짓말이었다. 거의 다 들었다.
"들으신 거,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냥 업무상……."
"업무상, 이사급 결재 라인 서버 로그를 왜 보세요."
말이 세게 나갔다.
동민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데 되돌아온 건 사과가 아니라 질문이었다.
"…그쪽은, 그런 말을 어떻게 아세요. 이사급 결재 라인이라는 게 있다는 거, 보통은 모르는 얘기인데."
말문이 막혔다.
그건 운학을 통해서 알아낸 거였다.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쪽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고요. 업무상이라는 거, 거짓말이잖아요."
"피하지 마시고 대답해 주세요. 어떻게 아셨어요."
이번엔 물러설 수 없는 질문이었다.
둘 다 서로한테 같은 걸 묻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저도 알아낸 경로가 있어요. 근데 그게, 동민 씨가 왜 혼자 움직였는지보다 먼저 나올 얘기는 아니에요. 저한테는 한마디도 안 하고, 혼자 여기까지 알아보고 계셨던 거잖아요."
동민이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 반응이 벌써 답이었다.
더 캐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동민이 먼저 물러섰다.
"…알겠어요. 그쪽이 그걸 어떻게 아는지는, 나중에 다시 물을게요."
넘어간 게 아니라 미뤄진 질문이었다.
그 질문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그때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아직 정해 둔 게 없었다.
*
오후, 자료실에서 운학과 마주 앉았다. 방금 들은 걸 그대로 전했다.
운학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형이, 왜 그걸."
"그러니까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혼자 움직이고 있었던 거예요."
"그 라인, 저도 간신히 변두리만 훑고 있는데. 형이 그걸 직접 들여다보려고 하면, 오히려 더 빨리 걸릴 수도 있어요. 저보다 눈에 더 잘 띄는 자리니까."
불안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쪽은요. 뭐 더 나온 거 있어요?"
"조금요. 이사급 결재란에, 영문 이니셜만 하나 나왔어요. 'S'로 서명돼 있는데, 그거 하나로는 아직 아무것도 못 해요."
운학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근데 그보다, 어제 집 앞에서 그 사람 또 봤어요. 며칠 안 보이던 거, 그냥 쉬고 있었던 거였나 봐요."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2주. 이제 그 숫자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조심해요. 집 들어갈 때 혼자 다니지 말고."
"그쪽도요. 형 혼자 움직이게 두면, 제일 먼저 위험해지는 건 형이에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동민이 혼자 더 깊이 들어갈수록, 지키려던 게 오히려 더 빨리 무너질 수 있었다.
*
퇴근 무렵, 복도에서 동민을 다시 붙잡았다.
"…왜 혼자 알아보려고 하셨어요."
동민이 한참 말이 없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쪽이 혼자 뭔가 하고 있다는 거, 느낌으로 알았어요. 운학이랑 자꾸 따로 만나는 것도, 요즘 표정이 늘 긴장돼 있는 것도."
"그래서요."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어요. 저도 뭐가 됐든, 같이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목소리에 떨림이 섞여 있었다.
"무서운 느낌이 든다고, 그래서 거리를 둔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혼자 이런 걸 캐고 다니시는 건, 안 무서우세요?"
"무서워요. 그런데 그쪽 혼자 위험해지는 거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았어요."
그 말에 가슴이 저릿했다. 피하겠다던 사람이, 피하면서도 결국 같은 쪽을 보고 있었다.
"…그럼 이제 혼자 하지 마세요. 저도 같이 알아야,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 알 수 있어요."
동민이 한참 나를 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신, 저도 하나만 물을게요. 그쪽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 저 때문인 거 맞죠."
부정할 수 없었다.
"…네. 동민 씨 때문이에요."
동민이 더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처음으로, 피하지 않고 눈을 맞췄다.
거리를 두던 쪽과 다가가던 쪽이, 이제는 같은 방향을 보고 서 있었다.
집에 돌아와 달력을 봤다.
2주.
더는 각자 따로 셀 숫자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