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용 빙의글] 상남자

2화. 말은 차갑게, 행동은 다정하게

두 번째 촬영 날, 정하은은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현장에 도착했다. 지난번처럼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전날 밤에도 촬영 순서표를 세 번 확인했고, 의상 리스트도 따로 표시해뒀고, 아티스트 동선까지 손바닥만 한 노트에 다시 적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더 긴장됐다. 실수할까 봐 긴장되는 것도 맞았지만, 사실은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오늘도 이태용을 봐야 한다는 것. 그 생각만 하면 괜히 목 뒤가 뜨거워졌다.

 

 

하은은 촬영장 입구에 서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오늘은 절대 실수하지 말자.” 혼잣말을 하며 세트 안으로 들어가는데, 아직 사람도 많지 않은 시간에 누군가 이미 모니터 앞에 서 있었다. 검은 비니를 눌러쓴 태용이었다. 하은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 태용은 고개를 돌려 하은을 봤고, 하은은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일찍 왔네요.” 태용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무심했다. 하은은 괜히 들고 있던 파일을 고쳐 잡았다. “오늘은 미리 체크해두려고요.” “좋은데요.” 짧은 대답이었다. 그런데 하은은 그 말 하나에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놓였다.

 

 

 

 

태용은 다시 모니터 쪽을 바라봤다. 하은도 괜히 옆으로 가서 세트 리스트를 확인하는 척했다. 사실 확인할 건 이미 다 했다. 그런데 그냥 그 자리에 조금 더 있고 싶었다. 태용은 모니터에 띄워진 콘셉트 이미지를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 B세트 조명 좀 강한 것 같아요.” 하은은 바로 노트를 펼쳤다. “아, 네. 조명팀에 전달하겠습니다.” “하은 씨가 직접 움직일 필요는 없고요.” “네?” “어제도 계속 뛰어다니던데, 무전으로 해도 되는 건 무전으로 해요.” 하은은 펜을 들고 있다가 잠깐 멈췄다. 그걸 보고 있었다고? 하은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촬영이 시작되자 현장은 금방 정신없어졌다. 태용은 첫 착장부터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카메라 앞에 섰다. 조금 전까지 하은에게 조용히 말을 걸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표정 하나, 시선 하나가 날카로웠고, 움직임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은은 모니터 뒤에서 자료를 들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 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그때 선배가 팔꿈치로 하은을 살짝 쳤다. “하은 씨, 정신 차려요.” “네? 아, 네.” 하은은 급하게 시선을 내렸다. 들킨 건 아닌데 괜히 들킨 것 같았다.

 

 

점심 무렵이 되자 문제가 하나 생겼다. 클라이언트 측에서 갑자기 컷 순서를 바꾸고 싶다고 했고, 그에 맞춰 의상과 소품 순서도 전부 다시 조정해야 했다. 하은은 태블릿을 들고 이쪽저쪽을 오가며 변경 사항을 전달했다. 분명 무전으로 하라는 말을 들었는데, 막상 일이 생기니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하은은 촬영장 뒤편에서 의상팀과 이야기하다가 급하게 돌아서려다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 태용이었다. “죄송합니다.” 하은은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태용은 하은 손에 들린 태블릿과 자료 더미를 내려다봤다. “또 뛰어다니네요.” “아, 이건 제가 빨리 전달해야 해서요.”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마요.” 말투는 무심했지만, 이상하게 그 안에 잔소리 같은 걱정이 섞여 있었다.

 

 

하은은 조금 당황해서 웃었다. “괜찮습니다. 이게 제 일이라서요.” 태용은 잠깐 하은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자료 줘요.” “네?” “대기실 가는 길에 의상팀 쪽 지나가니까 전달할게요.” 하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하면 됩니다.” “괜찮다면서 계속 얼굴은 안 괜찮아 보이는데.” 태용의 말에 하은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 싶었다. 결국 하은은 자료 한 장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태용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돌아봤다. “그리고 밥은 먹고 해요.” 하은은 대답도 못 하고 그 뒷모습만 봤다.

 

 

 

 

결국 하은은 점심 도시락을 반쯤 먹었다. 먹으면서도 계속 이상했다. 태용이 왜 저렇게까지 신경 쓰는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현장 분위기를 위해서일 수도 있고, 지난번에 자신이 넘어질 뻔해서 그냥 조심하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행동들이 너무 조용해서 더 헷갈렸다. 잘해주는 티를 내는 것도 아니고, 다정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필요한 순간마다 딱 한 발 앞에 서 있었다. 하은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뭐지.” 그때 뒤에서 선배가 물었다. “뭐가요?” 하은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후 촬영은 야외 세트에서 진행됐다. 날씨가 흐리더니 결국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촬영을 멈출 정도는 아니었지만, 스태프들은 장비를 보호하느라 더 바빠졌다. 하은은 클라이언트용 우산을 챙기고, 모니터 쪽에 방수 커버를 씌우고, 바닥에 미끄럼 방지 테이프를 붙였다. 그러다 보니 정작 본인은 비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셔츠 어깨가 젖고,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었다. 하은은 손등으로 물기를 닦으며 계속 체크리스트를 확인했다.

 

 

태용은 촬영 중간에 잠깐 쉬는 시간이 생기자 대기 의자 쪽으로 걸어오다 말고 하은을 봤다. 하은은 그 시선을 느끼고도 모른 척했다. 괜히 또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잠시 후, 하은의 머리 위로 비가 멈췄다. 하은이 고개를 들자 검은 우산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은 태용이었다. “우산 어디 뒀어요.” 태용이 물었다. 하은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스태프분들 먼저 챙기느라.” “본인도 스태프잖아요.” 태용은 짧게 말했다. 하은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둘은 잠깐 같은 우산 아래에 서 있었다. 가까운 거리 때문에 하은은 괜히 숨을 조심히 쉬었다. 비 냄새와 태용의 향수 냄새가 섞여 이상하게 선명했다. 하은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계속 이렇게 신경 써주시면 제가 좀 불편합니다.” 태용이 하은을 내려다봤다. “불편해요?” “그게 아니라, 저는 일하러 온 건데 자꾸 도움받는 것 같아서요.” “도움받으면 안 돼요?” 하은은 말문이 막혔다. 태용은 잠깐 침묵하다가 담담하게 덧붙였다. “넘어지고, 밥 못 먹고, 비 맞는 사람 보면 신경 쓰이는 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요.”

 

 

 

 

하은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신경 쓰인다는 말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나와서, 오히려 더 심장이 뛰었다. 태용은 우산 손잡이를 하은 쪽으로 넘겨주었다. “들고 있어요.” “태용 씨는요?” “저는 들어가야 해서요.” “그럼 우산은.” “쓰고 있다가 반납해요.” 태용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촬영장 쪽으로 걸어갔다. 비를 조금 맞으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뒷모습이었다. 하은은 손에 남은 우산 손잡이를 내려다봤다. 이건 그냥 배려일까. 아니면 자신이 괜히 의미를 붙이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문제였다. 이미 신경 쓰이기 시작했으니까.

 

 

촬영이 끝날 무렵, 비는 그쳤고 하늘은 어둑해졌다. 하은은 우산을 접어 태용의 대기실 앞 테이블에 올려두려 했다. 그런데 대기실 문이 열리며 태용이 나왔다. 하은은 급히 우산을 내밀었다. “감사했습니다.” 태용은 우산을 받지 않고 하은을 봤다. “감기 걸리겠는데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 괜찮다는 말 좀 줄여요.” 하은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태용은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작은 수건 하나를 들고 나왔다. “머리라도 닦아요.” 하은은 너무 당황해서 바로 받지 못했다. 태용은 수건을 하은 손에 그냥 얹어주었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하은은 결국 물어버렸다. 묻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너무 직접적이었다. 너무 티가 났다. 태용도 예상하지 못한 질문인지 잠깐 말이 없었다. 복도에는 멀리서 장비 정리하는 소리만 들렸다. 하은은 민망해서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태용이 먼저 낮게 말했다. “잘해주는 거 아닌데요.” “그럼요?” 태용은 아주 잠깐 하은을 바라봤다.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지만, 눈빛만큼은 조금 달라 보였다.

 

 

 

 

“신경 쓰이니까요.”

 

 

하은은 그대로 굳었다. 태용은 그 말을 해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수건은 다음 촬영 때 줘요.” 그리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하은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에는 아직 태용이 준 수건이 들려 있었다. 차갑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자꾸만 따뜻한 것을 남기고 갔다. 생수병, 우산, 수건, 그리고 신경 쓰인다는 말까지. 하은은 젖은 앞머리를 수건으로 천천히 닦았다. 심장이 조금 이상했다. 다음 촬영 때 돌려주라는 말이, 다음에도 보자는 말처럼 들려서. 하은은 그게 더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태용이 어려운 사람이 아니라, 너무 신경 쓰이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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