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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없던 그 시간들을_
글 : 레모네
(여주시점)
그대가 없는 5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비참하고 참혹했는지, 지금 제 눈앞에 서 계신 공작님은 아실까요. 그대와 헤어졌던 그 긴 시간 동안에도 변함이 없던 건 아마 이 아름다운 풍경들과, 킬로베르크 제국을 상징하는 그 사계절이었지요.
"공작님... 다들..."
"압니다. 모두가 나를 죽었다고만 생각했겠죠..."
"...네"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백작가들이 판을 치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
"하루 빨리 제가 자리를 다시 찾아야겠습니다..."
연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순간이 왜 그렇게 서운했을까. 5년만에 나타난 공작님이 왜 그리도 무심해보였을까...
"공작님..."
"네 말씀하세요, 벨리."
.
.
.
"...공작님은 지금까지 어디 계셨습니까?
다친 곳은 없습니까...? 5년전에는 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까...?"

"......"
"...저는 백작가의 악행따위에 그리 관심이 많지 않아요...
단지 지금 제 눈앞에 계신 공작님의 안위가 제게 가장 큰 관심사에요..."
"예..."
"그러니 대답해주세요, 어디서 왜 무슨일이 있었는지요"
사실 그리 거창한 대답이 아니어도 상관치 않았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그냥 5년동안 내 생각을 아주 조금이라도 했다는 말이었다. 궁금한 것도 많고, 걱정되는 것 또한 수두룩히 머리속에 존재했지만 말이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벨리,
말을 꺼내기가 무서웠어요"
"...연유가 있다면요?"
"내가 5년동안 벨리를 이 위험한 곳에 버리고 도망간 거나 다름이 없다는 죄책감에 정말 죽어버리고 싶었으니까요..."
"무슨 말씀이세요? 죽다니요..."
"전쟁이 끝나고 몸이 성치만은 못하였으나 돌아오지 않은 것은 벨리에게 말하기 쉬운 문제가 아니니 입을 열지 않을 거에요. 다만,
벨리가 나를 그리워한 것 못지않게 나도 벨리가 보고 싶었다는 거. 이것만이라도 기억해줘요..."
공작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말들 중에 기억나는 말은 단 하나, 나를 그리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랬듯이 공작님도 내가 죽을만큼 보고싶었다는 거, 이 이상으로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이것보세요 벨리, 내가 말하니까 이러잖아요..."
"......"
"벨리 앞에서 눈물 보이기 싫었단 말이에요..."
공작님은 흐느끼는 감정들을 일부러 꾹꾹 눌러가며 버티는 듯 보였지만, 무엇 하나 덜어내지지 않고 그 감정은 고스란히도 나에게 전해졌다.
나 또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였다. 5년이라는 시간은 누군가를 추억하고 기억하고 그리워하기에 꽤나 고통스럽고 긴 시간이었으니까. 우리는 그 시간을 미친듯이 견뎌왔기에, 서로를 기다렸기에 이렇게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죽도록 슬프지만 말이다.
공작님이 나에게 다가와 폭 감싸안아 주었을 때 마음 한 켠에 딱 달라 붙어있던 답답한 무언가가 해방되는 느낌을 아주 자세히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질끔 감았던 눈을 떴고, 그제서야 이 세상이 한 층 더 아름다워 보였다.
이 왕실에 공작님과 이리 가까이 몸을 맞대고 숨쉬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그렇게 해맑은 미소를 띄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물은 흐르지만 그건 다름없는 행복이었으니까.
우리의 그 아름답던 시간이 흘러가면 결국 마주해야할 현실이 눈앞에 덜컥 나타난다. 공작님이 내 손을 잡고 지금 이리도 당당히 걸어가는 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백작들의 별궁이었으니.
나는 더이상 두렵지않았다. 약혼자가 죽어버린 가여운 황녀가 아니니까, 힘없는 여인에 불과한 귀족 껍데기가 아니니까, 한낮 제 구실 못하는 미련한 사람이 아니니까.
"이보게, 백작가의 그 잘난 백작들에게 전하라.
공작가의 김태형이 귀환을 하였다고."
그 순간 공작님의 손에 힘이 미세히 들어갔음을 나는 직감하였고, 나는 백작가의 호위 앞이라 하여 고개를 조아리지 않았다. 빳빳히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치켜들고 당당히 그 호위를 노려보았다.
그 호위의 당황한 표정을 보니 단 한번에 알 수 있었다. 아직, 궁안에 태형공작이 돌아온 사실을 알고있는 자는 나밖에 없다는 것을.
"...그대는 제국의 황녀 앞에서도
그 미천한 고개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아... 킬로베르크의 황녀님을 뵈옵니다..."
"......"

"...앞으론 그 머리통 간수를 제대로 하거라"
"예... 황녀님..."
내가 이런말을 하는 날이 오는구나 싶기도 했지만 이건 전부 공작님의 덕이었다. 공작님이 나에게 인사하지 않는 저 호위에게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더라면, 손에 힘을 주지 않았더라면 난 또 바보 같이 그냥 넘어갔을테니까...

"백작가 출신의 하신들은 기본적인 교육도 이따위니
그 위세를 높일래야 높이기가 어려웠겠습니다?"
"......"
공작님이 내 말을 더 뒤이어 붙여주자 그 호위는 고개를 더욱 푹 숙이며 나에게 사죄하였다. 이 좋은날에 누군가에게서 불행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호위를 달래줄만큼 공작님은 그리 아량이 넓지 않기를 알고있기에 나 또한 공작님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백작가의 별채에 발을 들이고, 공작님께서는 뭔가 말씀을 하더라도 아주 단단히 이르고 나올 것 같은 느낌에 나는 긴장을 잔뜩하고 있었지만, 공작님은 정말 완벽하게도 예상 밖이었다.
들어가자 공작님은 별채를 한바퀴 돌더니 그대로 다시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걸으면서 만난 백작들의 수가 몇인데 그리 쉽게 나오다니, 나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방금... 뭐에요?"
"...예?"
"왜 별채를 걷고만 나오시는지..."
"음, 아직 벨리는 어려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어떨때는 백마디 말보다 더 효과있는 방법이 존재하지요"
.
.
.
"...무슨 뜻인지 압니다...!
공작님의 모습을 한 번 비추어주고 오는 것만으로도 저들에게 위압감이 된다는 말씀이시지요?"
"예, 맞습니다.
언제 제 말을 이리도 잘 이해하실만큼
어른이 되신겁니까? 신기합니다, 벨리."
"그럼 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아이일 리가 있나요..."
공작님은 내가 입꼬리를 조금 들어올리며 저 말을 조곤조곤 내뱉자 마치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이 웃기 시작하셨다.
아, 그러고보니 공작님이 저리 웃으시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
"풉, 일부러 그리 말한 거죠?"

"음, 조금은요?"
.
.
.
공작님이 그리 웃으시니 저 초록빛 풀들도 춤을 춥니다. 공작님이 계시지 않을 적에는 저 풍요로워 보이는 자연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었는데... 이제 더이상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그런 마음이 드는 날은 없을 거에요.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