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아침은 늘 잿빛이었다.
해가 뜨긴 했지만, 도시 전체를 높게 덮은 구름은 하늘에 제대로 걸린 듯 좀처럼 걷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소희는 창가에 서서 따뜻해지지 않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김이 이미 다 빠진 컵을 내려놓으며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또 비 올 것 같네…”
이제는 이 도시의 날씨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됐다.
비가 오기 전의 공기와 습기가 눅진하게 달라붙는 감각을,
그리고
비가 오기 전에는 꼭, 마음이 먼저 가라앉는다는 것까지.
그래도 런던이라는 도시가 소희는 싫지 않았다.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해준 소중한 도시였다.
훈련장에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금속 냄새는 언제 맡아도 적응이 안 되네 ㅎ"
처음엔 숨 막히던 냄새였지만 이제는 고약하긴 하지만 안정감을 줬다.
“집중.”
강사의 짧은 지시에 소희는 바로 자세를 낮췄다.
훅 -
상대가 먼저 들어왔다.
팔이 뻗어오는 순간, 소희는 반 박자 빠르게 몸을 틀어 팔꿈치를 걸었다.
' 지금이다 '
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훈련장을 크게 진동시켰다.
"윽!!!"
상대는 곧바로 탭을 쳤다.
"ㅎ...항복 항복이라고 !!!!"
“…끝”
강사가 소희를 바라봤다.
“확실히 달라졌어.”
소희는 숨을 고르며 땀이 흐르는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 감사합니다"
“처음 왔을 땐, 몸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져 있었지.”
“…그랬죠.”
“지금은 아니야.”
강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이제는 완전히 경호인의 얼굴이야 ㅎ 수고했다.”
그 말에 소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 어딘가가 천천히, 단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소희 침대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말렸다.
거울 속의 얼굴이 예전보다 조금 달라 보였다.
눈매 그리고 입선이 전보다 부드러워진 기분이었다.
‘…사람은 이렇게 변하는구나.’
아픔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아픔을 안고도 서 있을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울을 보고는, 괜히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어보았다.
"... 음 전보다 못생겨진 것 같기도 하고..
관리를 너무 안했나...?"
소희는 문득 이런 생각을 왜 하는 지
고개를 도리도리 하고는, 소희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휴대폰을 들었다.
그녀가 원하는 알림은 당연히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을 켰다 껐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 허”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연락 안 한 지, 얼마나 됐더라’
날짜를 세다 말고 그만뒀다.
숫자로 세는 순간, 그리움이 더 또렷해질 것 같았다.
'뭐 하고 있을까.. 당신은'
같은 시간,
서울의 밤은 런던보다 훨씬 밝았다.
불 꺼진 사무실 안, 지민은 창가에 서 있었다.
도시의 불빛이 유리창에 반사되어 그의 얼굴을 흐리게 만들었다.
“…5년...
너무 길다 ㅎ"
중얼거린 말이 아무도 없는 공간에 떨어졌다.
지민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이 선택이 옳았는지.
놓아준 게 아니라, 도망친 건 아니었는지.
하지만,
“그래도…”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래도,
너가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서랍을 열자 오래된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총알 자국이 살짝 남은 작은 금속 조각이었다.
그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의 손에 쥐어줬던 것.
지민은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두고 한참을 바라봤다.
“잘하고 있지, 소희?”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괜찮았다.
이제 그녀가 어딘가에서 스스로 서 있을 거라는 걸 믿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둘은 서로를 마음 속으로 그리고 믿고 있었다.
다시 런던,
소희는 훈련복 위에 가벼운 재킷을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공기는 축축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 굽 소리가 바닥에 또렷이 울렸다.
‘조금만 더 단단해지면… 한국에 갈 수 있으려나’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 알려지지 않은
소희는 잠시 멈춰 섰다.
심장이, 아주 잠깐 빨라졌다.
“…?”
소희는 휴대폰 잠금을 풀고 메시지 알림을 확인했다.
🗨️한국 들어올 생각 있어요?
— 스완 그룹
소희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올 때가… 됐나 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잿빛 하늘 사이로 아주 잠깐,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소희는 스완 그룹의 미팅을 위해 한국으로 입국했다.
스완 그룹과의 미팅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끝났다.
과장된 환대도, 불필요한 탐색전도 없었다.
“한국에서 바로 활동하실 필요는 없어요.”
중년의 남자가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이번 인수는 이미 내부적으로 정리가 된 상태라…
한소희 씨는 이름만 올려주셔도 충분합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인수에 이름만 올려도 되는 거면
다음 활동 전까지는, 자유시간을 갖고 싶어요.”
“물론이죠, 이후 자세한 활동 일정은 추후에 조정하도록 하죠 ㅎ
한국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의실 문을 나서 소희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빨리 계약이 끝나다니..
자유 시간도 이렇게 쉽게 주어질 지 몰랐어.’
기다렸던 순간이었는데 막상 손에 쥐고 나니 생각보다 담담했다.
.
.
호텔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스치는 서울의 풍경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이상하다…’
소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솔직히 돌아오면, 뭔가 무너질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민을 마주칠까 봐 거리 하나를 더 돌아가던 습관도,
고개를 숙이던 버릇도 이제는 필요 없었다.
그 사실이 조금은 허전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도,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소희는 이어폰을 꺼내 좋아하는 노래를 틀었다.
‘그냥… 걷을까?’
목적지는 없었다.
발길 닿는 대로, 사람이 너무 많지 않은 곳으로 향했다.
늦은 오후의 한강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바람이 불 때마 물결이 반짝였다.
소희는 난간에 기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서 있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좋다....’
정말로....
이대로라면, 그를 보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아갈 수는 있겠지.
.
.
하지만....'
그때였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아주 우연처럼 흘러왔다.
“죄송한데...”
그 한 음절에 소희의 심장이 멎었다.
천천히,
정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가 있었다.
검은 코트, 조금은 슬퍼 보이는 얼굴,
하지만 여전히
똑같이 날 바라보는 눈.
지민이었다.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왜 여기 있는지,
언제 온 건지,
그 모든 게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
“…지민 씨?”
그는 멈췄다.
그리고
서서히 눈이 커졌다.
“……”
몇 초간 말이 오가지 않았다.
수많은 바람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 둘만 시간에서 떨어져 나온 것처럼 서 있었다.
“한소희”
그 한마디에 소희의 눈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아…’
이래서 망설였던 거구나,
당신이 너무 좋아서.
소희는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지민의 품으로 그대로 달려들었다.
“……!”
지민이 숨을 들이켰다.
순간적으로 팔이 들렸다가,
이내 꽉 그녀를 끌어안았다.
“소희야…”
그의 코끝에 그녀의 머리칼이 닿았다.
떨리는 숨결에 익숙한 체온까지
소희는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 뭐야아...”
"...."
“왜 지금 갑자기 우연처럼 나타나는 거야.. 흐윽...”
지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더 세게 안았다.
마치 놓치면 다시는 잡을 수 없을 것처럼.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처럼
“보고 싶었어.”
아주 낮은 목소리였다.
소희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나도요.”
그 짧은 대답에 그의 숨이 흔들렸다.
한강의 바람이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갔다.
오랜 시간, 서로를 놓지 않은 채로.
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
.
.
.
.
다음 화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