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당
: 기묘한 악당들
W. 그쁨
- 경고! 작가는 주인공을 상당히 비도덕적인 인물로 생각·표현하고 있습니다.
지원은 제 방 침대에 누워 양손을 쳐다보았다. 가이딩. 오늘 제가 받은 힘은 분명 이능이 아닌 가이딩이라 했다. 가이딩이 무엇인지, 에스퍼인 지원이 모를 리가 없었다. 에스퍼의 이능을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되어주는 힘. 그러나 아까 지원의 눈앞에서 펼쳐졌던 장면은 저가 알던 가이딩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가이딩을 불어넣자 쓰러지던 연구소장의 모습, 얼굴을 희게 물들인 채 어딘가로 달려가던 성 박사님의 모습, 방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은 자신. 실패했어, 성 박사님의 중얼거림이 귀에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뭐, 상관없나?"
지원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서랍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지원을 위해 종이나 물감 같은 걸 넣어두라며 성 박사가 직접 놓아준 것이었다. 다른 실험체들의 방에는 이런 게 없다. 아니, 서랍은 고사하고 그들은 1인실이 주어지지도 않는다. 지원은 천천히 서랍장의 맨 아래 칸을 열었다. 곱게 보관되어 있는 유리상자를 꺼내든 지원은 상자 안에 담긴 붉은 구슬의 개수를 세었다.
"세 개? 음…, 충분하겠지."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지원은 방금까지 누워있던 침대의 매트리스를 들어 올렸다. 그 아래에 붉은 구슬 하나를 놓은 지원이 매트리스를 원래 있던 모양대로 내려놓았다. 남은 구슬 두 개는 제 옷 주머니에 넣었다. 상자 째로 들고 다닐 수는 없는 법이었다. 서랍 맨 아래 칸에서 무언가를 한 개 더 챙긴 지원은 제 방 문을 열었다. 잠겨있지 않은 방문이 연구소에서 지원의 위치를 알려주는 듯했다.
특별대우, 그것은 연구소 안에서의 권력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1인실도, 서랍장도, 잠기지 않은 방문도, 감시당하지 않는 것도, 모두 권력의 일부였다. 지원은 익숙하게 복도의 끝에 위치한 비상구의 문을 열었다.
다른 실험체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지원의 방은 1인실로 연구소의 3층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다른 실험체들은 2층의 대강당 같은 곳에서 다 같이 생활했다. 심심할 때마다 지원이 다른 실험체들의 방으로 가는 일은 이제 연구소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기에, 2층의 비상구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이 지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2층 복도에 있던 경호원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승환 아저씨!"
"지원이냐? 왜 방에 안 있고? 안 피곤해?"
오늘 실험도 했다며, 걱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에 지원이 헤헤-, 웃었다. 익숙하게 지원의 이름을 부르고 안부를 묻는 2층 담당 경호원, 승환은 지원을 귀여워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친구들이랑 놀아도 돼요?"
"여기서만, 오늘은 정원에 나가는 건 안돼."
"네! 여기서만요! 조금만 놀다 갈게요!"
지원의 말에 승환은 그래, 그래, 하며 선뜻 문을 열어주었다. 절대 도망칠 수 없도록 3중 잠금으로 굳게 닫혀있던 문이 지원의 말 한마디에 쉽게 열렸다. 나가고 싶을 땐 언제든지 말해라-, 하는 승환의 말에 지원이 웃으며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해맑은 지원의 웃음에 승환의 입꼬리가 허물어졌다.
덜컹-, 하며 두꺼운 철문이 닫히는 소리에 지원은 얼굴에 걸고 있던 열일곱 소녀의 해맑은 미소를 지워냈다. 지원을 제외한 실험체들을 그저 '실험체'들로만 보는 연구소 직원들이야, 지원이 그들을 찾을 때마다 정말로 하하 호호 하며 노는 줄로만 알겠지만, 지원은 단 한 번도 이 '실험체'들과 말을 섞은 적이 없었다. 여태까지 이 끔찍한 공간에 꾸준히 드나들었던 이유는 오직, 오늘 일어날 일에 대한 대책에 불과했다.
제게 꽂히는 수십 개의 시선들에도 불구하고 지원은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대강당처럼 넓기만 한 방을 빙-, 둘러보았다. 주머니에 넣은 붉은 구슬을 만지작거리면서. 어디가 좋을까? 하는 지원의 혼잣말이 넓은 방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사실 어디든 상관없겠지만,"
지원은 널따란 방의 정 중앙에 쪼그려앉았다. 망설임 없이 마룻바닥을 맨손으로 뜯어내는 지원의 모습에 몇몇 실험체들이 놀라 움찔거렸다. 지원은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뜯어낸 바닥에 붉은 구슬을 하나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마냥 다시금 마룻바닥을 원상태로 되돌렸다. 누가 봐도 억지로 뜯긴 것 같은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상관없을 것이다. 겨우 실험체들이 모여있는 공간에 연구원들이 큰 관심을 쏟을 리도 없었고, 어차피 오늘이면 사라질 건물이었다.
구슬 하나를 처리한 지원은 망설임 없이 방의 오른쪽 벽으로 향했다. 벽면에 기대 있던 실험체들이 지원이 다가옴과 동시에 우르르-, 그를 피해 움직였다. 그들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은 지원은, 오른쪽 벽을 주먹으로 살살 두드리며 움직였다. 통통, 통통, 울리던 소리가 텅텅, 하는 소리로 바뀔 때까지. 소리가 달라진 벽 부근에 멈춰 선 지원이 망설임 없이 벽을 발로 찼다. 텅! 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던 벽은 지원의 발길질 몇 번에 쉽게 부서졌다. 어두컴컴한 공간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드러났다. 아이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비밀 통로야."
"……."
"곧 연구소가 폭발할 거야."
살고 싶으면 비상 경보음이 울리는 즉시 이 길을 따라 탈출해. 지원은 저를 쳐다보고 있는 실험체들에게 말했다.
"괜히 그전에 나가지 마. 그랬다간 다 죽어."
경고를 남긴 지원이 망설임 없이 걸음을 돌렸다.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살고 싶으면 알려준 대로 하겠지. 뭐, 안 믿으면 어쩔 수 없고. 그런 생각을 하며 지원은 두꺼운 철문을 쿵쿵, 두드렸다. 문에 난 창살로 승환이 얼굴을 내밀었다. 저 갈래요…. 그새 시무룩한 소녀의 표정을 뒤집어쓴 지원이 말했다. 승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빠르게 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애들이 다 피곤한가 봐요, 본 척도 안 해주네."
"널 무시한 거냐? 하여간 실험체들 주제에…."
승환의 말에 일순 지원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문을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던 승환이 다시 지원에게로 고개를 돌릴 때 즘엔 그런 기색을 싹 지운 지원이 서운해 죽겠다는 듯 눈썹을 늘어트린 표정을 지어 보였기에 승환이 이를 알 리는 없었겠지만. 차라리 정국이한테 가서 놀아달라고 하지 그러냐, 하는 승환의 말에 지원의 얼굴이 밝게 개었다. 그래야겠어요, 안녕, 아저씨! 손을 흔들며 비상구 문을 여는 지원에게 승환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실험체 주제라니,"
그 실험체들이 손가락을 한번 튕기는 것만으로도 저 같은 일반인은 꼼짝없이 죽는다는 걸 알긴 할까? 하긴, 알았더라면 '실험체 주제에'와 같은 멍청한 발언은 하지 않았겠지. 계단을 오르며 지원은 생각했다. 아무튼 지원은 승환의 말마따나 정국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승환이 생각하는 것처럼 꼬꼬마들끼리 놀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지만.
특별 대우받는 실험체, 그건 지원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었다. 전정국, 이 연구소에서 유일하게 지원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는 아이. 그 애의 방은 4층이었기에 지원은 한층 오른 계단의 비상구를 밀고 들어가는 대신 계단을 더 오르기 시작했다. 4층의 비상구 문이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경비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어두컴컴한 복도에 있는 수많은 방들 중 익숙한 방 앞에 선 지원이 방문을 두드렸다. 야, 전정국-, 하는 지원의 말에 방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김지원? 그와 동시에 벌컥 열리는 문에 지원이 그 틈새로 쏙-, 몸을 밀어 넣었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이제 막 열다섯이 된 남자아이는 이제 막 잠에서 깬 모양새인 듯 붕 뜬 머리를 하곤 눈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정국의 방은 지원의 것보다 훨씬 컸다. 지원의 방엔 없는 책상과 옷장도 있었으니 말 다 했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이제 와 정국과 자신의 차별 대우에 서운해하기에는 늦은 감이 있다며 지원은 생각했다. 그는 그저 정국의 방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마땅한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지원은 한숨을 푹 쉬곤 정국의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 올렸다. …뭐해? 하는 정국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지원은 제 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매트리스 아래에 마지막 붉은 구슬을 넣어둘 뿐이었다. 끝났다. 지원은 멀뚱멀뚱 서있는 정국의 팔을 붙잡았다.
"너, 실험 받았어?"
"무슨 실험?"
"가이딩 능력 개화시키는 실험, 황금색 구슬 주는 거,"
"아, 응. 중간에 성 박사님이 들어오셔서 잠깐 중단되긴 했는데… 그래도 끝까지 받았어, 실험. 왜?"
"아니야, 끝났으면 됐어. 산책 갈래?"
지원의 모습이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정국은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겉옷을 주워 입었다. 연구소에서 실험체들에게 지급되는 옷과는 질이 다른 옷이었다. 지원은 정국이 옷을 껴입는 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목도리를 주워 정국의 목에 둘러주었다.
"밖에 추워."
"…너는?"
"난 괜찮아. 나 원래 추위 잘 안 타잖아."
지원은 정국의 겉옷 지퍼를 꼼꼼하게 채워준 뒤 그의 손을 붙잡고 방문을 열었다. 익숙하게 비상구 쪽으로 걸어가는 지원의 뒤를 정국이 좇았다.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는 지원을 쫓아가다 넘어질 것만 같은 기분에 정국이 천천히, 천천히! 하며 다급히 말했으나 지원은 정국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오늘의 지원은 무언가 이상했다.
1층의 입구에는 늘 경비가 세워져 있었다. 혹시 모를 실험체들의 탈주나 연구소의 기밀문서 유출을 막기 위해 연구소장이 빈틈없이 세워둔 탓이었다. 물론 지원과 정국에게는 별다른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비상구에서 고개를 쏙 내미는 그들의 모습에 지원이냐? 어디 가게? 하며 친근하게 말을 붙여오는 경비들의 모습만 봐도 그랬다. 지원은 해맑게 웃으며 정국이랑 산책이요! 그랬다. 조심해서 갔다 오란 말 외에 그들을 붙잡는 것은 없었다. 연구소 건물의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일은 이제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정국의 손을 꼭 붙잡은 지원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평소 그들이 산책하는 길이 아닌 반대쪽으로 향하는 지원에 정국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로 가게? 이쪽은 정문으로 가는 길인데…."
"음…, 새로운 산책로 발견 중이랄까?"
지원은 정국의 손을 붙잡고 묵묵히 걸었다. 느릿하던 걸음은 정문에 가까이 갈수록 점점 빨라졌다. 평소와는 다른 지원의 모습에 겁을 먹은 정국은 그가 이끄는 대로 졸졸 쫓아갈 뿐이었다. 정문과의 거리가 100m도 남지 않았을 때, 지원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근처 풀숲에 정국을 밀어 넣은 탓에 정국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고 말았다.
정국은 오늘따라 이상한 지원의 모습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까부터 왜 그래? 하는 정국의 모습에 성가시다는 표정을 짓곤 입술에 검지를 붙이고 쉬-, 하는 시늉만 하는 것도 그랬다. 어쩐지 조금 섭섭한 감정이 든 정국이었지만, 여기서 삐진 티를 내 봤자 예전처럼 지원의 놀림감이 될 뿐이라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이어진 지원의 행동에는 정국도 놀라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지원은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귀걸이를 하나 꺼냈다. 언제 귀를 뚫었는지, 그는 익숙하게 제 귀에 푸른 보석이 박힌 귀걸이를 걸었다. 실험체는 개인 소지품을 연구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없었다. 저런 보석이 박힌 값비싼 장신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저런 걸 어디서 구했지? 정국이 눈을 크게 뜨고 지원을 쳐다보았지만, 지원은 정국에게 무언가를 설명해 주는 대신 귀걸이를 몇 번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지원이 입을 열었다.
"응, 나야."
정국은 더욱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귀걸이가 아닌 통신 기기였단 사실에 정국의 눈이 잘게 떨렸다. …지원아? 정국은 조막만 한 목소리로 지원을 불렀지만, 지원은 그에게 시선을 한 번 주고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다 터트려버려."
지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구소의 비상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깜짝 놀라 귀를 틀어막는 정국의 정수리를 꾹꾹 눌러 풀숲에 몸을 더 깊숙이 숨긴 지원이 훌쩍, 하는 소리를 내는 정국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서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원을 애처로이 쳐다보는데도 지원은 정국에게 시선 한 자락도 주지 않았다. 그저 태연한 표정으로 숫자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십, 구, 팔, 칠, …, 하면서 말이다.
삼, 이, 일…, 그리고 굉음이 들렸다.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였다. 한 번이 아니었다. 정문을 지키던 경비들이 난데없는 폭발에 놀라 연구소 쪽으로 뛰어가는 것이 들렸다. 저런, 그러다 죽을 텐데. 지원이 중얼거렸다. 한차례 더 들린 폭발음에 정국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정국은 이해할 수 없었다. 커다란 폭음으로 인해 터진 고막에 귓구멍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정국은 제 앞에 있는, 오늘따라 커다래 보이는 제 친구를 쳐다보았다. 저와 똑같이 귓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흩날리는 재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꼴사납게 머리카락 위에 나뭇잎을 붙이고 있는 지원을 말이다. 그는 웃고 있었다. 연구소를 집어삼킨 새빨간 불길을 보며 이렇게 말하면서-,
"아~, 속 시원-하다!!!"
정국은 생각했다. 어쩌면 제 앞에 있는 이 소녀는 더는 제 친구 같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소녀는 친구가 아니라,
-악당일지도 몰라. 열다섯의 정국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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