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당
: 기묘한 악당들
W. 그쁨
- 경고! 작가는 주인공을 상당히 비도덕적인 인물로 생각·표현하고 있습니다.
정국의 말에 여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석진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센터는 도망친 에스퍼들을 다시 센터에 소속시키지 않는다. 붙잡힌 도망자들의 최후라 함은 대부분 센터 산하 길드에 소속되어 전쟁터를 전전하거나, 그럴만한 이능이 아니라면 센터의 잡일이란 잡일을 다 도맡아 하는 일꾼으로 전락한다. 전쟁터에서 살아남든, 다시 센터에서 도망치든, 붙잡힌 도망자들에게도 선택지가 존재하긴 했지만, 그 선택지들 중 센터에 다시 소속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정국의 제안은, 붙잡힌 도망자들에겐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정도 되는 가치를 지닐 터였다. 전쟁터에서 허무하게 죽거나, 노예처럼 일만 하는 삶을 원하는 이는 없을 테니까.
"센터가 썩어있다는 건 알아. 목숨을 가지고 질 낮은 협박이나 하면서 에스퍼들을 착취하는 기관은 빈말로도 괜찮은 곳이라고는 못하지. 에스퍼들을 위한 곳이라고는 더더욱."
"……."
"나는 에스퍼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기관을 원해. 센터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닌, 보호받고자 스스로 센터로 찾아오게끔 만들고 싶어. 그러기 위해 내 손에 쥔 것들은 모조리 이용할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
"한여주, 네 도움이 필요해. 에스퍼틀의 생태라던가, 센터의 실체 같은 건 아무래도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 테니까, 그리고."
"……."
"난 너 같은 피해자들이 더 생겨나는 걸 원치 않아."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는 모른다. 명확한 기준 자체가 존재한 적 없을뿐더러, 에스퍼라는 존재가 생겨난 이후에는 더더욱 그 기준이 모호해지고 말았으니, 이능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무릎 꿇리는 세상에서 정의와 선은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그러나 정국은 전쟁통 와중에서도 선과 정의를 찾고자 한다. 적어도 에스퍼들이 착취당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여기고 바꾸고자 한다. 그가 믿는 '옳은 것'을 행하고자 한다.
"싫은데?"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도련님이구나.
"…뭐?"
"싫다니까? 센터에 들어갈 생각 좆도 없어."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그것을 재단하려 든다. 하물며 그게 인간일지라도. 정면만 바라볼 줄 알던 어린아이가 고개를 돌리는 법을 배운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나, 그 시야가 여전히 좁아터진 것은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에스퍼들을 '위한' 센터를 만들겠다 말하는 그 모습이 그랬다. 그들이 원하는 게 뭔 줄 알고? 센터의 에스퍼 착취는 하루 이틀 만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몇십 년을 이어져 온 그 악습이 없어진다 해서 그들이 센터에 호감을 가질까?
당해보지 않은 자들은 모른다. 도망자로써 몇 년을 살았던 여주는, 정국의 이상을 비웃고 싶었다. 저가 센터에 원하는 것이 있었더라면, 저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원하는 것을 위해 센터가 내민 목줄을 기꺼이 제 목에 채우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전쟁터를 전전하다 죽었을 것이다. 센터를 탈출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원하는 것이 센터에 있는데 뭐 하러 목숨을 걸고 도망치겠는가. 그러나 여주는 도망쳤다.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목숨을 걸고 센터를 빠져나왔다. 이유야 많았으나 개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센터는 여주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 말대로 에스퍼의 생태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알아. 옛정을 생각해서 한 마디 해주자면, 에스퍼들이 센터에 원하는 게 있을 거라는 그 오만한 생각부터 글러먹었다고 말해줄게. 넌 대체 도망자들이 왜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단순히 착취를 못 이겨 도망쳤을 것 같아?"
"……."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니야. 그들이 도망친 이유는 센터에 원하는 게 없어서야. 센터의 보호? 보호가 필요했더라면 착취를 당하더라도 센터에 남았겠지. 센터에게 쫓기는 것보단 훨씬 안전할 테니까. 가해자가 이제 와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겠다 해서 피해자들이 그걸 반길까?"
"……."
"무엇보다도, 제안하는 그 태도부터가 글러먹었어. 협상을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네 이상과 가치 따위는 궁금하지 않아. 내가 네 제안을 받아들일만한 충분한 가치를 가져와. 그런 걸 협상 테이블에 내밀어야지, 그래야 내가 혹하는 척이라도 할 거 아니야."
넌 글러먹었어. 여주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제 안목이 형편없었다. 감옥의 벽에 기대 눈을 감으며 여주가 생각했다.
"…하하!"
돌연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는 정국 때문에 여주는 눈을 번쩍 떴다. 뭐야, 까여놓고 뭐 좋다고 저렇게 웃어? 미친놈 보듯 정국을 바라보고 있으면, 여전히 웃는 낯으로 여주를 보고 있던 정국이 다시금 입을 여는 것이었다.
"그래, 다시 제안할게. 네게 의미 없는 것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빼버리고,"
"…뭐?"
"최소 2년, 최장 5년, 센터 소속이 되어 나를 위해 일해줘. 나 이외의 센터 관계자들의 명령은 듣지 않아도 좋아."
"……."
"조건은 최선을 다해 전쟁에서 승리할 것. 그리고 계약한 기간 동안 센터를 건드리지 말 것,"
"내가 얻는 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정국이 말했다.
"네가 원하는건 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선에서 전부,"
원한다면 센터도 줄게,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정국에 여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었네. 질린 낯을 해 보였으나,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좋아, 계약하자. 네 손에 네가 원하는 걸 쥐여줄게."
"그래."
"대신, 너도 내가 원하는 걸 내 손에 쥐여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거야."
"그래."
철창이 열렸다. 거리낌 없이 감옥 안으로 들어선 정국이 여주의 앞에 섰다. 다부진 손을 여주에게 내민 정국이 씨익, 웃어 보였다.
"잘 부탁해, 한여주,"
"나야말로."
내미는 손을 기꺼이 붙잡은 여주가 몸을 일으켰다.
⚒
"헛소리하지 마."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말하는 여주의 시선을 모두가 피했다.
"전정국이랑 계약한 건 나야. 근데 왜 다들 센터에 남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심지어 너네는 추적을 포기하겠단 조건까지 걸었는데."
"……."
"이게 뭐 어쩌다 한번 올까 말까 한 기회인 줄 알아? 이번에 놓치면 국물도 없어. 다들 잘 알면서 왜 이러지?"
"……."
"특히 김석진, 넌…. 센터에서 그딴 일을 당하고도 남겠단 말이 나와?"
자발적으로 센터에 남겠다, 그것도 여주의 선택을 따라서 하는 결정이다. 여주로써는 당최 이해할 수가 없는 결정이었다. 센터로부터 도망친 이후 쭉 함께 해온 이들이었기에 더더욱. 도망자들이 센터에 가진 감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니 말 몇 마디로 스스로 목줄을 차고 센터에 걸어들어오는 일은 결코 일어나선 안될 일이며, 애초에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전정국과의 계약에서도 계약 상대는 오직 한 명, 한여주 뿐이었거늘. 그럼에도 스스로 저들 목에 쇠사슬을 거는 시늉을 마다않는 제 동료들을, 여주는 이해할 수 없었다.
팀 결성 허가를 받아오겠다며 정국이 감방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들어온 태형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주의 옆에 딱 달라붙어 아양이란 아양은 다 떨어대더니 저를 두고 얌전히 센터 밖으로 꺼지란 여주의 단호한 말에 '나 불만 있어요'하는 티를 숨기지 않았다. "나갈 거면 지금 나가," 하며 친절하게도 감옥 문을 열어두고 간 정국이었음에도 남준과 석진 또한 나가지 않고 감옥 바닥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있는 채였다.
"누나 빼고 센터 빠져나가서 뭐해요. 그럴 거였음 진작 우리끼리 도망쳤지."
"그때랑 지금이랑 상황이 같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중요한 건 누나가 우리 팀에 있느냐, 없느냐지. 어떻게 우릴 버리고 새 팀에 들어가겠단 소릴 할 수 있어요!"
"진짜 이해를 못 하겠네."
"아무튼 전 누나 없이 안 가요! 누나 없어도 괜찮았으면 처음부터 잡혀오지도 않았어요."
남을 거예요, 여주에게 찰싹 달라붙은 채 태형이 말했다. 골이 아프다. 꾸역꾸역 기회를 만들어줘도 제 발로 뻥 차버리는 이들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말만 안 얹었다 뿐이지 이미 태형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한 표정들을 짓고 있는 석진과 남준에 여주는 꼿꼿하게 세웠던 허리를 느슨히 풀었다. 축 늘어진 몸을 태형이 익숙하게 받아 제 몸에 기대게 했다. 아, 몰라-,
"알아서들 해, 그냥"
내가 뭐라고 그쪽들을 뜯어말려. 여주가 툴툴거렸다. 팀의 리더이긴 하나, 거기까지다. 리더라 해서 개개인의 선택까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설득 정도야 하겠지만, 애초에 제 말을 들어 처먹을 이들이었으면 이미 이 감방에서 탈주하고도 남았을 인간들임을 여주는 잘 알았다. 마지못한 수긍에 방긋 웃는 저 얼굴들을 좀 보라, 전의를 상실한 여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네가 센터에 있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남을 이유는 충분해."
석진의 말에 여주는 질색했지만, 남준과 태형은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름 돋는다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떠는 여주를 보며 웃었다. 그렇게 석진, 남준, 그리고 태형의 센터 팀 합류가 결정됐다.
"그럴 것 같긴 했어."
그들의 합류를 여주의 일방적인 통보로 전해 들은 정국이 퍽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준비해둔 서류도 애초에 4장이었다며 정국이 품에서 꺼내든 종이뭉치를 각자에게 건넸다. 인적 사항, 이능 등, 센터에 소속된 이들이라면 필수적으로 작성해야 하는 서류들이었다. 석진과 여주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둘은 도망자가 되기 이전, 센터에 소속된 전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센터에서 이 적은 자료만으로도 에스퍼들의 발목을 얼마나 잘 붙잡아놓는지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표정이 좋지 않은 석진과 여주를 본 남준과 태형이 자연스레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볼펜이 똑딱거리는 소리만 났다.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국이 한숨을 내쉬곤 다시 입을 열었다.
"…상부 보고용 아니고 팀 관리 차원에서 쓰는 거니까 인적 사항, 이능 정도만 적어도 괜찮아. 팀이 알아야 할 특이사항이 있다면 그것도."
어차피 한여주가 속한 이 팀의 소속은 에스퍼 관리국 휘하가 아닌 국장 후보 전정국 휘하 소속 팀이 될 것이었다. 그러니 괜찮다. 정국의 말에 둘의 얼굴에 안심이 피어올랐다. 서류를 받아들이는 손은 아까와는 달리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정국이 말문을 열었다.
"나를 포함해서, 에스퍼 4명이 합류할 예정이야."
"…도련님, 너도? 너는 왜?"
"일단은 나도 이능을 개화시킨 에스퍼에 속하니까, 팀 활동을 하는데 특별히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합류하지 못할 이유는 없어."
"……."
"그리고 내 휘하에 있는 팀이지만, 남들이 보기엔 센터 아래 있는 팀이나 다름없으니까. 센터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려면 내가 팀에 속하는 편이 훨씬 깔끔하지."
괜히 태클 걸어올 일도 없으니까. 정국의 말에 여주가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납득하지 못할 이유는 아니었다. 불만스럽긴 했지만.
"숙소로는 내일 합류할 예정이고…,"
"기숙사도 아니고 숙소까지 내줘? 도련님, 진짜 많이 컸네?"
"…공식적인 팀 활동은 일주일 뒤부터 진행될 거야. 그리고, 팀 명은,"
"팀 명은 이미 있어."
빈칸을 마저 채운 여주가 정국의 품에 종이를 내던지듯 안겨주었다. 반사적으로 종이를 집어 든 정국이 여주를 쳐다보았다. 정국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여주가 말했다.
"BTS, 우린 그거 말곤 안 받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