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빌런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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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 기묘한 악당들

W. 그쁨




경고! 작가는 주인공을 상당히 비도덕적인 인물로 생각·표현하고 있습니다.









빌딩 한 채를 눈앞에 둔 여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가벼운 가방이 여주의 어깻죽지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여주가 고개를 젖히면 젖히는 대로 달랑달랑 움직이던 가방이 홱, 하며 고개를 돌리는 여주의 움직임에 크게 출렁거렸다.




"…숙소라며?"




임무를 두고 즉석에서 팀을 꾸리는 고만고만한 중·하급 에스퍼들이야 관리하기 쉽도록 기숙사에 몰아넣어두겠지만, 합이 중요시되는 구역에 배정받는 상급 에스퍼들은 다 각자의 팀이 있었다. 합이 중요한 만큼에나 기숙사에 아무렇게나 처박아 둘 순 없었기에, 팀에 소속된 에스퍼들에겐 팀별 숙소가 지급된다는 사실은 센터에서 열네 살 무렵까지 생활했던 여주로서는 모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급되는 숙소는 일반적으로 2층 정도 되는 전원주택 하나를 지급하는 데서 끝난다는 사실과, 이런 으리으리한 빌딩이 숙소로 지급된 사례는 결코 없었다는 것 또한 모를 수 없는 것이었다. 옆에서 입을 딱 벌리곤 빌딩의 층수를 하나하나 세는 태형의 턱을 가볍게 닫아준 여주가 정국을 돌아보았다. 이 빌딩 한 채가 전부 팀 BTS의 숙소임을 무슨 아침밥 메뉴 읊듯이 알린 정국이 뭐가 잘못됐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Gravatar"집 좋으면 좋은 거 아닌가."

"누가 도련님 아니랄까 봐 진짜 재수 없는 소리만 하네."




잔뜩 비꼬는듯한 여주의 말에도 정국은 아랑곳 않았다. 덤덤한 목소리로 지하 2층부터 12층까지에 위치한 시설을 하나하나 읊조려가며 설명할 뿐이었다.




"숙소는 3층과 12층에 있어. 평상시엔 비상사태를 대비해 3층에 머무르는 걸 추천하는 편이고."

"짐은 아무 데나 풀면 되나? 뭐, 짐이랄 것도 없긴 한데,"

"가구나 생필품은 적당히 들여놨어. 필요한 게 있으면 1층 관리실에다 말해두면 이틀 내로 지급될 거야. 출입은 지문으로 할 수 있지만, 비상시를 대비해 카드 키는 하나씩 가지고 있어. 올라가면서 지문등록 꼭 하고,"




평범한 카드 키가 하나씩 그들에게 쥐여졌다. 이제 짐 풀면 되나? 하며 먼저 걸음을 옮긴 것은 석진이었고, 그 뒤를 조용히 남준이 따랐다. 저희도 가요! 하며 제게 달라붙어오는 태형을 슬쩍 밀어내며 여주는 말했다.




"먼저 가."

"음, 네! 누나 짐 저 줄래요? 먼저 가져다 놓게,"

"그래줄래? 고마워."




피차 짐이 몇 없는 건 마찬가지인지라 태형은 손쉽게 여주의 가방을 챙겨들 수 있었다. 형들, 같이 가요! 하며 석진과 남준에게로 후다닥 뛰어가는 태형을 보던 여주가 정국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한 정국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야, 도련님. 하는 여주의 말에 정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리더 말이야, 미리 정해두지 않은 이유가 있어? 아니면, 따로 생각한 사람은?"

"팀원들이 모두 합류하면 그때 정할 생각이야. 함부로 정할 수도 없으니 다 모였을 때 정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면 네가 해."

"…뭐?"

"네가 해야 돼. 통보를 하든, 뭘 하든."

"어째서?"




삐딱하게 선 여주가 정국을 쳐다보았다. 못마땅함이 잔뜩 느껴지는 표정으로 여주는 대답했다.




"센터의 에스퍼들은 도망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정국이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짓씹었다. 내 말이 맞지 않냐는 듯 여주는 눈썹 끝을 올렸다. 실제로도 그 말이 맞았다. 이미 거센 반대에 한번 부딪혀 본 정국이었기에 그는 여주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도망자들이다, 정국이 한 팀이 되어줄 것을 제안했던 이들은 이미 센터에 오랫동안 몸담아 충성을 바친 이들이었으며, 센터를 배반하고 센터의 목적에 맞지 않는 행보를 보인 도망자들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런 이들에게 정국은 도망자들과 한 팀이 되어 손발을 맞춰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했다. 충분히 무례한 일이었으나, 그들은 결국 받아들였다. '전정국'이란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신뢰에 기반한 협상이었다.

그러한 억지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팀 활동을 이어나가며 한여주를 비롯한 도망자들과 손발을 맞춰 보았을 때 도망자들에 대한 인식, 아니, 적어도 한여주라는 사람에 대한 인식에는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묘한 확신이 정국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여주'가 이끄는 팀에 대한 인식 말이다. 그렇기에 정국은 리더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당연히 한여주라 생각했다. 한여주가 자원하지 않는다면 저가 추천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도망자들이 소속된 팀에, 도망자가 이끄는 리더, 어느 에스퍼가 그 팀에 속하고 싶겠어?"

"……."

"설령 너도 나도, 도망자들도 아닌 센터의 에스퍼들 중 하나가 리더 자리에 오른다면 도망자들이 쉽게 팀에 녹아들 수 있을까?"

"……."

"난 녹아들 수 있어. 하지만, 나뿐이야."

"……."

"나 이외의, 나와 너를 제외한 사람들은 그럴 수 없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조금만이라도 예측해 보면 여주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옳다. 전정국이 데려온 도망자들과 전정국이 데려온 센터의 에스퍼들을 한 팀에 밀어 넣기 위해서는 전정국의 역할이 중요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리더 자리에 널 추천하려고 했어."




여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센터에서의 도망, 도망자로서의 삶, 센터와 에스퍼들이 겪었을 전투와는 궤를 달리하는, 말 그대로 생사를 오가는 전투 경험, 겪어온 모든 것들은 리더로서의 한여주를 완벽하게 만들어낼 것이다. 정국이 데려올 인재들 또한 팀에 한몫 정도는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나 리더의 재목은 없다. 거기엔 전정국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난 전투 경험이 많은 편이 아니야."

"알아, 도련님이잖아."

"…리더는 팀을 이끌어가는 자리야. 당연히 전투 지휘 능력이 중요시될 수밖에 없잖아. 난 부적합해."

"괜찮아, 그건 내가 할 거니까. 하지만 날 리더로 앞세우는 건 정말 추천하지 않아. 네가 해야지."

"…꼭 나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방금까지 말한 이유도 있고, 도련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겉모습은 꽤 중요하니까. 내부가 얼마나 엉망진창이던 겉보기에 그럴싸해 보이면 사람들은 괜찮다고 인식하니까. 센터가 딱 그런 경우잖아?"




정국의 미간이 좁혀졌으나, 별다른 반박의 말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도련님은 날 이용해서 센터에서의 입지를 다지고 싶어 하는 거 아니야? 사실 센터의 영향력 어쩌고 하는 것도 핑계잖아. 센터가 팀에 간섭해오는 것 정도야, 굳이 팀에 소속되지 않고도 막아낼 방법이 수십 가지일 텐데."

"……."

"자신이 속한 팀을 대한민국 최고의 팀으로 만듦으로써 입지를 다진다. 확실히,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편보단 직접 발로 뛰는 쪽이 호감을 사기 마련이지. 특히 에스퍼들에게 말이야. 한발 물러난 채로 있는 것보단 훨씬 나아. 그러니 도련님도 직접 발로 뛰는 쪽을 택하는 거고. 그렇지?"

"…맞아."

"그래, 하지만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

"전정국 휘하의 팀이 정상에 올랐다. 어? 그런데 팀의 리더가 도망자들 중 한 명이네? 그럼,"

"……."

"전정국이 도망자들을 휘어잡는 힘이 부족했구나! 이러다 센터가 도망자들에게 먹히는 건 아닐까?"

"비약 아닌가,"

"하지만 가능성이 아주 없지도 않아. 원래 말이라는 건 쉽게 부풀려지기 마련이니까. 아무튼, 내가 말해준 이유만으로도 리더에 누가 올라야 할지는 정해진 거 아닐까?"




여주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정국이 리더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 그 이유들을 하나하나 짚어준 마당에 억지를 부려 여주를 리더에 앉힐 생각은 없었기에 정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었다.




"…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제게 충고를 아끼지 않는 여주의 모습은, 정국이 예상했던 여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 팀이 되어, 계약의 내용을 성실하게 이행하기는 하겠지만 최선을 다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국이 예상했던 여주의 모습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여주는, 제게 다양한 조언들을 퍼부었다. 그것들은 여주가 구태여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고, 할 것이라 기대되지도 않는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한데, 되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쪽도 여주였다. 그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더욱 의외였다.




"일단은 네 편이니까?"




내 편, 한여주의 입에서 결코 들을 수 없을 것만 같던 단어에 정국이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기분이 이상했다. 묘하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도 같아 정국은 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모르겠다. 허나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라 정국은 입꼬리를 살풋 끌어올렸다. 응, 내 편. 하며 중얼거렸다. 속이 간질거린다.

뭐 더 할 말 있어? 저를 묘한 표정으로 빤히 내려다보는 정국에게 여주가 물었다. 아니, 하며 고개를 젓는 정국을 보곤 여주는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아, 하며 다시금 입을 여는 정국에 금방 멈출 걸음이었지만. 여주의 팔을 살짝 그러쥔 정국이 말문을 열었다.




"이미 센터에 너를 포함한 도망자들에 대한 소문이 퍼졌어. 그러니까 조심해."

"…뭘?"

"…여긴 에스퍼 관리국이고, 당연히 에스퍼들이 모여있으니까 너희에게 시비를 걸어올 에스퍼들이 꽤 많을 거란 소리야. 일부러 싸움을 걸어댈걸."

"아아,"




걸음을 멈춘 여주가 미간을 찡그렸다.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결국 정국에게 묻는 말은 그랬다.




"그러니까, 싸움은 되도록 피하란 소리지?"

"직접적인 싸움은 되도록 피해주면 고맙겠어,"

"…먼저 시비를 걸어도?"

"…조금만 참아주면…, 도를 넘었다 싶으면 가벼운 제압 정도만…,"

"…노력은 해볼게,"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 여주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더 할 말 없으면 진짜 갈게. 하며 빌딩으로 들어서는 여주를 정국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노력은 해볼게, 미덥잖은 대답이었다. 그래봤자 내일이면 저 또한 이 빌딩에 들어가게 될 테니, 하루 사이에 별일이라도 있을까 싶어 정국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돌렸다.


'콰앙-'


-하는 굉음이 들려온 건, 정국이 빌딩 앞을 떠난 지 딱 열두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