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당
: 기묘한 악당들
W. 그쁨
한여주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다.
그 사실은 다른 누구도 아닌 김석진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열받으면 물불 안 가리고 냅다 덤벼드는 성격이 저가 아는 누군가를 꼭 닮아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센터에 있을 적만 하더라도 고작 '기분 나쁜 말을 한다'라는 이유로 또래들을 쥐잡듯 패고 다니던 한여주가, 나이를 좀 먹었다 해서 바뀔 리 없었다. 오랜 도망자 생활로 인해 짧던 인내심이 조금 늘어난게 고작이었다. 석진은 그마저도 어딘가 싶었다. 적어도 늘어난 여주의 인내심이, 석진이 나서 어떻게 수습을 할 정도의 시간은 벌어다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석진은 제 판단이 아주 완벽하게 틀려먹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밖에 무슨 소리예요?"
커다랗게 빌딩 전체에 울리는 굉음에 소파에서 졸고 있던 남준이 번쩍, 눈을 떴다. 가만히 그 옆 소파를 차지한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석진도 심상찮은 소리에 계속해서 이어나가던 생각을 끊어낼 수밖에 없었다. 상급 에스퍼들이 훈련이라도 하는 걸까. 이따금 상급 에스퍼들끼리의 대련이 진행될 때면 이 정도의 굉음이 종종 들려오곤 했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석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 빌딩 주변에 그런 대련을 할만한 훈련장이 있었던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나가볼까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나갔다간 괜히 안 좋은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더 크지."
"아, 그쵸. 이미 소문은 났을 테니까."
"응, 그렇지."
우린 도망자들이니까. 석진의 말에 남준은 더는 대답하지 않고 도로 소파에 몸을 뉘었다. 여차하면 이능 쓰면 되니까요. 공간의 이능을 가진 남준이었기에 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석진도 일으켰던 몸을 소파에 다시 앉혔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어째서인지 쉽게 가시질 않는다. 아직 태형과 여주가 숙소에 돌아오지 않아서인가? 몇 없는 짐을 풀곤 몇 시간을 내리 자더니, 배고파 죽겠다며 태형을 이끌고 식당으로 내려간 여주였다. 식당이 2층이던가, 여하튼 같은 빌딩 내에 있으니 별일은 없을 것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석진은 묘한 불안함에 손을 가만히 놔두질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땀에 푹 절은 모양새를 하곤 숙소로 돌아온 태형이,
"형들!! 큰일!! 여주 누나!! 싸움 났어요!!"
-하고 외쳤을 때, 석진은 진즉 여주를 찾아 나서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태형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난 남준을 데리고 태형의 뒤를 따르며 석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여주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탓에 생겨난 직감이 석진에게 외치고 있었다.
아, 한여주의 짧은 인내심이 또 바닥났나 보다.
⚒
"쓰레기."
그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홱, 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여주와 눈을 마주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죄다 딴청을 피우며 여주가 서 있는 곳을 제외한 다른 곳을 쳐다보는 척을 하기 일쑤였다. 여주의 입가가 작게 경련했다.
참을 수 있다. 센터의 에스퍼들에게 도망자들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래서 쓰레기라는 말을 듣고도 얌전히 카드 키를 받아들고 숙소로 돌아갔다. 피곤한 몸뚱이에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센터를 구경하자는 태형의 말에 기꺼이 끌려다니면서도 참았다.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같은 말들은 끝이 없었다. 여주와 태형이 빌딩을 벗어난 순간 마주친 모든 이들은 처음엔 그들을 보며 흠칫거리다, 이내 적의로 가득 찬 눈빛을 보내오곤 했다. 이따금 욕설 섞인 중얼거림을 들으라는 듯 내뱉기도 했다. 여주는 참았다. 정국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다 엎고도 남았을 성질머리를 꾹 눌렀다.
"헐, 누나! 여기 인형 뽑기도 있어요!"
에스퍼가 아닌 가이드인 태형은 여주와는 달리 감각이 예민하지 않았다. 시선 정도야 느꼈겠지만, 그 시선에 담긴 적의나 그들이 중얼거리는 욕설을 모두 들을 정도로 감각이 예민하지는 않았다.
"도망자들 주제에 가이드는 어떻게 구했대?"
"글쎄, 몸이라도 팔았나 보지."
"쓰레기들에게 어울리는 방법이긴 하네."
"저 가이드도 말이야, 어떻게 도망자들한테 붙을 생각을 하지?"
"정상적인 가이드라면 절대 못할 생각 아니야?"
그랬기에 여주는 그 모든 것들을 듣고도 모른척했다. 가이드는, 에스퍼들의 가이딩을 채워준다는 특이점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것들은 일반인과 같았다. 특별한 이능을 개화시킴과 동시에 신체능력 또한 일반인의 배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변하는 에스퍼들과는 달랐다. 지키고 보호해야 할 존재. 여기서 모두에게 위협을 가하고 싸움을 일으켜선 안된다. 태형이 있으니까. 저런 말들에 일일이 반응해도 안된다. 태형에게는 들리지 않을 테니까. 여주가 저런 말들에 대한 반응을 조금이라도 표하는 순간 울상을 지으며 시무룩하게 돌아가자고 저를 이끌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러니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하는데…
"그래도 좀 적당히 해야, 참을 맛이 나는데 말이지."
"…누나?"
에스퍼의 예민한 감각이 사방에서 쏟아져내리는 적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진득한 적의에 여주의 본능이 날카롭게 반응한다. 가이드는 보호해야 할 존재, 뇌리에 각인처럼 새겨진 문장 하나에 여주는 로봇처럼 어색한 동작으로 김태형을 마주 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김석진이랑 김남준 둘 다 12층에 있나?"
"어… 그럴걸요?"
"그럼 넌 지금 당장 12층으로 가. 가서 김석진이랑 김남준 불러와. 둘한테서 떨어지지 말고 꼭 붙어있어. 올라가는 건 계단으로 가야 돼. 엘리베이터 타지 마. 가서 김석진한테 전해."
"형들은 왜…, …누나?"
"난 참을 만큼 참았다고."
여주의 눈이 서서히 풀렸다. 그 모습을 똑똑히 눈에 담은 태형은 여주를 붙잡고 왜 그러냐는 의문을 표하는 대신 곧장 몸을 돌려 빌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좆됐다. 태형이 중얼거렸다. 여주와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했던 건 태형도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그 또한 여주를 꽤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세월들이 지금 김태형에게 경고하는 바는 확실했다. 한여주 개빡쳤어. 태형의 걸음이 점차 빨라지다 이내 뜀박질로 바뀌었다. 태형이 빌딩 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확인한 여주의 시선이 섬뜩하게, 주변에 있던 이들을 훑었다.
"너, 너, 그리고 너, 나와."
여주의 손가락이 콕 집어 세 명을 가리켰다. 지목당한 세 명의 에스퍼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여주의 기세가 심상찮은 탓이었다. 그마저도 '쓰레기'라 칭하던 여자 하나 때문에 흠칫한 것이 못내 자존심 상한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개중에는 우리가 왜? 하는 의문을 직접적으로 표하는 이도 있었다. 여주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여주의 옆에 붙어있던 태형더러 존심도 없는 놈이라며 욕설을 내뱉던 이었다. 여주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한쪽만.
"왜, 쫄려?"
그 한마디에 의욕을 얻은 에스퍼 셋이 여주의 앞으로 다가왔다. 씩씩대며 개발새발 욕을 해대는 것이 어지간히 분통이 터지는 모양인지라, 그 하찮은 모습에 여주의 입에서 저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명백한 비웃음이긴 했다.
"직접적인 싸움은 되도록 피해주면 고맙겠어."
"…조금만 참아주면…, 도를 넘었다 싶으면 가벼운 제압 정도만…,"
아, 우리 리더님 말씀 첫날부터 어기게 생겼네. 여주가 생각했다.
⚒
상대는 겨우 여자 한 명. 게다가 고작 치유의 이능을 가진 에스퍼.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여주가 첫 번째로 지목한 이가 생각한 바로는 그랬다. 여주와 태형을 보며 쓰레기는 쓰레기장이 제일 어울리는 법이라며 제 친구와 욕을 줄줄 쏟아내며 낄낄거렸던 이였다. 센터에 들어와 감히 센터의 팀에 소속된 도망자. 한여주를 비롯한 이들에 대한 소문은 이미 센터 구석구석에 퍼져있었으며, 소문 중에는 당연히 도망자들의 이능에 대한 것들도 포함된 채였다. 전투 이능도 아니고, 고작해야 치유의 이능만을 가진 에스퍼,
"뭐해, 안 덤벼?"
삐딱하게 선 채로 저딴 말이나 내뱉는 꼴을 보면 무언가 숨겨진 능력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런 생각을 지워버린다.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3 대 1이다. 전투 이능도 아닌 보조 계열 에스퍼가 상급 이어봤자 중급 에스퍼 3명을 상대로 이길 순 없다. 아니, 설령 1 대 1이라 할지라도 보조 계열 에스퍼의 승리는 장담하기 힘들 것이다. 능력치가 다르니까. 그래, 그러니까,
'굳이 세 명이 다 같이 덤벼드는 꼴사나운 모습이 필요한가?'
만일 저 여자에게 지목당한 이가 자신이 아니었다면, 이미 싸움 소식을 듣고 우르르 몰려든 저 구경꾼들처럼 한발 물러선 채 세 명에게 노려지는 여자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한데, 직접 싸우는 입장이 되어보니 3 대 1로 여자 하나를 이겨봤자 본전만 챙기고 말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지목당한 다른 두 명의 에스퍼도 같은 생각인지, 건들건들한 모양새를 한 여자에게 덤벼들 생각은 않고 눈치만 보는 것이었다. 차라리 한 놈씩 덤비자. 눈짓으로 주고받은 대화에 다른 두 명의 에스퍼들이 한발 물러섰다.
물론, 한여주는 어찌 됐건 상대에게 관심 한 자락을 주지 않았다. 둘이 덤비던, 셋이 덤비던, 다 이길 자신이 있다. 제 생각과는 다르게 이미 얕보였다는 것쯤이야 주변에서 흘러가는 분위기만 대충 살펴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한여주는, 전정국을 봐서라도 가볍게 끝낼까-, 하던 생각을 집어치우고 진심으로 임하기로 했다. 누구에게? 최선을 다할 필요도 없다는 듯 설렁설렁 다가오는 저 상대에게. 한여주가 빠르게 도약해 상대에게로 단숨에 다가섰다. 예상치 못한 여주의 움직임에 상대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두 눈이 놀란 듯 커지는 것을 보며 여주가 주먹을 내질렀다.
"이, 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상대의 몸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다. 주먹 한 방에 나동그라지는 우스운 꼴은 면했지만, 선공을 내어줬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한 듯 상대가 분통을 터트린다. 씩씩거리는 그 꼴을 보면서도 한여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달려들었다. 다시 한번 빠른 속도로 주먹을 휘두른다. 채 반격의 준비도 하지 못한 상대가 양 팔을 들어 올렸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방패?"
한 여자의 주먹이 반투명한 벽에 막혔다. 여주의 중얼거림에 상대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B급, 방어의 이능. 등급만 보면 중급 에스퍼에 속하겠지만 방어 계열의 이능은 원래의 등급보다 한 단계 낮게 취급하여 등급을 부여한다. 그래야만이 제 등급에 맞는 공격을 확실하게 방어해낼 수 있으니까. 전투 이능도 아닌 에스퍼의 주먹질쯤이야, B급 이능으로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에 말이다.
한여주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뚫을 테면 뚫어보라는 듯 거만한 표정을 짓는 상대를 한번 쳐다본 한여주가 이능을 끌어올렸다. 치유의 이능, 말만 들어서는 부상을 치료하는데 그치는 정도의 이능에 불과하다 여기겠으나, 이능의 활용처는 무궁무진하다. 끌어올려진 이능을 오른팔에 집중시켰다. 팔의 근육이 단단해진다. 한여주는 제 이능을 조금 비틀었다. 치유에 그치지 않고, 능력치를 극대화하는 버프(Buff)에 가까운 형태로. 오른팔의 근육이 팽창한다. 다시금 도약한 한여주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한계까지 늘어난 근육들이 어마어마한 힘을 담아 앞으로 내질러진다. 방어벽만 믿고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상대방을 향해.
'콰앙-,'
굉음이 울려 퍼졌다. 쩌적-, 하며 갈라지는 방어벽에 상대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고작 치유의 이능, 고작 여자 한 명. 깔보던 이의 주먹 한 방에 깨져버린 제 이능에 어버버거리는 상대의 발을 여주가 망설임 없이 걷어찼다. 속절없이 쓰러진 상대의 급소만을 빠르게 찌른 여주가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게거품을 물고 꼴사납게 쓰러진 상대방을 잠깐 내려다보던 여주가 고개를 들었다. 구경꾼이 배로 늘어나있었다. 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여주가 그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아주 개운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두 명의 에스퍼를 향해 말하는 것이었다.
"다음,"
새 팀원을 데리고 새로운 숙소로 이동하던 정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진짜… 말 더럽게 안 듣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