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당
: 기묘한 악당들
W. 그쁨
지익-, 소리를 내며 후드집업의 지퍼가 목 언저리까지 올라왔다. 지민은 무심한 표정으로 커다란 백팩을 어깨에 짊어졌다. 발치에 있던 묵직한 가방까지 챙겨든 지민이 하루아침에 휑하니 비게 된 제 방을 둘러보았다. 아쉽다. 이 좁아터진 기숙사를 떠나며 그런 생각을 할 줄이야. 그런 저 자신이 어이없게 느껴져 지민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제 방에서 나올 줄을 모르는 지민에 호석이 결국 문을 열곤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지민아, 하며 부르는 소리에 지민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저를 바라보는 호석이 보였다.
"…형."
"짐 다 챙겼어? 정국이 벌써 도착했대. 윤기 형도 내려갔다는데,"
지민과는 다르게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꽉꽉 채운 호석이었다. 드디어 기숙사 탈출이로구나~, 흥얼거리는 호석의 뒤를 지민이 조용히 따랐다. 호석이 콧노래를 부른다. 좁아터진 기숙사를 나간다는 사실에 신이 난 모양새였다.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응? 하며 호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죽상인 지민의 얼굴이 보인다.
"도망자들이잖아요."
그제야 지민의 말 뜻을 이해한 호석이 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뭐-, 하며 호석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별생각 없지. 너랑 윤기형은 신경 쓰는 것 같지만, 난 도망자들한테는 별 유감이 없어서."
"…어떻게 그래요? 도망자들이잖아요. 에스퍼면서 센터를 배신하고 전쟁터를 버리고 도망친 거잖아요."
"지민아,"
"마음 같아서는 당장 때려치우고 싶어요. 정국이 부탁만 아니었으면… …도망자들이랑 한 팀에 있을 일도 없었어요."
"뭐, 그건 나도 그래."
배신은 배신이지. 호석이 말했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가뿐히 옮긴 호석이 1층 버튼을 눌렀다. 느릿느릿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였다. 남들보다 전쟁에 한 발 더 가까이서 살아가고 있는 에스퍼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더더욱 중요한 것이 동료였다. 생사를 오가는 현장에서 등을 맡긴다는 것은 곧 제 목숨을 맡긴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센터 자체를 배신하고 도망친 도망자들과 한 팀을 이루라는 건, 센터에 충성을 다 했던 지민에게는 거부감 짙은 제안일 수밖에 없었다. 한번 센터를 배신한 이들이 팀이라고 배신하지 않을 거란 증거가 없으니까. 신뢰가 없는 상대와 한 팀을 꾸리라는 것, 센터에 충성만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닌 호석마저도 떨떠름해할 제안이었다.
"네 말대로 정국이 부탁이니까 한번 해보자는 거지. 센터에서 시켰으면 나 같아도 탈주했어."
"……."
"알잖냐, 센터는 못 믿어도 정국이는 믿을 수 있는 거."
"…알죠,"
"그럼 그냥 정국이만 믿고 있는 거야. 나도 있고, 윤기형도 있고. 지민아, 어차피 5년 금방이다. 길어야 5년이지, 짧으면 2년이야."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호석이 먼저 몸을 빼냈다. 저 멀리 익숙한 인영 둘이 보였다. 호석이 캐리어를 마저 꺼내들며 웃었다.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전정국이 장담을 하잖냐, 생각보다 괜찮을 거야."지민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형, 저는 이제… 옛날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있을 수가 없어요."
"바꿔야 해요, 센터를…, 그래야…,"
어느 날, 답지 않게 술에 잔뜩 취한 채 정국이 한 말을 지민은 기억했다. 그래, 그런 전정국이니까. 한 번은 믿을 수 있다. 그리 생각하며 지민은 걸음을 옮겼다. 형, 하며 정국이 웃어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팀 이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던 윤기마저도 제법 풀린 표정으로 정국의 옆에 서 있었다. 새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도 같았다. 지민은 생각했다. 호석의 말마따나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른다.
'콰앙-,'
"다음,"
해맑게 웃는 한여주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
정국의 등장으로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이미 한여주 한 명에게 호되게 얻어맞아놓고도 자존심 운운하며 덤벼드는 멍청한 짓을 벌일 리도 없을뿐더러, 국장의 아들인 전정국의 눈 밖에 나는 것을 감수할 정도로 싸움에 목숨 건 이는 이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루만 참으라니까."
"적당히 했으면 나도 참았지. 저쪽에서 먼저 죽어라 시비를-, 아악!!"
"말 안 듣지."
제 귀를 비틀듯 쥐어짜는 정국에 여주가 비명을 질렀다. 목소리는 평온한 주제에 손등에 핏줄이 울룩불룩 돋아날 만큼 꽈악-, 힘을 준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팠다. 정국의 팔을 몇 대나 후려치고 나서야 겨우 붙잡힌 귀를 놓인 여주가 벌겋게 달아오른 제 귀를 문질렀다. 그 모습을 현실감 없게 쳐다보던 호석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치유의 이능,이라고…,"
"응 맞아, 치유의 이능."
여전히 귀를 문지르는 여주를 보며 호석이 생각했다. …괴력의 이능 아니고? 바닥에 무력하게 엎어져있던 상대방의 모습이나, 무지막지하게 상대를 쥐어 패던 모습만 놓고 보면 그편이 더 그럴듯했다. 호석의 생각이 다 보인다는 듯, 건너편 소파에 앉아있던 석진과 남준이 끅끅대는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애가 과격하긴 하지, 하는 석진의 말에 여주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이능을 좀 다양하게 활용했을 뿐이야.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여주의 말에도 호석은 여전히 알쏭달쏭 한 표정이었다. 모르면 됐어, 호석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은 없다는 듯 여주는 금세 말을 돌렸다.
"아무튼, 여기 있는 8명이 이제부터 한 팀이다, 그거잖아."
빌딩의 12층, 테이블을 한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은 이들을 보며 여주가 말했다.
소파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여주와 석진, 남준, 그리고 태형, 그리고 건너편 바닥에 앉아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기와 지민, 호석, 두 그룹의 중간에 앉아있는 정국까지. '한 팀'이라기에는 냉랭한 분위기만 흐르는 통에 정국이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를 띄워 보려 한 여주의 말에도 반응하는 이 하나 없다. 물론 금세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린 건 여주도 매한가지였지만. 정국이 서류 묶음을 꺼내들었다. 분위기를 유하게 만드는데 포기했으니, 전달할 거나 빠르게 전달할 생각이었다. 우선, 하며 정국이 입을 열었다. 각자 다른 세상에 빠져있던 일곱 쌍의 눈동자들이 정국에게 향했다.
"모인 김에, 정해야 할 것들은 빠르게 정하는 편이 좋겠네요. 주의사항과 팀원들 관련 정보들은 나눠드린 서류에 정리해뒀으니 한 번씩은 꼭 읽어봐 주세요."
"어쩐지 두껍더라,"
"정국이 고생했네~~,"
"…공식적인 팀 활동은 다음 주부터 시작돼요. 팀 명은 BTS로 정했습니다. 팀 명과 관련해선 협상의 여지 없습니다."
정국이 여주를 흘긋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주는 제 앞에 놓인 두꺼운 서류뭉치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기 바빴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고 있던 윤기만 표정을 구길 뿐이었다. BTS, 익숙한 이름을 곱씹는 윤기의 표정엔 못마땅함이 한가득이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불만스러운 말들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미 협상의 여지가 없다며 정국이 못까지 탕탕 박아두지 않았는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 보다야, 저 하나 입 다물고 조용히 지나가는 게 훨씬 더 나은 선택지라는 것을 윤기는 알았다.
"서류에 있는 내용을 빼면 사실 지금 정해야 할 건 거의 없긴 하네요. 급한 건 팀장 자리 정도라. …이미 나름대로 고민을 해보기도 했고요. 별다른 반대가 없으면 제 의견대로 팀장을 정할까 싶은데, 다들 괜찮으신가요."
정국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정국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는 반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 팀을 꾸린 당사자였기에, '일단 들어나 보자'라는 식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정국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제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정국은 자신이 팀장을 자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하니까. 한데 어째서인지 정국의 말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여주의 머릿속엔 '설마…,' 하는 단어가 자리 잡는 것이었다. 설마, 그냥 밀어붙일 셈인가? 여주의 생각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정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체적으로 팀을 통솔하는 역할은 제가 맡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일단 팀원들의 성향이 제각각이고, 나름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저밖에 없기도 하고요."
착각이었나, 여주가 생각했다. 정국의 말은 곧 저가 팀장을 맡겠다는 말과 같았다. 그 사실에 내심 불안해하던 몇몇, 지민과 윤기가 한결 안심이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허나 정국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부팀장이란 지위를 하나 더 만들어볼까 합니다."
"…부팀장?"
"네, 그 자리는 한여주가 맡았으면 하고요."
"…뭐?"
여주가 벙진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부팀장이라니, 에스퍼들의 '팀'은 많아봐야 10명 이내의 에스퍼 및 가이드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지는 팀이라는 소리였다. 군부대처럼 몇십, 몇백 명이 하나로 묶인 구성도 아닌, 소수 정예에 가까운 에스퍼들의 팀에 '부팀장'이란 직위는 유명무실할 뿐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정국이 내린 어이없는 선택에 윤기가 기어이 의문을 토해냈다.
"부팀장?"
"네, 부팀장."
"…그딴 게 왜 필요한데? 필요하다 해도, 굳이 쟤를 그 자리에 앉혀야 하는 이유가 뭐야. 납득을 바라면 납득할 수 있을법한 설명을 해."
"이제 하려고요. 그러니까 그렇게 날 세우지 마요, 형."
정국의 말에 윤기가 입을 다물었다. 금세 흥분했던 기색을 감추고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윤기에 정국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시작이건만은, 벌써부터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윤기뿐만 아니라, 부팀장에 이름이 거론된 순간부터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여주 때문이기도 했다. 쉽게 받아들이리란 기대는 한 적도 없건만, 당사자마저도 납득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에 정국은 잠깐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제 머릿속에서 꾸려진 팀에 한여주는 꼭 필요한 전력이었으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제가 팀장을 맡기에는 부족한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조금 더 풀어 설명하자면, 제 능력만으로 이 팀을 키우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원래 제가 팀장이란 자리를 맡기려고 했던 사람이 한여주기이도 해요."
윤기의 시선이 다시금 날카로워졌다. 탐탁지 않은 기색을 내비치는 것은 지민도 마찬가지였다. 당사자인 여주마저도, '그러면 안 되지',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나머지야 뭐, 어떻게 되든 상관없단 표정들이었다. 석진과 남준, 태형은 그렇다 쳐도 호석마저도 담담한 반응을 내보이는 것이 의외란 생각과 함께, 정국이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잘못 생각했던 것 인정해요. 여러 방면에서 한여주보단 제가 팀장을 맡는 게 낫다고 뒤늦게나마 깨달았고, 그래서 부팀장이라는 직위를 만들었어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팀의 전투력을 보충시키기 위해선 한여주가 필요했거든요. 일종의 교관 역할이라고 할까요,"
"……."
"팀장으로서 제가 팀원들의 훈련까지 책임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저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훈련 부문에서는 부팀장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고, 거기에 누구보다 적합한 게 한여주니까요."
"…어째서?"
"간단해요. 한여주가 도망자이기 때문입니다."
"……."
"도망자이기 때문에, 한여주는 우리보다 강해요,"
정국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시선과 마주했다. 자연히 정국의 시선을 따라간 이들 또한 여주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동요 한 점 없는 얼굴이 보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