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 기묘한 악당들
W. 그쁨
"비록 쇠하고 있다지만, 센터는 아직까지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도망자들보단 센터에 남아있는 에스퍼가 훨씬 많으니까요."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도망자들은 강할 수밖에 없어요."
센터의 눈을 피해 도망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정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얼마 전까지 도망자 신세였던 석진이었다. 그들이 강하지 않았더라면 센터에서 탈출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했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정국이 그들의 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았던가. 극한의 상황에서 그들이 깨달은 것들은 필히 팀이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터였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생각이 없었기에 여주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좋아, 부팀장 자리를 거절하진 않을게."
여주의 선언에 정국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빨리 수긍할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한여주를 납득시키기 위해 몇 가지 이유를 꾸역꾸역 생각해 내던 참이었건만, 그는 생각 외로 쉽게 부팀장이라는 직위를 받아들였다. 단, 하며 한여주가 입을 열었다.
"훈련을 돕는 것 외에는 팀 활동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어. 내가 전담하는 건 어디까지나 훈련뿐이야. 팀 BTS의 부팀장 직위에 그 외의 다른 업무는 없어."
"명심하지."
정국이 수긍했다. 억지로 부팀장 자리를 떠맡긴 것이나 다름없으니 지금은 한발 물러날 때였다. 비단 한여주 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이 한여주를 부팀장으로 인정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도 물러나야 했다. 권력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쥐고 있는 부팀장은 그리 위협이 되지 않을 테니, 팀원들이 한여주의 부팀장 자리에 그리 큰 불만을 가지진 않을 터였다. 정국의 예상대로 애초에 반대하는 기색이 없던 호석은 쉽게 납득하는 눈치였다. 제대로 된 이유를 댄 덕분에 빠르게 수긍한 윤기도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지민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뾰족하게 뜬 채 여주를 노려보긴 했으나, 팀원들이 수긍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렸으니 별다른 태클을 건다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다른 물음을 던질 뿐이었다.
"부팀장은 그렇다 치고…,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뭐, 나한테?"
"'가이딩 불가'가 대체 무슨 뜻이지?"
팔락거리는 종이를 탁자에 내려놓은 지민이 여주의 특이사항이 적힌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특이사항 : 가이딩 불가'. 대충 휘갈겨 쓴 글씨는 분명 여주의 필체였다. 아 뭐, 하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내보이던 한여주는 제 사정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대신 다른 쪽을 택했다.
"어차피 가이드 둘이나 있는데 내 가이딩이 필요한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는 게…,"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던 여주는 꼭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지민의 눈빛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박지민의 말에 그제야 한여주의 서류를 읽어내려가던 민윤기와 정호석마저도 궁금해하는 듯한 반응을 내보였으니, 이 상황을 회피하는 것은 어려울듯했다. 그저 전정국만이, 짚이는 게 있다는 듯한 반응을 내보일 뿐이었다. 쩡-, 하니 굳은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걸 보아하니 그랬다. 한여주는 탐탁치않은 표정을 지었다가, 머리를 헝클였다가, 한숨을 내쉬곤 결국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야. A급 가이딩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걸 사용하는 건 불가능해. 그뿐이야."
"듣도 보도 못했어, 그런 경우는."
"그래, 내가 최초겠지. 나도 듣도 보도 못했으니까."
"가이딩, 진짜 불가능한 게 맞아?"
"뭐?"
미간을 좁힌 한여주가 박지민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 또한 만만치 않게 구겨져있었다. 무슨 뜻인데? 한여주가 날선 반응을 내보였다. 박지민의 말은 꼭, 저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 가이딩을 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그걸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저를 죽일 듯 쳐다보기까지 하잖은가. 꼭 제 가설이 100% 들어맞기라도 하다는 것처럼. 박지민은 한여주가 인상을 구기든 말든 잘도 대답했다. 말 그대로,
"네 가이딩을 우리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그럴싸한 핑계를 댄 건 아니고?"
"허,"
"지민이 형,"
한여주가 혀를 찼다. 전정국은 나지막이 박지민의 이름을 불렀다. 경고의 의미였으나 박지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짜 못 하는 게 맞냐고, 안 하는 게 아니-,"
"자."
가차 없이 박지민의 말허리를 자른 한여주가 손을 내밀었다. 곳곳에 흉터 자국이 새겨진 손바닥을 보던 박지민이 미간을 좁혔다.
"못 믿겠으면 확인시켜주면 그만이지. 어떻게 보면 네 말도 맞으니까.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게 맞아."
"그럼 거기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어차피 말로 해봤자 어떻게 믿냐고 할 거잖아? 그럴 바에야 서로 입 아프게 씨름하지 말고 한번 겪어보라고, 내 가이딩."
"……."
"그거 뭐 어려운 거라고,"
대신 책임은 네가 져라?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한여주의 손에 제 손을 올리던 박지민이 그 말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 하는 반응을 내보이기도 전에 한여주는 박지민의 손을 낚아챘다. 한쪽으로 비뚜름하게 솟은 입꼬리가 얄밉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손을 타고 한여주의 가이딩이 넘어왔다.
박지민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으욱,"
"…지민아?"
한여주의 손을 내팽개치듯 떼어낸 박지민이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벌떡 일어난 탓에 현기증이인 듯 비틀거리기도 잠시, 이내 제일 가까운 화장실로 뛰쳐나갔다. 저런, 하는 김석진의 건조한 탄식 뒤로 들리는 것은 박지민이 괴롭게 속을 비워내는 소리뿐이었다.
한여주는 내팽개쳐졌던 손을 거뒀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일련의 과정을 침묵을 지키며 일관하던 정호석이 한여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
"거부반응?"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앞에 놓여있던 종이를 밀어내며 한여주가 대답했다.
"다 저런 반응들이더라고, 후유증도 엄청나. 한동안은 정신 못 차릴걸? 그러니까 나한테 가이딩 받을 생각은 접어둬. 팀에 가이드가 두 명이나 있는데, 나 하나 가이딩 못 한다고 그렇게 큰일은 아니잖아."
웩웩대는 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정할 건 다 정했으니까 가도 되지? 하며 몸을 일으키는 한여주를 붙잡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침묵은 제법 오래 자리를 지켰다. 그들이 둘러앉았던 자리에 남은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때까지.
⚒
팀 BTS가 배정받은 빌딩은 센터 내에서 손꼽힐 정도로 호화로운 축에 속했다. 일반인보다 배는 더 예민한 감각들을 가진 에스퍼들이 사람 북적이는 곳을 선호할 리가 없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어지간한 시설들을 한데 다 몰아넣은 빌딩이야말로 에스퍼들에게 가장 적합한 숙소가 아닐 수 없었다. 그에 비해 건물 하나를 통째로 제공받는 팀은 거의 없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팀 BTS가 전정국의 이름 아래 얼마나 특별한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를 단번에 눈치챌 수 있는 것이었다. 정작 그 빌딩에 배정받은 이들은 그런 사정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그들의 숙소가 위치한 3층에 틀어박혀있을 뿐이었지만.
정국은 3층 복도의 가장 끝에 위치한 방문을 두드렸다. 정갈하게 복도를 울리는 소리 뒤로 경첩이 맞물리며 내는 소음이 더해졌다. 문틈새의 인영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정국을 올려다봤다.
"왜?"
전정국은 답지 않게 잠시 망설였다. 자신이 이 주제를 입에 올려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국이 고민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한여주의 표정에 의아함보다는 짜증이 서리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전정국은 겨우 입을 열어 한 단어를 내뱉었다. 가이딩,
"…네 실험은 실패했던 건가?"
"그거 하나 묻겠다고 지금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거야?"
한여주가 어이없다는 듯 내뱉은 말에 전정국은 대답할 수 없었다.
"…일단 들어와,"
사람을 밖에 세워두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까. 활짝 열린 한여주의 방 문에 전정국이 눈을 크게 떴다. 단조로운 내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뭐해, 안 들어와? 어느새 거실 한복판에 서 있는 한여주가 불퉁하니 내뱉은 말에 전정국은 저도 모르게 허둥지둥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쿵, 하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뭐 마실래?"
"괜찮아."
"그래 그럼. 그래서, 그 가이딩 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찾아온 거야?"
"……."
"뭐, 그거뿐만은 아니겠지."
소파에 털썩 걸터앉은 한여주가 물었다. 이렇다 할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는데도 그는 이미 대답을 들은 것 마냥 이야기를 이어갔다. 가벼운 말투로 대수롭지 않게 말문을 열었다.
"내 가이딩 실험은 실패했는데, 왜 곧바로 이어진 네 가이딩 실험은 성공적이었는지, 그걸 묻고 싶어서 온거 아닌가?"
"…네 이능이 독심술이었던가?"
"농담이지? 재미는 더럽게 없다만,"
손을 휘휘 내저으며 한여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한 얘기 아냐? 하는, 살짝 짜증이 담긴 목소리를 내는 것도 함께였다. 내 실험이 실패했으니까, 네 실험은 성공했겠지.
"애초에 제대로 된 가이딩안 하나뿐이었으니까."
"…뭐?"
"아, 거기까진 몰랐어? 그럴 수 있지. 나도 이걸 알아내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거든."
"무슨…,"
"간단히 말하자면 네가 먹은 가이딩 구슬은 진짜, 내가 먹은 건 가짜."
"……."
"그러니까 너는 성공작, 나는 실패작. 당연한 결과지."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정국이 생각했다. 가짜 가이딩? 그런 게 존재할 수 있을 리가. 가이드의 능력인 가이딩은 신이 내려주신 축복이라 일컬어지는 능력이기도 했다. 극한의 상황에 내몰리면 이따금 발현하곤 하는 에스퍼들의 이능과는 달리 가이딩은 말 그대로, 신이 점찍어 부여하지 않으면 여타 다른 방법으로는 개화시킬 수 없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짜라니, 정국의 머리가 쉼 없이 돌아갔다.
정국은 무료한 낯으로 소파에 기대 저를 쳐다보는 한여주를 바라보았다.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듯한 여유로움에 정국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뭐든 한 발, 아니, 어쩌면 몇 발을 앞서나간다. 정국이 그를 따라잡으려 아무리 아등바등해봤자 그깟 노력쯤은 우습다는 듯 몇 걸음을 쉽게 멀어진다. 한여주가 그랬다. 아니,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지금은…,
서서히 감기던 정국의 눈이 이내 반짝, 뜨였다. 가짜와 진짜, 한여주와 전정국, 이능 연구소, 성 박사, 그리고 전정환, 센터의 국장, 온갖 가지 단어가 뒤섞여 어여있던 머릿속이 마침내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낸다.
"설마, 가이딩을 만들어내려는 실험을 한 건가…?"
"딩동댕, 힌트까지 다 줬는데 맞추는 데 제법 오래 걸렸네."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한여주가 대답했다. 전정국이 깊은숨을 토해냈다. 도대체가, 그놈의 이능 연구소는 당최 무슨 실험들을 그렇게나 해댔던 것인지, 다 풀어냈다고 믿던 실타래가 다시금 엉겨드는 것 같은 기분에 정국이 미간을 꾹꾹 눌렀다.
"넌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이런 실험을 했다는걸."
"내 가이딩이 도저히 못 써먹을 가이딩이라는걸 깨달은 뒤에. 어떻게 써먹을 순 없나 생각하다 보니 그런 결론에 도달했지."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의 차이점은? 어떤 기준으로 그 둘이 구별되는 거지?"
"…뭐, 이것도 네가 말한 그 '협력'의 일종이겠지?"
한여주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알려주기 싫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다가도, 전정국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봐줬다' 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그것이 못내 어이가 없는지라 정국이 무어라 말을 보태기도 전에 한여주는 입을 열었다.
"이능의 구슬은 어떻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해?"
"……."
난데없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으나, 전정국은 그 말이 제 물음에 대한 힌트라는 것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이능의 구슬과 '진짜' 가이딩의 구슬. 두 가지를 모두 접해본 그였으니 알아차리는 것은 더 쉬웠다. 그것들을 떠올려 정답을 찾아내는 것은 이제 정국의 몫이리라.
"대답은 충분하지?"
소파에 기대앉은 한여주가 말했다. 용건이 끝났으면 썩 사라지라는 내심이 아주 빤히 들여다보이는 말이었다. 정국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마워, 하는 그의 말에 돌아오는 것은 됐으니 꺼지라는 손짓 하나였다. 그럼에도 정국은 소파에 풀이라도 발라둔 듯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여주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안 가? 성격 급한 그답게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정국은 대답 대신 다른 말을 내놓았다.
"용건이 하나 더 있어."
"뭔데? 빨리 말하고 가라, 피곤하니까-,"
"첫 번째 임무를 받았어."
한여주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좌표값 S 201, H 1101. 현재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적진의 요새. 뚫어야 해."
"……."
"3일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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