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바투 연숩/ 연준 수빈] 붉은 둥지

[연숩] 붉은 둥지 1화

어둠이 내린 금기의 구역, 3구역의 공기는 허파를 비틀어 매는 것처럼 매캐하고 차가웠다.

수빈은 장갑을 낀 손으로 은장도의 자루를 세게 쥐었다.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었지만, 잘게 떨리는 손끝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칼날에 새겨진 가문의 문양이 둔탁한 달빛을 받아 차갑게 반짝였다.

‘넌 가문의 수치야, 수빈아.’ ‘차라리 헌터의 피를 타고나지 말지 그랬니.

덩치만 커다래서 몸도 못 쓰고, 감응력도 바닥이니.’

귓가를 맴도는 가문 어른들의 차가운 음성이 채찍질처럼 수빈의 턱 밑을 죄어왔다.

유서 깊은 뱀파이어 헌터 가문, 최씨 일가의 유일한 실패작.

수빈에게 붙은 수식어는 늘 그랬다. 또래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훤칠한 체구를 가졌으면서도, 정작 뱀파이어의 기운을 감지하는 능력도, 그들을 베어낼 신체 능력도 형편없었다.

오늘 밤, 이 위험 지역에 홀로 발을 들인 건 순전히 오기였다.

3구역에 서식하는 하급 뱀파이어의 정수 하나만 가져간다면, 적어도 ‘밥벌이도 못 하는 짐승’ 취급은 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스락.

숲 깊은 곳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빈은 황급히 은장도를 겨누며 숨을 죽였다.

‘하급인가?’

동공을 키워 어둠 속을 살피던 수빈의 몸이 순간 돌처럼 굳어버렸다.

바람이 멈추고, 숲 전체의 숨소리가 죽었다. 하급 뱀파이어 따위가 풍기는 피린내와는 차원이 다른, 기분 좋은 장미 향과 짙은 노을 냄새, 그리고 온몸의 피를 얼려버릴 듯한 압도적인 중압감이 공기를 채웠다.

짙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 것은, 기괴한 괴물이 아니었다.

새하얀 피부에 붉게 빛나는 눈동자.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차림새와 나른하게 호선을 그리는 입술. 달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남자의 비현실적인 비주얼은 기괴함이 아닌, 소름 끼치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순혈. 밤의 지배자. 헌터들의 서적에서나 보던 최상위 포식자, 최연준이었다.

“...아.”

수빈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도망쳐야 한다. 당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어져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압도적인 포식자 앞에 선 먹잇각의 본능적인 공포였다.

연준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듯, 길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수빈의 앞까지 다가왔다.

두 사람의 키가 비슷했기에, 연준의 붉은 눈동자가 수빈의 눈을 곧바로 직시했다.

“호랑이를 잡으러 들어온 줄 알았는데.”

연준이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낮게 깔리는 그 목소리만으로도 수빈의 귓가에 돋움살이 돋았다.

“겨우 길 잃은 사슴 한 마리가 서 있네.”

연준의 시선이 수빈의 떨리는 손에 쥐어진 은장도로 향했다.

비웃음조차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 작은 칼로 날 베려고?”

“...오, 오지 마.”

수빈은 어떻게든 목소리를 쥐어짰지만, 떨림을 숨길 수는 없었다. 연준은 그 모습이 자극적이리만큼 가엾고 귀엽다는 듯 풋,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다음 순간, 연준의 모습이 잔상처럼 사라졌다.

“힉...!”

눈을 한번 깜빡이기도 전에, 연준은 이미 수빈의 턱 밑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수빈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 온기 없는 촉감에 수빈의 몸이 발작하듯 굳어졌다.

연준은 다른 한 손으로 수빈이 쥐고 있던 은장도를 너무나도 쉽게 빼앗아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챙그랑- 소리와 함께 수빈의 마지막 무기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손이 이렇게 떨려서야 칼질이나 하겠어?”

연준이 고개를 기울이며 수빈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짙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수빈의 귀를 울렸다.

수빈의 귀 끝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순식간에 새붉게 물들어갔다. 공포와 낯선 자극이 섞인 고통스러운 반사 작용이었다.

“이상하네.”

연준의 손가락이 수빈의 귀 볼을 스치더니, 이내 붉게 익어버린 목덜미를 스르륵 쓸어내렸다.

“헌터 놈들 피에서는 늘 퀴퀴한 은 냄새만 나는데.” “......!”

“너한테서는 왜 이렇게 달콤한 냄새가 나지?”

연준의 붉은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나른하던 태도가 순식간에 포식자의 집착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연준은 피를 바라는 뱀파이어의 본능이 아닌, 이 거대하고 유순한 인간 자체를 소유하고 싶다는 묘한 욕망을 느꼈다.

“주웠어, 오늘 밤은.”

연준이 수빈의 귓가에 나지막이 읊조렸다. 차갑고 달콤한 숨결이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너, 내 저택으로 가자.”

수빈이 거부의 말을 건네기도 전에, 연준의 강한 팔이 수빈의 허리를 옭아맸다. 시야가 핑 글 돌며 눈앞이 아득해졌다.

가문의 수치로 살아온 최수빈의 인생이, 밤의 지배자의 품 안에서 송두리째 뒤흔들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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