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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

"여주.. 보러 오신 거예요?"
어떡하지, 지금 여주 없는데. 석진의 말에 윤기는 그런 거 아니라며 뒤를 돌았다. 석진은 그런 윤기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그렇게 둘은 같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반 이상이 여주의 흔적이었다. 전엔 탑에 있었던 여주의 옷가지들, 소지품···. 다 낯익은 것이었다. 그중에서 전에 신부가 되던 날 여주의 귓가에 꽂아주었던 분홍색 꽃이 눈에 들어왔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말려 통에 담아둔 걸 본 윤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걸 왜 아직도 가지고 있어···.
"여주 물건이에요,
만지지 마세요."
"······ 아."

"가장 아끼는 거예요. 매일 밤마다
그걸 손에 쥐고 잠들어요."
"······."
죄책감이 물밀듯 쏟아져 나왔다. 그런 일을 겪고도 날 진심으로 아껴주는 애한테 대체 무슨 짓을···. 자책하며 고개를 떨군 윤기의 볼에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흘러내렸다.
"··· 내가.. 내가 너무 미안해서···."
"······."
"꼭 행복하게 해주기로 약속했는데···."
"······."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우는 윤기에도 불구하고 석진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여주 사랑해요? 윤기는 깊이 생각에 잠기다 끝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럼 떠나요."
"......"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면서요."
여주가 절대 찾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장 멀리. 단호한 그의 음성이 윤기의 심장에 꽂혔다. 아팠다. 정말 많이. 가슴속이 쓰라려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물론 힘들겠죠."
"······."
"여주가 지금 많이 버티기
어려워해요. 그쪽 때문에요."
"······."
"여주 어떤 앤지 잘 아시잖아요.
그리고 사랑한다면."
놓아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윤기의 눈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여주는 행복할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윤기는 그런 여주를 놔줄 수 있었다. 이기적이게 행동하지 말라고 덧붙인 석진이 매정하게 뒤돌아섰다. 윤기가 덜덜 떨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들어올렸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면···."
"······."
"··· 안 되겠지. 그래, 알아."
쾅. 간신히 발걸음을 옮겨 집 밖으로 나온 윤기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 뒤로 남자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빌라 전체로 울려 퍼졌다.
남겨진 여주의 말린 꽃 옆에는, 같은 꽃으로 만들어져 있는 작은 꽃반지가 있을 뿐이었다.

"이상한 소리 마."

"······."
"시한부가 신부라는 게 무슨
소리야. 그딴 운명이 어디 있어."
연아와의 첫 만남. 그건 예상외로 병원이었다. 그리고 환자복을 입고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고. 연아는 자신이 뱀파이어 민윤기의 신부가 되기란 걸 일찍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 받아들였다.
"나 죽어."
"······."
"곧 있으면 하루아침에
픽 죽어버려."

"······."
"폐가 썩어들어가고 있대. 정작
본인은 그 고통을 못 느끼는데,
벌써 반이나 썩어버렸대."
연아는 이미 체념한 듯 표정이 없는 상태로 말했다. 윤기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연아에게 가까이 다가가 하늘색 꽃을 중심으로 안개꽃이 꽤 많이 둘러싸고 있는 꽃다발을 손에 쥐여주었다. 연아는 꽃다발과 그 꽃다발을 들고 있는 링거가 꽂힌 손등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럼 그동안이라도 행복해야지."
"······."
"난 내 신부가 의미
없게 죽는 꼴 못 봐."
행복하게 지내자. 연아야, 나랑 같이. 간접적으로 내뱉은 위로였다. 아무리 운명이라는 선에서 만나 사랑 없는 정략결혼을 하듯이 만났어도 그들이 행복할 권리는 있었다. 그리고 윤기는 그걸 지켜주고 싶었다. 부디 연아가 행복하길 바랐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렇게 행복하면 되는 거야."
"······."
"어때, 끌리지."
"··· 좋아."
연아는 가족도 친구도 아무것도 없었다. 돈이 모자라 병원에서 쫓겨날 뻔한 걸 윤기가 겨우 막아 주었다. 여러모로 윤기와 연아는 닮아있었다.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주면서 사랑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불안했다. 시한부라는 판정을 받고 결국 끝이 보이는 결말이었기 때문에 더 지독하게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하루가 소중했고, 그 시간들을 어떻게든 좋은 추억으로 남기기 위해 서로가 몸을 불살라 노력했다. 그런데.
".. 윤기야. 윤기야 정신 차려봐.
윤기, 쿨럭.. 윤기야."

"······."
"죽으면 안 돼···.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아. 너 나 안 볼 거야?"
"······."
"··· 윤기야···."
누군가 탑에 불을 질렀다. 주위가 다 불타버린 상황에서 불길에 의해 쓰러지는 기둥이 연아에게 향하자 그녀를 지키려 대신 몸을 내던진 윤기가 머리에 큰 치명상을 잃고 의식을 잃어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폐의 상태가 더 악화되어가는 연아였기에 연기가 몸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폐가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 난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으니까."
"······."
"넌 살아. 꼭 내 몫까지
책임지고 죽어라 버텨 민윤기."

"······."
"······ 사랑해. 윤기야."
연아는 험한 불길 속에서 폐가 찢어지는 고통에 시달리며 윤기를 질질 끌어 탑에서 구출시키려 했다. 죽을 만큼 아팠다. 하지만 더 죽을 만큼 사랑하는 윤기였기에 아릿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결국엔 윤기를 탑 밖으로 내보냈다.
"꺄아악!!!"
콰광. 굉음을 내며 무너지는 천장에 그 뜨겁디 뜨거운 불구덩이 속으로 연아가 아찔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게 연아의 끝이었다. 처음도 윤기였고, 마지막에도 윤기였다. 안타깝게도 연아가 죽은 뒤 정국을 비롯한 화재 진압팀이 도착했다.
"··· 윽···."

"민윤기 씨, 정신이 드십니까?"
"··· 전정국."
"다행입니다. 일어날 수 있는 건 기적,"
"연아는."
윤기의 물음에 정국이 말을 멈추고 입을 꾹 닫았다. 불길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설마 연아가. 윤기는 덮고 있는 이불을 말아 쥐고 다시 물었다. 대답해. 하지만 들려오는 건 없었다. 정국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
윤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거짓말 마. 정국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윤기는 급하게 휴대폰을 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벌써 두 달이 지나 있었다. 이미 장례식이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 어떻게 이래."
링거 폴대를 거칠게 치워버리고는 병실 밖으로 나가 당장 납골당으로 향해 달려나갔다.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오는 정국의 목소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급하게 링거를 빼고 나온 탓에 손등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아프지가 않았다. 대신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납골당으로 도착해 민연아라는 이름을 찾았다. 민연아, 민연아···. 몇십 분을 찾아도 보이지가 않았다. 너는 죽어서도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구나. 연아는 맨 끝 쪽 모서리에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웃고 있는 연아의 사진과 '민연아'가 적힌 유골함이 보였다.
"살았어야지."
"······."
"날 내쳐서라도 살았어야지···."
"······."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어도,
더 살았어야지 바보야···."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너 없이 살아갈 날들이 두려웠다.

"뭐야 김석진, 기분 안 좋아?"

".. 어? 아니 내가 뭘."
"멍해 보여서. 밥 먹자. 나 배고파."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니 석진이가 멍하게 바닥에 앉아 있었다.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걸자 놀란 건지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한다. 뭐 먹고 싶어? 아무거나 괜찮다고 하니 내 취향을 정확하게 알아서인지는 몰라도 바로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꺼낸다.
화장대 의자에 가방을 걸어두고 침대 옆 행거에 옷을 걸어놓으니 서랍 위에 있던 작은 통이 눈에 들어온다. 윤기 씨가 준 꽃이었다. 멍하니 꽃을 바라보다 그 옆에 있던 작은 꽃반지가 눈에 띄었다. 오래 둔 건지 조금 시들시들했지만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닌 것 같아 자세히 살펴보니, 반지의 꽃이 통에 든 꽃과 일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그 사람, 여기 왔었어?"
"··· 여주야 그게."
··· 널 위해서 돌려보낸 거야. 석진이가 미워졌다. 잡았어야지. 용기 내서 사과하러 온 사람이었는데···. 잡았어야지. 석진이는 내 말을 듣고 굳어버렸다. 당장 탑으로 가야 했다. 윤기 씨를 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꽃이 들어있는 통과 반지를 들고 집에서 나와 급하게 정국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국 씨는 내 전화를 받고 무슨 일이냐 물었다.
"정국 씨.. 지금 와 줘요."

- ······.
"나 윤기 씨가 보고 싶어서
미쳐버릴 것 같아요···."
엉엉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