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122화. 사고

sophie97
2026.08.16조회수 23
우리는 4일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프리힐리아나로 돌아왔다.
잊지 못할 멋진 여행이었지만
훈지 씨의 질문을 받고,
아직 대답을 하지 못한 나는
큰 짐을 안고 있는 듯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가 말했다.
"선택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난 내 선택을 했고, 이제 당신 차례에요.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당신 몫이에요."
나는 아직 그의 인생에 뛰어들 자신이 없었다.
그를 좋아하는 대가로
치러야 할 많은 일들이 두려웠다.
우리는 그 일은 덮어둔 채
여행을 가기 전의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훈지 씨는 운동을 하러 나가고
나는 집에 남아 청소를 하고 있던
주말 오후였다.
휴대폰이 울려 확인해 보니
김대표였다.
"어. 태형씨."
"여행은 잘 다녀왔어?"
"응."
"혹시 옆에 훈지 있어?"
"아니. 운동하러 나갔어.
나 혼자야."
"훈지한테 영화 이야기 들었어?"
"자세한 이야기는 안 했어.
촬영이 빨리 시작돼서 안 하겠다고
얘기했다는 것만 알아."
"제작사도 메이저고,
감독님도 이전에 훈지랑 작업해 보신 분이야.
대본도 탄탄하고 놓칠 이유가 없잖아.
오히려 이런 기회를 놓치면 바보지."
"..."
"내 말 듣고 있어?"
"어. 듣고 있어.
나보고 훈지 씨 설득하라고 전화한 거지?"
"1년을 굳이 꽉 채울 필요는 없는 거잖아.
필요에 따라 일찍 올 수도 있고 그런 거지.
안 그래?"
"그건 그런데...
문제는 그 영화를 찍게 하려면
나보고도 결정을 하라고 하는 게 문제야..."
"너한테 무슨 결정을 하라고?"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아...
너는 아직 너희 둘에 대한 결심이 안 선 거야?"
"응..."
"그렇다면 네 입장에서는
적극적으로 설득할 수 없겠구나."
"나도 훈지 씨가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치는 걸 원치 않지만...
지금 당장 훈지 씨에 대한 결정을 하는 것도
부담스러워."
"알겠어. 그런 상황이라면...
내가 너한테 부탁하기도 힘들겠다.
내 입장에서 훈지를 더 설득할 수밖에 없겠어."
"도움을 줄 수 없어서 미안해..."
"아니야...
네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김대표와의 전화를 끊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영화를 선택하라고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집에 있으면
계속 그 생각만 하게 될 것 같아
책 한 권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공원으로 갈까 하다가
미겔의 카페로 방향을 바꿨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주말 오후,
카페 안에는 이미 손님이 몇몇 앉아 있었다.
"소피. 주말에 웬 일이에요?
주말에는 번역 일 안 하잖아요?"
"그냥 책이나 읽으려고 나왔어요."
"아... 그럼...
잠깐 나 좀 도와 줄 수 있어요?"
"어떤...?"
"원두 배달이 예정보다
좀 늦어진다고 해서
내가 가서 직접 받아 오려구요.
잠깐 카페 좀 봐줄 수 있어요?"
"나는 커피를 못 내리는데요?"
"아니. 만들 필요는 없고,
여기 손님들만 잠깐 봐주면 돼요.
아무도 없으면 문을 잠그고 갔다 올 텐데
그럴 수가 없어서요."
"아... 그런 거라면 내가 있을게요.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요."
"고마워요.
대신 내가 다녀와서
맛있는 커피 내려줄게요."
"좋아요."
나는 미겔을 배웅하고
한 테이블에 앉았다.
책을 읽는 사이
손님들은 하나둘 나가고
결국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이제 이곳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가야 할 텐데...
언제쯤이 좋을까...'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고
미겔이 들어왔다.
그의 품에는
원두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새로 온 손님은 없었어요?"
"네. 미겔이 나간 후
들어온 손님은 없었어요."
"지금 막 받아 온 신선한 원두로
커피 내려 줄 테니 마셔 봐요."
"기대해도 되죠?"
"물론이죠!"
원두 자루를 풀던 미겔이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시내에서 교통사고가 있었대요.
동양인 남자 한 명이 차에 치여서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하더라고요."
"동양인이라고요?"
"네.
관광객일 수도 있고..."
그 순간,
훈지 씨가 머릿속을 스쳤다.
'운동하러 나간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
왜 나한테 전화가 없지...?'
나는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그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훈지 씨!!!" <123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