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19화. 선택

sophie97
2026.06.24조회수 62
시간이 벌써 10시 가까이 되어 버렸다.
나가는 대신,
샌드위치를 배달시켜 놓고,
잠시 소파에 앉았다.
그냥 오늘은 아무 것도
생각하고,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너무 긴장 상태에 있다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소파 쪽으로 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소파 등 뒤로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 보니,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그도 팔짱을 낀 채로 자고 있었다.
'하긴..나만 잠 못 잔 게 아니겠지..
어젯밤 했던 말들을 밤새 얼마나 곱씹었을까.."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넘었다.
깜짝 놀라서 그를 깨웠다.
"훈지씨 일어나요.
지금 새벽 3시가 넘었어요.
빨리요.."
"하아...
잠깐 어깨 빌려주려고 했는데 잠들었나 봐요."
"빨리 일어나서 집에 가요."
"지금요? 우리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아, 맞다. 어제 배달 온 거 그대로 있겠다..
아니 근데,
지금 먹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요.
빨리 일어나서 가요."
"오늘 새벽일 나가요? 왜 이렇게 서둘러요?"
"몰라요..마음이 불안하단 말이에요."
".... 그 말 들으니까 내가 너무 미안해진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지금까지 수업하면서는
그냥 날 나로 대했잖아요.
앞으로도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그는 여전히 도돌이표 상태이다.
"안 되겠다.
샌드위치 먹고, 다시 시작해야겠다.
오늘 아주 결론을 내고, 마무리를 지어요 우리."
나는 현관문 고리에 걸려 있는
샌드위치와 음료가 담긴 봉투를 가지고 들어 왔다.
잠들기 전까지도 너무 배가 고팠는데,
잠시 쉬고 나니 그래도 좀 기운이 생겼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꺼내면서 생각했다.
그와의 대화를 질질 끌지 말고,
오늘은 포기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렇게 쉽게 설득 당할 거였으면,
나도 그렇게 오래 고민하고,
망설이지 않았을 테니까...
"훈지씨, 이리 와요.
음료는 따뜻한 커피로 다시 내려 줄께요.
아니면, 냉장고에서 우유나 다른 음료수
꺼내 줄까요?"
결심과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행동에
나조차 순간 움찔했다.
"내가 커피 내려 올께요.
이 커피 머신 사용하면 되죠?
캡슐은 어디 있어요?"
쌀쌀맞고, 못되게 이야기해야 하는데...
왜 자꾸 말이 곱게 나오지...
"첫번째 서랍 열어 보세요. 거기 있을 거에요."
"네, 찾았어요."
그는 커피 두 잔을 내려와 식탁에 앉았다.
접시에 꺼내 놓은 샌드위치 하나를
냅킨과 함께
그의 앞에 놔주고,
이 고요함을 깨기 위해서
휴대폰을 스피커와 연결했다.
래이어스의 'Carmen Fantasy'
매일 듣는 곡이라 고민도 안 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플레이를 눌렀다.
"아...음악은 이런 거 들으시는 구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뭐야.. 저 평온함은?'
나는 머릿속이 이렇게 시끄러운데...'
"클래식 좋아하세요?"
"네."
"어떤 작곡가 좋아하세요?"
"베토벤이랑 라흐마니노프요."
"음악회도 가고 그래요?"
"훈지씨, 지금 뭐하는 거에요?
나랑 음악 감상해요?"
"밥 먹으면서 스몰 토크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광화문 지나다가 베토벤 뮤지컬 광고 봤는데,
그거 벌써 봤어요?"
"네..봤어요."
"누구랑요?"
"친구랑 봤어요."
"어땠어요? 누가 베토벤이었어요?"
"박효신이요.
연기를 너무 잘 해서...눈물이 여러 번 나더라구요...
후세에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는 정말 불행했어요..
가족도, 사랑도 아무 것도 못 얻고..."
"와...얘기만 들어도 궁금하네..
나도 그 뮤지컬 보고 싶었는데...
한 번 더 볼 수 있죠?"
"영화나 뮤지컬 여러 번 보는 거 좋아해요.."
'아니..잠깐만
내가 왜 자꾸 대화를...'
"그만, 대화 그만.
먹어요 빨리."
"샌드위치 맛있네. 여기 맛집이네!
그거 다 먹을 거 아님, 나 반 줘도 돼요?"
"알았어요..여기.."
내 샌드위치의 반을 그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
"근데 비발디도 좋아하지 않아요?"
"어떻게 알아요?"
깜짝 놀라 물으니,
그가 책상 쪽을 가리켰다.
"저기 포스터.."
"아...영화 포스터..
보고 싶었는데 반응이 별로 였는지
극장에서 금방 내려서 못 봤어요."
"아..그랬구나..
그럼 OTT에 올라오면 같이 보면 되겠다."
"훈지씨, 다 먹었죠?"
그가 가만히 내 눈을 봤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먼저 할께요.
훈지씨가 내 또래였다거나,
지금처럼 특별한 직업이 아니었다면
나도 우리 관계에 대해서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고,
아니 내가 먼저 다가갔을 수도 있어요.
나는 내가 좋아하면 먼저 고백하기도 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걸리는 게 너무 많다라는 거에요.
그런 걸림돌들에 계속 부딪혀 가면서까지
가고 싶지는 않다는 의미에요. 그 길을.."
내 눈을 보고 있었던 그가 눈길을 떨궜다.
'그래..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어.
아니면 내가 끌려 다니게 될거야..'
"내가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 볼께요..
아까 베토벤 이야기 했었죠?
선생님이라면...
후대에 길이 남을 내 이름과 명성, 천재라는 타이틀과
지금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과 내 인생을 공유하고,
감정을 나누는 거.
뭘 선택할 거에요?"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다.
"...나는...후자요..."
"나도 선생님처럼 후자를 선택할 거고,
오래 걸린다 해도
그 사람에 대한 확신이 들면 기다리고,
최선을 다 해 볼 생각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왜 눈물이 났을까...
뮤지컬을 볼 때,
베토벤의 마음이 떠올라서였을까..
들키고 싶지 않아,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했다.
눈물을 닦고, 마음을 좀 진정시키고 나오니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아...자꾸 신경 쓰이게 하네 정말.."
그가 내 휴대폰을 내려 놓고 있었다.
"선생님을 왜 바꿔요?" <20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