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49화. 조력자



6시 30분.

김대표가 7시까지 오기로 해서,

슬슬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 때 현관문에서 벨이 울렸다.


'어? 조금 일찍 도착했나?'





나는 당연히 김대표라고 생각하고,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훈지씨!!"






"서프라이즈!!!"







그가 예쁜 꽃 한 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아니...이 시간에 여기 웬일이에요?"






나는 반가움과 놀라움,

그리고 당황스러움을 어떻게 감춰야 할지 몰랐다.






"오늘은 오전 일정 밖에 없었어요.

 저녁 때 친구랑 운동 가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녀석이 펑크를 내서 이리로 왔죠!!"






"아...그랬구나..."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좋아하는 모습 보고 싶어서

 꽃도 사왔는데...

 전혀 반가운 얼굴이 아닌데?"






기분을 잘 못 숨기는 편이라,

이럴 때는 어떻게 감정을 숨겨야 할지 난감하다.






"차는요?"






"택시 타고 왔는데요?"






"아..."







"지금 표정이 어떤 줄 알아요?

 바람 피우다가 딱 들킨 표정,

 안에 혹시 누가 있는 거 아니죠?"




그는 고개를 뻗어

안을 들여다 보는 시늉을 했다.




"아니..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우선은 안으로...

 아니다. 집으로 가요.

 나도 지금 일 하던 거 정리하고 있던 참이에요.

 집에 먼저 가 있어요."







"기다렸다가 같이 갈께요."






내 속도 모르고, 저렇게 천하태평이라니...






"훈지씨,

 집에 먼저 가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편하게 마무리를 못 해서 그래요."






나는 현관문에서 그를 들이지도 못 하고,

내쫓지도 못 하고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그 때,

미처 닫지 않은 현관문이 열리면서

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왜 문을 안 닫고 있어?"





김대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씨...진짜...

 또 뭐야...'





난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대표님이 여기는 무슨 일로...?"






"아!! 맞다 오늘 김대표 수업 하는 날인데

 내가 사무실까지 나갈 시간이 없어서

 이리로 오라고 했어요."





재빨리 이런 생각을 떠올린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는.





"나 네 장단에 맞춰 줄 생각 없는데, 유정아."





싸늘한 김대표의 대답에 나는 순간 얼어 붙었다.





훈지씨는 예전처럼 흥분하지 않고,

가만히 내 설명을 기다리는 듯 

날 바라보고 있었다.





"훈지씨...

 사실은 내가 할 이야기가 있어서

 김대표한테 먼저 만나자고 했어요.

 집에 가서 기다려 줄래요?

 이야기 마치고 갈께요. 부탁이에요."





"응. 알겠어요."





그는 내 곁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서,

귓속말로 얘기했다.




"나 당신 믿어요.
 
 나 화날까봐 거짓말 하지 않아도 돼요.

 이야기 하고 와요. 기다리고 있을께요."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를 집으로 먼저 보내고,

식탁에 김대표와 마주 앉았다.





"태형씨는 말 좀 맞춰주면 안 돼?

 앞에서 꼭 그렇게 이야기 해야 겠어?"




엉뚱한 불꽃이 김대표에게로 향했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나 지금, 니네 사랑 싸움 구경하러 온 거 아니고.

 앉아서 빨리 설명해.

 그 문자 뭔지."





'태형씨의 이런 차가움이

다가서지 못 하게 하는 이유야..

언제든 돌아설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 들어...'





김대표의 앉은 뒷모습을 보면서

그 순간,

내가 왜 늘 훈지씨에게로

마음이 향했는지 알 것 같았다.






"뭐 마실래?"






"됐으니까 앉으라고."






순간 그를 향한 미안함보다 서운함이 더 커졌다.






"태형씨..나한테 꼭 이래야 돼?

 이렇게 차갑게.."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나 이제 너한테 친구도 뭣도 아니잖아.

 그래서 수업도 다 그만 둔다고 한 거 아냐?

 그런데 이전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길 바라는 거야?"






나는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슴이 찢어졌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넌 친구라는 포장으로 나한테 항상 여지를 남겼어.

 생각해 보면

 그게 날 더 헷갈리게 했고, 상처받게 만들었어.

 그리고, 이제 와서 수업 다 못 하겠다고 하면 다야?"





 
"태형씨 지금 뭔가 오해하고 있어.
 
 그래서...그런 마음으로...

 수업 못 하겠다고 한 거 아니야..

 태형씨는 아직도 나를 그 정도 밖에 몰라?"





너무 서운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






"널 볼 기회가 없었는데,

 어떻게 내가 너를 잘 알아?"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가 상처 받고 있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고,

테이블 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미안...내가 너무 감정적이었다...

 네가 하려고 했던 말 해...

 갑자기 수업은 왜 그만 둔다는 거야?"





"...."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이 흐르고,

입을 떼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너한테 화 낼 일이 아닌데...

 내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이 느껴져서 그랬어.

 너희 둘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바보처럼 그 사이에 껴서

 내가 뭐 하고 있는 건가...순간 화가 났었나봐..."






"태형씨...미안해..

 내가 이기적이었어..

 나는 나와 훈지씨 생각만 하느라

 태형씨가 얼만큼 상처 받고,

 슬퍼하는지 관심이 없었어..."






울먹이며 이야기하는 나를

그는 한참 말없이 바라봤다.

그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와 안아 주었다.





"다 각자 자신의 감정이 우선인 거잖아.

 이해해...

 난 내 감정 잘 추스리고 정리할께..

 너한테 화내서 미안해..

 진심은 아니었어."




한참을 그에 대한 미안함을 눈물로 쏟아내고,

다시 마주 앉았다.






"사실은...태형씨..

 나 조금씩 훈지씨랑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어.

 글쎄...헤어지는 게 다는 아니고...

 그냥 원래 내 삶 속으로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는거야."





"무슨 말이야?"





"혹시 훈지씨 소문 돌고 있는 거 알고 있어?

 그게 좀 더 가시화 되고, 기사화 되면

 태형씨는 태형씨가 해야 할 역할을 해줘.

 지난 번에 내가 부탁한 대로...

 나는 원래 내가 하려던 걸 할께."






"네가 원래 하려던 게 뭔데?"






"꼭 훈지씨 때문만은 아닌데....

서로 눈에서 멀어져야

마음도 정리하기 쉬울 거 같아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이건 내가 원래 해 보고 싶었던 건데,

그냥 계기가 만들어진 것 뿐이야."







"기사화 되면 그냥 맞다, 아니다 하면 되는 거지..

 너 어디... 뭐 떠나겠단 거야?"







"맞다라고 하기엔

 훈지씨가 지금 너무 좋은 기회를 갖고 있고...

 내가 그 기회들을 많이 막을 거 같아서.

 뭐든지 다 가능한 소설 속에서도

 나이차 많은 사랑은 현실에 부딪히더라.

 우릴 두고 아니,

 그 사람을 두고 얼마나 말들이 많겠어.

 자기 일을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인데

 스스로 목표한 곳까지 꼭 올라갔으면 좋겠어.

 그렇게 올라가는 모습... 보고 싶어."






"넌 뭐가 그렇게 복잡해?

 좋아하면 만나고, 그러다 싫어지면 헤어지는 거지..

 그걸 무슨 준비까지...

 나는 네가 참....이해가 안 간다.

 이 판을 짜야 하는 건 내 역할인데,

 왜 니가 그걸 끌어 안고 하고 있어..

 이 답답아..."





"나 답답이 아니거든...

 어차피..

 내가 훈지씨 일에 방해가 되면 서로 멀어지게 될꺼야.

 난 그 사람을 보는 게 힘들어질테고,

 그 사람은 또 힘들어하는 날 보는 게 괴로울 거고.

 가장 사랑할 때 헤어지면...

 서로를 미워할 일은 없잖아.

 난 차라리 그렇게 기억되고 싶어."





내 말이 끝나자마자,

태형씨는 추궁하듯이 물었다.





"너.. 이거 훈지 몰래 혼자 이러는 거지?"






"만약 훈지씨가 알게 되면,

 지금 감정에만 치우쳐서 분명 안 된다고 할꺼야.

 그래서 오늘 태형씨한테 부탁하려고...

 수업도 차차 정리하고, 내 주변도 정리하고 있을꺼야.

 새로운 곳에 가서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나 설레기도 해..

 내 삶에 사랑이 전부는 아니잖아."






"어디로 가려고?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난 네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이미 고민 끝났고, 집도 내 놨어.

 번복하지 않아.

 그만큼 많이 고민하고 결정한 거야."






"집도 내 놨다고?

 하...너는 정말 ....

 뭔 결심만 하면 이렇게 거침이 없냐...

 사람 마음은 변하기도 하고, 

 변할 줄도 알아야지"






"물론 내가 틀린 걸 수도 있어.

 그런데 어차피 인생은 답이 없잖아.

 결국 자기가 믿는 선택을 하는 거지.

 나는 내가 내린 결론이 우리에게 맞다고 생각해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멀리 보면...

 사랑은 어차피 언젠가는 식는 거잖아"





태형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하고,

차분히 나를 바라봤다.





"또 누가 알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는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냐?"






"농담만은 아닌데?"
 




"진심이에요?" <50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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