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막무가내는 처음이지

헤어지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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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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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굴 보고 같이 가자고 해야 할까. 아니, 그냥 혼자 다녀올 수도 있었다. 혼자 가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하긴 한데.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손톱만 까득까득 뜯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유럽은 못 갈 것 같다. 내가 인간관계는 파탄나서, 셋 말곤 아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세 사람한테 부탁을 하자니 그건 너무 염치 없는 짓이지.


“그래~ 내 주제에 무슨.“


커피가 썼다. 끝맛은 떫기까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달달한 걸 먹고 싶었다. 몇 개 없는 청포도 사탕을 집었다. 입안에서 굴리니 머지 않아 침이 다 말라갔다. 밖은 이제야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뀌고 있어서일까, 낮이 점차 길어지고 있다.

오늘은 입맛이 없다. 사탕이 다 녹으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와인을 마셔야지. 노을을 보다 문득 든 생각이 있다. 어릴 때의 나는, 죽기 전의 나를 생각했었다. 무얼 하며 삶을 마칠까. 주변인들은 얼마나 슬퍼할까. 내가 내 삶에 미련이 있을까? 이런 잡다한 상상으로. 근데 막상 닥치고 보니 별일도 아니었네. 이렇게 비생산적인 하루들을 보내고 있을 줄이야. 나의 죽기 전 목표를 거창하게 세우던 과거의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띵. 문자음이 울렸다.





010-XXXX-XXXX
김태형 너한테 가고 있어






익숙한 이름. 익숙한 전화번호. 저 번호는 전정국이고, 문장의 주체는 김태형. 갑자기 나한테 왜 온다는 거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이유가 궁금하지는 않았다. 왜인지, 그냥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탕을 깨물자 두 동강이 났다. 혀가 찔리는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 깨물었다. 이에 들러붙는 끈적한 무언가가 찝찝했다. 양치하고 씻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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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태형. 오랜만에 그를 부르는 전정국의 연락에, 그의 집으로 향한 그였다. 한때 아주 가까웠었던 사이였지만, 지금은 원수보다도 못한 사이. 정국의 입장에서 태형을 부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태형은 더 흥미롭게 생각했다. 무슨 일로 얘가 날 부르지.

그리고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에는 박지민도 있었다. 두 사람이 미리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태형은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으로 지민의 옆에 앉았다. 셋은 한동안 아무론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얼굴 보기가 꺼려지는 사이라. 서로와 이야기를 해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사람은 김태형.


“사람을 불렀으면 뭔 말이라도 해야지.”

“최이안 이야기야.”


정국의 말에 태형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고, 내키지 않는 듯한 자세였다. 세 남자가 최이안에 대해 할 이야기는 더이상 없었다. 파리에서 그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후로는. 태형은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진 채로 한 마디 던졌다. 다들 끝난 사이 아닌가.

묘하게 신경질적인 눈빛을 주고받는 정국과 태형.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눈을 감고 있는 지민. 태형은 그런 지민이 수상했다. 그리고 그 적막과 그 둘의 무표정이 답답해 참다참다 한 소리 하려던 참이었다. 입이 먼저 열린 쪽은 지민이었다.



“이안이가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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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개운하다. 수건으로 머리를 돌돌 감아올리고, 샤워가운을 걸치고서 향한 곳은 부엌. 와인잔과 와인을 품에 안아들고 거실에 앉았다. 코르크 따개가 어디 있더라. 마냥 신이 났다. 발걸음이 가벼웠고, 늦겨울의 이 차가운 분위기가 좋았다. 창문은 바람이 통할 만큼만 살짝 열어두고, 와인을 따랐다. 향긋한 포도향이 마음에 들었다.

오랜만에 TV를 틀었다. 먼지 쌓인 리모컨이 그동안 선반에만 있었던 시간을 말해준다. 회사-집 루틴이 반복이었던 지난 날들… 집에 들어오면 뻗어서 자느라 정신 없었기에. 이러한 여유가 그저 좋았다. 못 보던 예능도 있었고, 내가 좋아하던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도 방영했다. 그렇게 몇 분을 더 채널 탐방만 하다가, 그냥 꺼버렸다. 프로그램같은 것들도 보던 사람이 봐야 재밌지, 처음 재미를 붙이려니 그건 좀 어려운 일이었다. 

좋아하던 노래나 틀어보려 했더니, 핸드폰 배터리는 거의 방전이다. 어쩔 수 없지. 착잡한 마음으로 와인을 들이켰다. 이렇게 씁쓸했던가, 이게. 3월의 밤바람이 집에 스며들자 괜히 더 쓸쓸해지려던 참이었다. 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특히 친구 하나 없는 나에게는. 택배도 시킨 게 없는데. 


“누구세요~”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래서 지나가려 했는데, 곧이어 또 울렸다. 잠시의 시간을 두고 한 번 더. 그러니까 이제 슬슬 무서워지는 거 있지.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소문이 났나. 며칠 전에 철없는 중딩들이 이 아파트에서 초인종 누르고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조심스레 현관을 향했다. 혹시나 정말 그런 거라면, 이 옷차림은 좀 위험했다. 어떡하지, 막 고민하는데…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몸이 얼었다. 몇 번 실패해서 자꾸 오류음이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열렸을 때에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김태형이었다. 그는 그대로 들어와 나를 다짜고짜 안았다. 찰나였지만 그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눈빛이 어딘가 공허했다. 마치 몇 년 전 파리에서, 모든 걸 알았을 때 나에게 찾아왔던 그 눈빛처럼.

그는 꽤 세게 나를 끌어안았다. 저항 하나 할 수 없이 난 겨우 그의 어깨 위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어깨 너머 보이는, 현관의 박지민과 전정국. 그들의 표정 역시 좋아 보이진 않았다. 시선은 나를 향했다. 알 수 없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들로부터는 죽도록 숨기고 싶었던 그 마지막 자존심. 이 셋은 부디 모르길 바랐던 나의 비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았던 작은 양심.


너희에게 내 마지막 비밀을 들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