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오후5시
23
“아마… 차 막히는 것도 무시하고 올겁니다.”
남준의 말에 여주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
“네?”
남준은 그제야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켰더니 통화 기록 하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또한 7번의 부재중과 함께... 그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아까 밖에서 석진이랑 통화 중이었습니다.”
“.....”
“가게 안에서 분위기가 좀 이상해지길래. 설명하려고 하다가 여주씨 팔목을 잡길래.. ”
“...그래서요?”
“그냥 전화를 끊고 뛰어 들어왔습니다.”
남준은 말끝을 흐리며 가게 문 쪽을 한 번 바라봤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선택이 즉흥이었다는 건 분명했다.
“지금쯤이면, 이미 본인 쪽에서는 감 잡은지 오래일 겁니다.”
“아무 일 없다고 말해도요?”
“안 믿을 겁니다.”
잠시 침묵.
“오히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하는 쪽이라서요.”
여주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했다. 석진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주는 그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대신, 아까 남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는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잘 됐네요.”
남준이 그녀를 바라봤다.
“얼굴 기억 안 난다던 말. 거짓말은 아니었거든요.”
남준은 그제야 확실히 웃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남준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딸랑.
가게 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짧고 급하게 울렸다. 평소보다 한 박자 빠른 소리였다. 여주와 남준의 시선이 동시에 입구로 향했다. 문이 열리며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사람이 들어왔다. 숨이 조금 가쁜 듯,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고, 코트 자락은 제대로 정리되지도 않은 채였다. 구두 소리가 바닥에 닿는 간격도 일정하지 않았다. 석진이었다. 가게 안을 한 번 훑는 눈빛은 여주를 찾고 있다는 게 너무 분명했다. 계산대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하자, 그제야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하지만 표정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여주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괜찮냐는 말보다 먼저 나온 호흡이었다. 석진은 들어오자마자 여주의 양쪽 어깨를 아프지 않게 잡으며 떨리는 동공으로 여주의 상태를 확인했다. 또한 그 순간에 남준은 한 발 뒤로 조용히 물러 서더니 여주에게 눈웃음을 지어주다가 바로 꽃집을 나갔다. 가게 안에는 치우다 만 흙자국과 깨진 화분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석진의 시선은 그것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이 잠깐 굳었다가, 다시 여주에게 돌아왔다. 여주를 위아래로 한 번 더 훑어본 뒤에야,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무슨 일이야. 다친 데는 없어?”
“네. 남준 씨가 바로 들어와서요.”
그제야 석진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갔다. 긴장이 풀렸다기보다는, 더는 버티지 않아도 된다는 쪽에 가까웠다. 여주는 그런 석진을 보다가 장난기 서린 얼굴로 석진을 떼어놓고 양손 허리에 손을 올리더니 눈을 게슴츠레 뜨며 석진에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근데요.”
“응”
“여긴 어쩐 일이세요?”
“....너 생각 나서?“
“오자마자 걱정부터 하지 않았나? 내 생각 나면 걱정만 되나..?“
석진은 이미 다 아는 것 같은 여주의 표정에 결국 잠깐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24
“…미안해.”
석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말 끝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는 말을 꺼내기 전, 여주의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남준이한테 부탁했어. 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혼자 있는 시간에 무슨 일은 없는지.”
석진은 말하면서도 계속 여주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표정이 굳지는 않는지 눈썹이 올라가지는 않는지. 회사에서는 사람들의 반응을 신경쓰지도 않았는데. 이런 상황과 감정은 처음인 그에게 이 대화는 설명이 아니라, 허락을 구하는 쪽에 가까웠다. 내가 언제 이렇게까지 누구한테 쩔쩔맨 적이 있던가.
“오늘 같은 일이 없을거라는 보장도 없었고.. 또...”
“석진씨 만나기 전에도 꽃집을 운영할 땐 이런 일 없었어요.”
“실망했겠지만... 난 앞으로도 계속 이럴거야. 우리가 남도 아니고.. 그래도 좀 특별한데”
여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석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 시선이 길어질수록 석진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기다리는 동안 괜히 석진은 필터 없이 나온 말이 있는지 생각 또 생각했다. 여주는 그런 석진을 쳐다봤다. 말은 다 했는데, 판결이 아직 내려지지 않은 사람처럼.
“그럴 것 같았어요. 내가 석진씨를 잘 모르는 것도 아니고”
“어?”
“내가 말린다고 그만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진작에 알았다구요.”
“.....”
“그리고 남준 씨가 다 말해줬어요. 아까 나한테 들켰거든~”
남준이 석진에게 혼나지 않을 만큼 핑계를 대는 여주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차분했다. 아니, 장난기가 생겼다..?
“그리고.. 나도 뭐 석진씨한테 감시 당하는 거 기분 나쁘지 않아요. 그냥 너무 안 찾아오길래 얼굴 다 잊을 뻔 한 것만 빼고”
“겁 없네. 그런 말을 쉽게하고”
“으응? 절대 아닌데...처음엔 당황했죠. 근데 뭐.. 석진씨니까.”
“.....”
“아 그리고,감시하는 건 상관없는데... 굳이 귀찮게 사람 쓰지 말고 연락을 자주 해요 통화도 하고. 안 그래도 남준 씨 바쁘실텐데 이런 일 시키지 말고”
“....알았어.”
석진은 그 말에 잠깐 눈을 깜빡였다.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질책도, 선 긋기도 아닌, 같이 조정하자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말을 마친 여주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 몸짓과 달리, 눈빛은 아주 진지했다. 석진은 그 눈을 보며 확실히 느꼈다. 이 사람은 상황을 통제하려는 게 아니라, 관계를 다루려 하고 있다는 걸.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이 많아졌다기보다는, 너무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고만 생각했던 사람이, 지금은 나란히 서서 선택지를 건네고 있었다. 여주는 말을 다 했다는 듯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갑자기 두 팔을 천천히 벌렸다.
“그리고…나 아까 좀 무서웠어요.”
“어디 아픈데라도 있,”
“으응 아뇨 지금은 괜찮은데.... 아~몸이 좀 떨리네?”
여주의 손끝이 공중에서 아주 작게 흔들렸다. 스스로도 그걸 느꼈는지, 말을 덧붙였다.
“뭐해요? 빨리 안 안아주고?”
석진은 대답 대신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니, 망설임 없이 여주를 끌어안았다. 그의 한 팔은 여주의 등을 감싸며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당겼고 다른 한 손은 어깨 위에 얹혔다가, 괜히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천천히 내려와 등 중앙에 자리 잡았다. 여주는 석진이 들었을지 모르는 낮은 음으로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25
꽃집 마감을 끝낸 석진은 끝까지 여주를 집 앞까지 걸어서 데려다줬다. 꽃집에서 나와 골목으로 접어드는 동안 그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여주보다 반 박자 앞에 있었다. 속도를 맞추기보다는, 먼저 위험을 확인하는 쪽에 가까운 위치였다. 가로등 불빛이 끊기는 구간마다 시선이 먼저 움직였고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면 무의식적으로 어깨가 조금 굳었다.
골목 안쪽은 조용했다. 닫힌 상가 셔터들이 줄지어 있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현수막 소리가 간간히 들릴 뿐이었다. 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거리였지만, 오늘의 석진은 사소한 소리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여주는 그런 석진의 옆모습을 힐끗 올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오늘 하루가 유난히 길었던 사람의 얼굴이었다.
“오늘따라 과잉보호네.. 나 진짜 괜찮다니까요. 집도 바로 여기고. 올라가면 씻고 바로 잘 건데.”
말투는 가볍게 흘렸지만, 석진은 웃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멈추고 여주 쪽으로 몸을 돌렸다. 거리도 아주 조금 좁혔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여주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눈동자가 아직 덜 가라앉은 건 아닌지. 어깨가 괜히 굳어 있지는 않은지. 손끝에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듯 시선을 옮겼다가, 그제야 낮은 목소리가 나왔다.
“알아. 근데 괜찮다고 말할 때까지가 제일 안 괜찮을 때라서. 오늘은 그냥 내가 예민해도 이해해줘.”
그 말에 여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장난을 하나 더 얹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집 앞에 도착해 현관 앞에 서며 한 발짝 물러났다.
“알겠어요. 그래도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요.”
“.....”
“조심히 들어가요. 집 도착하면 문자 보내고요.”
석진은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는 말 대신이었다. 여주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문이 닫히고, 석진은 뒤돌아서 골목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여주는 석진이 돌아가는 뒷모습을 건물 복도에서 지켜봤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