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
완성된 음료를 픽업대에 올려놓자마자 새 주문이 들어왔다. 종강을 앞둔 대학교 앞 카페는 시험공부를 하러 온 학생들로 북적였고, 오후 내내 밀려드는 주문에 잠깐 앉아 있을 틈도 없었다.
스물두 살. 대학에 들어오면 조금은 여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고등학생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활이었다. 오전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퇴근 후에는 밀린 과제를 하다가 새벽에 잠들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휴, 한숨을 돌리며 머리칼을 쓸어넘기는데, 귀에 꽂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찰칵!
셔터음에 고개를 들자, 창가에 앉은 손님들이 하나같이 고양된 얼굴로 바깥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바깥 풍경에 대고 팔을 뻗은 채 누군가는 셀카를 찍었고, 누군가는 밖을 찍고 있었다.
아, 눈 오는구나. 전혀 몰랐다. 통유리창 너머로 하얀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나는 잠깐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주문을 처리했다. 감상에 절어있을 시간따윈 없었다. 손님이 많았고, 밀린 주문도 산더미였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서 손님이 뜸해질 무렵, 몇 시간도 안 되어 가득 찬 쓰레기봉투를 들고 카페 뒷문으로 향한다.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바닥에는 생각보다 눈이 꽤 쌓여 있었다. 건물 뒤편에 세워진 자전거에도, 담벼락 위에도 하얀 눈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플라스틱 통 안에 넣어두곤, 종종걸음으로 가게 문앞으로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문고리를 잡아 돌리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손을 내리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송이가 머리카락과 어깨 위로 떨어졌고, 차가운 공기에 코끝이 금세 시려왔다.
그때도 이랬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그날도 나는 눈이 내리는 줄 몰랐고, 누군가의 카메라 셔터 소리를 듣고서야 창밖을 바라봤었다. 그제서야, 눈이 온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도 오늘과 같았다.
다섯 해 전, 열일곱 살의 겨울이었다.
*
기말고사가 끝난 뒤에도 내 일상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친구들은 시험이 끝났다며 노래방이며 영화관이며 놀러 다니기 바빴지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기 전에 끝내야 할 문제집이 더 신경 쓰였다.
그날도 평소처럼 도서관에 갔다가 열람실에 빈자리가 없어 1층 라운지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오가며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라 조금 소란스러웠지만, 이어폰을 끼고 수학 문제집을 펼치자 금세 주변 소음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한창 문제를 풀고 있을 때였다.
찰칵.
고개를 들어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남학생 하나가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렌즈가 아무리 봐도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인상을 팍 쓰곤 불쾌해진 티를 내며 그 쪽으로 다가갔다.
“저기, 지금 나 찍었어?”
남학생은 카메라를 내리더니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 밖에 찍었는데.”
“사진 좀 보여줘.”
그 애가 내민 카메라 화면에는 눈 내리는 도서관 앞 풍경이 담겨 있었다. 아, 바깥을 찍은거구나. 그렇지만 유리창에 반사된 라운지 내부도 희미하게 찍혀 있었고, 자세히 보니 문제집을 들여다보는 내 옆얼굴까지 보였다. 이 부분을 잘라달라고 하고싶은데 그건 어렵겠지.
“나 찍혔잖아.”
“아, 진짜네. 미안.”
“지워줄래?”
남학생은 순순히 사진을 삭제한 뒤 카메라를 챙겼다. 괜한 오해였다는 걸 알게 되니 조금 민망해졌다. 목 뒤를 쓸어내리며 다시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끼려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눈이 내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도서관 앞 나무와 화단이 어느새 하얗게 변해 있었고, 바람을 타고 굵은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창가로 모여들더니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나는 문제집 옆에 엎어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친구들이 있는 단체 채팅방에도 온통 눈 이야기였다. 첫눈이 온다고 알려준 메시지는 이미 한 시간 전에 도착해 있었다. 이렇게 많이, 오래 내리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니. 감성이 메마르긴 했나보다.
카톡과 창밖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문제집을 펼쳤다. 아무렴 어떤가. 이게 원래의 난데. 원래부터 삭막한 사람인걸. 그렇지만 집중은 잘 되지 않았다.
괜히 문제집을 펜으로 툭, 툭 내리치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왠지 싱숭생숭해져서 공부가 안 된다. 컨디션 관리를 잘못한 것도 아닌데. 오후 여섯시가 조금 넘어 도서관을 나섰다. 눈은 그쳤지만 구름 때문인지 밤처럼 어두웠다. 인도 가장자리에는 아직 하얗게 쌓인 눈이 남아 있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던 나는 길가에 쪼그려 앉아 있는 남자애를 발견하고 걸음을 늦췄다.
아까 그 애였다.
이번에는 카메라를 바닥 가까이 내려놓고 무언가를 찍고 있었다. 옆을 지나가며 슬쩍 내려다보니 눈이 녹아 생긴 작은 웅덩이였다. 그 아이가 찍은 사진을 확인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카메라 화면에 시선이 갔다. 웅덩이에 비친 가로등과 나뭇가지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 눈에는 그저 지저분한 흙탕물이었는데, 사진으로 보니 제법 그럴듯했다.
“어, 아까 도서관에서 봤던 사람 맞지?”
인기척을 느낀건지 그 아이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며 아는 체를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카메라를 가리켰다.
“이거 네가 찍은 거야?”
“응. 왜?”
“아니, 그냥. 잘 찍어서.”
그 아이는 화면을 한번 내려다보더니 카메라를 내 쪽으로 돌려주었다.
“다른 것도 볼래?”
나는 얼떨결에 그 애 옆에 쪼그려 앉았다. 카메라에는 온통 눈 사진뿐이었다. 눈이 쌓인 벤치, 나무에 걸린 장갑, 발자국이 어지럽게 남은 골목길까지.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풍경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진으로 보면 하나하나 눈길이 갔다.
몇 장을 더 넘겨보더니, 갑자기 내게 카메라를 건넨다.
“한번 찍어봐.”
“내가?”
“응. 여기서 찍으면 돼.”
나는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이 아이가 찍었던 것처럼 웅덩이를 향해 렌즈를 낮췄지만 화면에는 흙탕물과 내 신발만 가득 들어왔다.
“이상한데? 네가 찍은 거랑 너무 다른데.”
“조금 더 아래로 내려봐. 가로등이 물에 비치게.”
그 애의 말대로 카메라를 움직이자 화면 한쪽에 가로등이 나타났다. 나는 몸을 조금 더 숙여 구도를 맞춘 뒤 셔터를 눌렀다.
찰칵.
화면을 확인하자 아까보다 훨씬 그럴듯한 사진이 찍혀 있었다.
“오, 됐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애도 옆에서 사진을 확인하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왔다. 나는 서둘러 카메라를 돌려주고 가방을 챙겼다.
“나 버스 왔다. 고마워!”
“응, 잘 가.”
버스에 올라타 창가 자리에 앉자 남학생이 다시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을 맞으며 쪼그려 앉아 있던 그 애가 조금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는 가방에서 영어 단어장을 꺼냈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단어를 외웠겠지만, 그날은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하고 책을 덮었다. 창밖으로 눈 쌓인 거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로 길게 늘어진 나무 그림자, 하얀 눈 위에 남겨진 발자국, 차창에 맺힌 물방울까지.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창밖을 한 장 찍어보았다. 사진은 형편없었다. 버스가 움직이는 바람에 초점도 맞지 않았고, 창문에 비친 내 얼굴까지 겹쳐 보였다. 그래도 지우지는 않았다. 그냥, 오늘은 조금 다른 겨울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