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에필로그 (11) 그 후, 석진 이야기(2)

여주가 다닐 대학이 정해졌을 무렵

석진은 여주가 통학을 할 수 있을만한 위치에 집을 얻었다.

그동안 수사를 돕고, 정보관련 사업도 시작했던 석진은

집을 마련하고 싶어서 열심히 돈을 모았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여기저기를 떠돌아야했던 석진은

여주와 윤이 독립하더라도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그런 안정감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석진은 여주와 윤이 독립하더라도 그들이 쓰던 방을 그대로 두고,

언제나 편하게 올 수 있는 그런 집을 만들고자, 혼자 살기에는 다소 큰 집을 구했다.

그런데 석진에게 예끼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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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여주

저는 입양 제안은 거절할게요... 그건 제 마음과 다르니까요...

셋이 모여있으면 '우리는 가족'이라고 부르던 여주가 입양제안을 거절한 것이었다.

'왜일까...'

석진은 어리둥절한 느낌이었다...

성인이 되면서 여주의 마음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을 석진은 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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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기억 속 여주

좋아해요...

여주의 고백은 서툴고도 서툴렀다.

석진은 그래서 그만 큰 실수를 했다.

방법이 서툴다고 마음도 서툰 것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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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기억 속 석진

여주야.. 그건 무척 중요한 감정이야..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되. 다시 잘 생각해봐..

석진은 여주를 거절했다.

어린 시절부터 불우했던 석진은 가족처럼 친밀한 관계를 다지기 위해 윤이와 여주를 열심히 보살폈지만,

결혼을 한다거나 직접 가정을 이루는 생각은 한번도 꿈꿔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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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기억 속 석진

여주야, 너와 나는 후견인 사이이고.. 우리는 그냥.. 가족이야. 그치..?

'나는 누군가를 만나기에는 너무 부족한 사람인데...'

'여주야.. 너는 나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야지...'

'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밝게 밝혀주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아이인데.... '

'나보단 훨씬 나은 좋은 사람을 만나서 행복해야지...'

그래서 여주가 자신을 떠나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며 지내는 것이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던 석진이었다.

'여주는 나를 정말로 좋아하는 걸까 ..?'

'혹시 여주가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여주와의 관계에 선을 그으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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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기억 속 석진

그러니까.. 여주야 너도 윤이처럼 나를 아저씨라고 부르는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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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기억 속 여주

싫은데, 오빠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석진이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을 깨달은 여주는 상처를 받은 것 같았고,

이 후, 한동안 석진과 여주는 서로 불편해졌다.

특히 여주가 당시 쓰고 있던 소설 '남겨진 의자' 때문에 석진과 갈등이 생기면서 이 서먹한 관계는 오래 지속되었다.

크게 말다툼을 한 후, 여주가 석진에게 준 첫 인쇄본의 맨 앞 페이지에는 여주가 남긴 메세지가 이렇게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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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기억 속 여주

'우리..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걸까..? 마음대로 해서 미안해 아저씨.. 그래도.. 새 책 출판한 거.. 축하해 줄꺼지..?'

출판사와의 계약 때문이었을까? 석진이 위약금을 준다고 했는데도, 여주는 억지로 책을 내버렸고,

소설이 유명해지면서 경재력을 갖추게 된 여주는 정서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분도 석진으로 부터 조금씩 독립하여 지냈다.

석진은 자신의 은인인 여주와 불편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여주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해도 해보고, 나름 마음을 풀어주려고도 애써보았지만,

여주는 석진에게 거절당한 마음 때문인지, 윤이가 집에 있을 때만 찾아오고, 석진을 더이상 단둘이 만나려 하지 않아서 딱히 대화할 기회가 생기질 않았다.

그러다가, 여주가 칼을 든 윤의 모습을 보고 기절하는 일이 일어났었다.

석진은 여주가 쓰러지는 것을 보자마자 바로 업고 병원으로 향했다.

여주가 쓰려졌을 때 얼마나 걱정을 했었는지..

여주가 깨어나지 않았던 이틀 내내 석진은 모든 일을 미루고 그 옆을 지켰다.

하지만 자격지심이 있던 석진은 여주가 차라리 기억을 찾지 못하고 나를 잊고 지내면 어떨까.. 바라기도 했다.

때문에 여주가 깨어나고 회복하기 시작하자, 소극적으로 지켜보며 지냈다.

물론 여주는 특유의 낙천적이고 호기심많은 성격과 타고난 집념으로 금새 모든 기억을 찾았지만,

여주가 회복하는 동안 석진은 마음이 복잡했다.

석진은 이미 여주와 윤을 충분히 보살필 만큼 안정적인 직장과 일을 하며 자신의 삶을 잘 꾸리고 있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노숙을 하던 보잘 것없는 자신이 계속 남아있어서,

여전히 여주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시 현재...

과거의 일을 떠올리던 석진은 등을 깊게 기대 앉아서 한숨을 쉬었다.

석진은 여주가 자신에게 고백을 거절당한 후로 왠지 자신으로 부터 무단히도 독립하려 애썼다는 것을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윤이의 피해자 자격인정과 프랑스에서의 법적 공방, 한국으로의 인도과정까지 여주는 석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기댔던 것 같지만,

그 후, 석진과 여주는 윤이와 국이를 위해서 각각 한국과 프랑스에 각각 떨어져 지냈고,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여주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시작하자 석진은 멀리서 여주를 응원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주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는데 지속적으로 어려움이 생겼다.

상대를 깊이 바라보거나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지가 않다는 느낌이랄까...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여주는 어쩌면 어릴 때, 자신에게 거절받았던 마음으로 인해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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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나는 내가 늘 너에게 보호자 이상의 사람이 될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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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내 마음 속에 너는 모든 사람들이 피해다니던 나에게 손수건을 덮어주던 상냥한 꼬마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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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스스로 항상 떳떳하지 못 한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었지..

석진은 아까 서랍에서 꺼내두었던 상자 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한쪽이 쭉 찢어진 그날의 신발자국이 남아있는 손수건이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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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왠지 밤하늘의 별처럼 어둠 속의 빛 같았던 너에게 나보다 더 좋은.. 누구가가 나타날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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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하지만, 이미 니가 좋아한다고 했는데.. 자격이 뭐가 필요했겠어.. 스스로 말도 안되는 자격을 만들어서 부족해서 나는 안 된다고 선을 긋어버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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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너무 늦었지만, 이젠 떠나보내야겠다... 그치..?

석진은 책상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짓밟힌 자국이 있는 찢어진 손수건을 조용히 버렸다.

시차가 잘 적응되지 않아서, 잠이 오지 않던 석진은 거실로 잠시 나왔다.

여주의 방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문 틈으로 자고 있는 여주가 보였다.

여주가 이불도 덮지 않고 자는 모습을 본 석진은 잠시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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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나는 너를 왜이렇게 밀어내려고 애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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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나는 너를 통해서 이렇게나 많은 길을 걸어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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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여주야.. 이번에는 너를 위해서 다가갈게..

석진은 여주에게 들리지 않을 만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살며시 여주의 머리 밑에 베게를 받혀주고 이불을 덮어준 석진은

조용히 문을 닫고 방에서 나왔다.

여주가 떠나지 않고 석진의 집에서 계속 머물자, 둘은 조금씩 일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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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우리 오늘 장보기로 한 건 다 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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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여주

응~ 그런 것 같은데..?

계산대로 향하던 석진은 와인 코너로 뛰어가더니 와인을 한 병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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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

오늘 저녁때 별다른 일 없으면 우리 와인 한 잔하면서 영화나 한편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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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여주

그럴까..? 좋아..

석진은 지치고 힘이 없었던 여주가 조금씩 회복하기는 것을 보면서 안심이 되었다.

여러분 조금 기다리셨죠..? ^^;;

석진의 마음에 대해 조금 고민되었던 부분이 있었어요~

자세한 부분은 후기 때 말씀드릴께요~

이번 편의 추천 BGM은 Be Be Your Love (Rechel Yamagata)입니당... ㅎㅎ

그럼.. 다음편예서 계속 💜

*모든 이야기는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 내 머릿속에 지진정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