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에필로그 (7) 그 후, 여주 이야기 (1)



유여주
결국.. 또 돌아왔네...

여주는 오랜만이 돌아온 침실에 앉아 중얼거렸다.

석진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윤이는 독립해서 가정을 꾸린 지 오래되었고, 석진은 아프리카에 간 후로 언제 돌아올 지 기별이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여주는 종종 집을 관리하기 위해 들렸다.

큰 집에 홀로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온 여주는 예전에 쓰던 그대로 남아있는 자신의 방에 앉아서,

처음 석진을 만났을 때부터 떠올렸다..

여주가 기억하는 석진의 첫 모습은 중학교 1학년 여학생 생활관 앞에서였다.


어린 석진
...?

자원봉사자인 듯한 누군가가 길을 잃었는지 두리번 거리며 생활관 쪽으로 오고 있었다.


어린 여주
'이 쪽은 외부인이 오면 안되는 곳인데..?'

여주는 석진이 더 가까워지자 길을 막아섰다.


어린 여주
저기 여기 오시면 안되는데요..?


어린 여주
누구세요..?


어린 석진
아.. 이거... 행사 때문에 식당에 갖다놔야하는데, 어디인지 알려줄래?

여주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여주
알려드릴테니까 따라오세요...

경계심을 풀지 않았던 여주는 직접 데려다줘야겠다는 생각에 식당까지 함께 걸어갔다.

식당에 도착한 여주는 원장수녀님을 만나고서야 석진이 자원봉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정기적으로 봉사를 오던 석진과 마주치면서 여주는 나쁜 사람은 아닌가보다.. 라고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던 것 같다.


어린 여주
아저씨, 또 만났네요...?


어린 석진
어.. 저.. 내가 아직 아저씨보다는, 선생님이라고 불러주거나, 오빠라고 불러주면 어떨까..? 내가 대학은 안 다녀도 지금 나름 대학생 나이거든..?


어린 여주
아... 그럼 선생님은 좀 그렇고... 석진 오빠...?

석진은 봉사활동 왔다가 여주와 마주칠 때면 늘 반갑게 인사했고, 여주는 그런 석진이 점점 좋아졌던 것 같다.

이후 석진과 다시 만난 것은 원장실에서 였다.


원장수녀님
여주야, 어서와

여주가 원장실에 갔을 때 석진은 윤과 같이 있었다.


원장수녀님
여주야~ 여기는 윤이야..


원장수녀님
그리고 이 쪽은...


어린 여주
아 네 알아요, 석진샘... 자주 오셨잖아요..


원장수녀님
응 그래.. 윤이 보호자이기도 하셔..


원장수녀님
윤이가 아직 한국말도 서툴러..... 여주가 윤이를 도와줄 수 있을까..?


어린 여주
네...:) 그럼요~

보육원 동생들 숙제도 봐주고 문제집도 풀게 하던 여주는 처음에는 윤이도 그정도의 도움이면 될 줄 알아서 쉽게 승락을 했다.


어린 석진
여주야, 얘가 사연이 많은 친구라서..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원장님 통해서 나에게 연락해도 되..


어린 석진
잘 부탁할께.. 고마워..

이후 여주는 윤과 함께 학교를 다니면서 윤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닭았다.

학교나 생활관에서 강당같이 큰 곳에 가면 힘들어하던 윤을 돌보느라 여주는 종종 단체시간에 윤이와 함께 교실이나 보건실에 있곤 하였다.


어린 여주
윤이야 괜찮아..?


어린 윤
아니, 아직... 아직은 ... 잠깐만 있으면 괜찮아 질꺼야..

심호흡을 하며 숨 가쁘게 쉬던 윤이는 10분 정도 지나면 괜찮아졌지만,

여주가 보기엔 윤이는 심각한 상태같았다.

여주는 윤이를 더 위로해줘야 뭔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여주
윤이를 위한 동화를 써볼까...?

어린 시절 여러 친척집을 떠돌며 눈치밥을 먹던 여주는 초등학생이 되기 직전에야 보육원에 맡겨졌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어린 시절에 읽지 못했던 동화책들을 보게 되면서 여주는 동화의 세계에 빠져지냈다.

보육원 도서관에는 아이들을 위한 책이 많이 있었는데,

여주는 그 곳에서 전래동화부터 내용이 길고 다소 건조한 현대 동화까지..

다양한 동화들을 읽으며 어린 시절 잃어버린 꿈과 환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여주에게는 그 시간들이 잃어버린 유년시절을 보상 하는, 오롯이 스스로만을 위한 치유의 시간이었다.

종종 글짓기 대회에서 상도 받는 등, 소질이 있었던 여주는 그 이후 윤이를 위한 다양한 동화들을 쓰기 시작했다.

여주의 글을 통해 감명과 위로를 받았던 윤이는 담임샘께도 이러한 사실을 알렸고,

이후, 담임 샘이 공모전에 글을 내보도록 권유하면서 여주는 등단하게 되었다.

여주는 원래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학은 안 가려고 했지만, 익명의 후원자가 생기면서 결국 가게 되었다.


유여주
하나, 두울..


석진
얘들아~~ 찍었다..!


윤
아~~아저씨! 이게 뭐야! 셋에 찍었어야지...!


유여주
이것도 다 추억이지 뭐.. ㅎㅎ

입학식에는 윤이와 석진이 축하하러 와주었다.

석진은 평상시에 둘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하고, 가족을 초대해야하는 행사에 가족 대신 참여하며 함께 했다.

입학 무렵 석진은 후견인으로 있는 윤이와 여주에게 입양을 제안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보호종료기간이 된다면 더이상 보육원을 통해 후원을 할수 없었고,

친인척이 없는 아이들에게 보호자가 되어 주는 방법은 입양제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원장수녀님
그래서 생각해보았니..?

한국에 온 이후 석진의 도움을 전적으로 받고 있었던 윤은 바로 찬성했다.

하지만 석진에게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던 여주는 달랐다.


유여주
저는 입양은 거절하고 싶어요.. 그건 제 마음과는 조금 다르니까요..

결국 여주는 석진과 피후견인과 후견인의 관계로 남기로 했다.

글 쓰는데 도움을 받고자 심리학 수업을 듣던 여주는, 윤이의 과거를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인터뷰하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들으면 들을 수록 엄청난 과거를 가지고 있던 윤이는 마음 속에 묻어둬야 했던 이야기하면서 후련해 하였다.

여주는 윤이를 더 잘 이해해보고 싶은 마음에,

윤이에게 킬러와 관련된 기술 몇 가지를 배우기 시작했다.

장소는 석진의 집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창고였다.

원래 사회적 기업을 세우는 것이 꿈이었던 석진은 기계상가 근처의 비어있는 창고에 공장을 세우려 했었는데,

일을 하느라 바빴던 석진은 건물만 인수하고 오랫동안 살피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윤이는 여주의 요청에 가라데, 유도 같은 체술과 사격을 이 곳에서 가르쳐줬다.

석진은 몸 쓰는 일을 하던 윤이가 그 곳에서 몸 푸는 정도의 운동을 하는 장소로 쓴다고 알고 있었다.

아마 윤이가 총기까지 소지하며 여주에게 사격을 가르친다고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여주는 윤이 가르쳐주는 것들을 배우며, 잠시 목적을 잊고 재미있다고도 생각했었지만, 다행히 둔한 감각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지는 못했다.

윤이에 대해 알아가던 여주는 윤이의 이야기를 각색하여 소설로 적기로 마음 먹었다.

여주가 동화가 아닌 장편 소설을 쓰겠다는 말에 출판사도 대환영했다.

여주 담당자는 킬러가 주인공인 것이 약간 의아했지만,

현실적이고 시니컬한 결말의 동화들도 종종 써오던 여주였기에, 출판사에서는 여주가 성인이 되어 어떤 글을 쓸지 큰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석진
너, 내가 이거 쓰면 안 된댔지..

석진은 소설을 반대했다.


석진
너 윤이가 무슨 일을 한 건지는 아니..?


유여주
알아.. 이야기도 많이 나눴고


유여주
윤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


석진
여주야.. 이 이야기는 세상에 나오면 안되.


유여주
안되. 이미 계약도 끝났는 걸..


유여주
윤이도 좋다고 했고...

대학을 올때 여주를 도와준 익명의 후원자가 사실 석진이라는 것을 그 무렵 알게 되면서 여주는 석진이 작품 쓰는 것을 무조건 지지해줄꺼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매우 자신 있게, 최종원고까지 다 완성하고 출판 직전의 가제본을 가져왔는데,

정말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여주는 너무나 당황했다.


석진
출판사에 위약금 물어주고, 지금이라도 중단해.

석진이 차갑게 말했다.

여주는 결국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여주는 보육원을 나와 자취집을 구하고 있었고, 보증금과 같이 큰 금액이 필요한 일이었기에 출판사와의 계약금은 여주에게 무척 중요한 돈이었다.

보호종료 아동들에게 나오는 보조금은 너무 적었고, 윤이처럼 가족도 아닌데 석진에게 지속적으로 도움을 받는 것도 여주는 내키질 않았다.

더불어 얼마 전, 석진에게 급작스럽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했던 여주는 홧김에 여주는 석진의 조언보다는 돈을 선택했다.

여주는 어쩔 수 없이 돈을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제는 석진과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무척 불안했다.

석진은 책이 출판되자 화가 나서 한동안 여주를 보지 않았고,

여주는 조금이라도 석진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미안한 마음을 메모에 담아 책을 전달하고

홀로 전전긍긍하였다.

이후, 석진이 우려한 대로 윤을 찾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여주는 윤이에게도 미안했지만, 무엇보다 석진에게 면목이 없었다.

석진이 나중에 오히려 괜찮다며 마음이 풀렸다고 말했지만,

여주의 마음 한 켠에는 석진을 좋아하던 마음과 미안함, 화남 등 여러가지 마음이 얽힌 덩어리가 남아있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해외에서 작품이 유명해질수록, 여주는 그토록 원했던 부가 생겼지만,

가족같다고 느꼈던 석진과 윤이에게서 멀어질 것 같은 불안함은 더 커졌만 갔다.

그리고 이런 불안함은 여주를 연약하게 만들었다.

오늘 내용은 전반부에 간간히 나왔던 회상씬 총 정리네요..!

여주의 진짜 그 후 이야기는 다음번에서...ㅎㅎㅎ

*모든 이야기는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 내 머릿속에 지진정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