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구름

기억의 조각

그렇게 다음날, 스케줄 때문에 일찍 나간 승관이 없는 집 안은 고요했다.

지연은 혼자서 조용히 거실을 어슬렁거리다가 문득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넓게 펼쳐진 도시의 거리, 빠르게 오가는 자동차들, 끝없이 늘어선 빌딩들.

너무도 낯익은 듯, 그러나 또 너무 낯선 풍경이었다.

그 속에서 무언가 실마리를 찾아보고 싶었지만—기억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김지연

"병원....."

무심결에 입 밖으로 나온 말.

수많은 건물들은 막힘없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병원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지연은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김지연

“...실마리를...”

평소에는 좀처럼 잠들지 못하던 그녀였지만, 이상하게도 이 낯선 공간에서는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따스한 이불 속, 서서히 눈꺼풀이 내려앉고— 깊은 잠이라는 감각이 찾아왔다.

***

김지연

“으아앗, 뭐야...!”

창밖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지연은 놀라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실로 나가보니 신발장에 어지럽게 놓인 운동화 한 켤레. 승관은 이미 돌아온 모양이었다.

지연은 반사적으로 그의 신발을 정리하고, 닫혀 있는 방문 앞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김지연

“...주무시려나. 고생 많으셨을 텐데.”

뭔가 보답을 하고싶은데 보답도 못하고, 문 앞에서 안절부절 거리는 지연.

일단은 자는 것 같아서 돌아서려던 때 문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거운 발걸음.

그녀가 당황해 뒷걸음치려는 순간—문이 덜컥 열리며 승관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듯 나타났다.

승관 image

승관

“...하아... 물...”

김지연

“앗! 괜찮으세요?!”

거의 탈진한 듯한 얼굴. 승관은 지연을 보자 어색하게 피하려다 그대로 그녀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쓰러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체온이 느껴졌다.

김지연

“...뜨거워...”

지연은 비틀거리는 승관의 몸을 겨우 지탱하며 침대로 데려갔다.

낯설지만 다급한 손길로 그를 눕히고 이불을 덮은 후, 주방으로 달려가 물과 상비약 상자를 들고 왔다.

김지연

“제발... 제발 괜찮아지세요...”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미세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지연은 물을 조심스레 입에 대려 했지만, 승관은 힘없이 손만 뻗었다가 이내 떨어뜨리고 말았다.

망설이다가 그의 몸을 부드럽게 일으켜 앉히자, 승관은 간신히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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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관

“...미안해요...”

탁자에있는 물을 들어 힘없이 몇번 꿀꺽하더니 사과하는 승관.

김지연

“아니에요... 어디가 그렇게 아프신 거예요?”

지연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물었고, 승관은 피식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승관 image

승관

“그냥... 좀 무리했나 봐요. 신나게 놀다가... 일까지 몰리니까...”

그러고선 겨우 말하더니 상비약을 꺼내 먹으며 힘겹게 눕는 승관.

그의 이마에 손을 얹으니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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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관

“지연씨, 나 신경 쓰지 말고 쉬어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승관은 이불을 당겨 몸을 웅크렸고, 숨결은 점점 깊어졌다.

지연은 승관이 준 핸드폰을 켜 ‘열이 날 때 대처법’을 급히 찾아봤다.

차가운 수건을 가져다 그의 이마 위에 올리고, 땀이 나면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자신이 뭔가 대단한걸 할 수 없기에 최대한 그가 심각해지지 않기를 바라며 밤새 그를 지켰다.

이불을 너무 걷어내는 것 같으면 적당히 덮을 수 있도록 다시 올려줬고,

차가운 수건을 올려 열이 내리는가 싶어 땀이 급작스레 나면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고, 지극정성으로 그를 간호했다.

그가 자기를 도와줬던 것처럼, 그가 자신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처럼.

체온계를 가져와 수시로 열을 체크했고, 그가 뒤척일 때마다 조심스레 이불을 정리해주었다.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듯, 밤새도록 그의 옆을 지켰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이 받은 따뜻함을 되돌리듯 정성을 다했다.

***

아침 7시 즈음. 창문 사이로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승관은 천천히 눈을 떴다.

말라버린 물수건이 이마에서 툭 떨어졌고, 그제야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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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관

“…지연씨?”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쉬어 있었지만, 몸은 확실히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어깨를 한 번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나와 주방 쪽으로 향하던 중, 코끝에 맛있는 냄새가 스쳤다.

조심스레 주방으로 향하니—그곳엔 지연이 있었다. 어설픈 칼질이지만 정성스러운 손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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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관

“…이게 다 뭐예요…?”

지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며 말했다.

김지연

“엇, 이제 괜찮으세요?!”

하지만 순간 놀란 지연이 손을 삐끗하며 칼이 손에서 미끄러졌고,

그녀의 새끼손가락 부근—무지구근을 살짝 스쳤다. 얇고 예민한 피부를 가로지르며 선명한 상처가 그어졌다.

김지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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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관

“괜찮아요?!!”

놀란 승관이 다가왔고, 지연은 상처난 손을 움켜쥐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익숙하지 않은 고통. 그 고통과 함께, 그녀의 눈 앞에 번져오는 낯선 풍경.

하얀 병실. 차가운 공기.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

김지연

‘…왜, 내가… 병원에?’

기억의 조각이, 갑작스럽게 파도처럼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