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DEN CARD: 히든 카드
ESPER: 초능력자 [05]


학교로 돌아가는 동안에는 말이 없었다. 주변을 1시간 동안 더 수색해 봤지만 또 다른 피해자는 없었고, 여주가 발견한 군인은 호석의 등에 업혔다.

호석은 여주의 뒤통수가 뚫릴 정도로 무섭게 째려봤고, 여주는 그런 호석을 무시했으며, 윤기는 둘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 어느 타이밍에 끼어들지 간을 보고 있었다.


정호석
"이제 좀 말해줄 때 되지 않았나?"

김여주
"……."


정호석
"아까 내가 본 건 뭐지? 소멸시키는 능력인 건가? 아니면… 상대방을 죽이는 능력?"

김여주
"그냥 능력 이름으로 말해요, 두루뭉실하게 말하지 말고."


정호석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능력들이랑 달라서 그렇지. 처음 봤어, 그런 거. 소멸이라면 가루 하나 남지 않아야 하는데, 그 자리에는 분명 가루가 남았어."

김여주
"하아……."


정호석
"죽였다고 하기에는 시체 하나 남지 않았잖아. 이걸 내가 뭐라고 정의해야 하는데?"


민윤기
"…너희 무슨 얘기하는 건데. 너희끼리만 알 거야?"

하아… 곤란했다. 곤란해도 너무 곤란했다. 무슨 얘기 중인지 모르는 윤기가 여기저기로 쪼아대니 신경이 더 날카로워졌다. 여주는 눈을 간지럽히는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김여주
"흡수."


정호석
"흡수…?"

김여주
"흡수예요. 등급마다 수분, 입자 등 제약이 있다지만 저는 뭐… 보다시피 없어요."


정호석
"……."

김여주
"말 그대로, 여기서 제가 마음만 먹으면……."

김여주
"전세계를 없앨 수도 있는 거죠."

무심하게 내뱉은 말은, 그야말로 어마무시했다. 흡수. 평소 남준을 따라 도서관을 많이 가 잡지식을 많이 아는 호석에게도 무척 생소한 능력이었다.

여주의 말은 들은 호석의 발걸음은 자리에 우뚝 멈췄고, 윤기 또한 여주의 능력을 듣고서 얼굴을 굳혔다. 북쪽에서 석진과 자잘한 업무를 하며 경험을 쌓은 윤기는 흡수 능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분명 200년 전에 있던 흡수 에스퍼가 마지막이었다고 했는데…. 무려 200년만에 다시 나타난 건가. 흡수 에스퍼.

김여주
"다른 분들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대놓고 떠벌리고 싶지는 않네요."

할 말을 마친 여주가 미련없이 호석과 윤기에게서 등을 돌렸다. 빠른 걸음은 아니었지만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바닥에 본드라도 붙인 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호석
"형… 몸에 있는 수분이랑 뼈를 구성하는 입자들을 다 흡수하면 어떻게 돼?"


민윤기
"뭘 어떻게 돼. 세상에 없던 것처럼 사라지겠지."


정호석
"…가루 같은 작은 물질이 남을 수도 있나?"


민윤기
"뭐…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 안에 있는 것들만 쏙 흡수하려 했다면 겉 입자들은 남겠지. 조절을 잘 못 했다면… 작은 물질이 남았을 수도 있겠네."


정호석
"……."


민윤기
"근데 그건 왜. 김여주 얘기야?"

정말… 김여주가 흡수 에스퍼구나. 호석은 귓가에 들리는 윤기의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하며 점점 멀어져 가는 여주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봤다.


먼저 학교로 돌아온 여주는 기숙사로 향하는 대신 여주만의 비밀 장소로 움직였다. 학교 풀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밤하늘이 예쁜 호수.

학교에서 자라는 자연을 가꿔주시는 분들이 가끔 이곳에 오기는 하지만, 지금 이 시간 대에는 아무도 없을 것을 알기에 무작정 호수로 갔다.

김여주
"……."


김석진
"어…. 안녕?"

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운수가 뭣같냐. 감추고 싶은 것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많은 사람들에게 내비춰진다.

꽤 오랜 시간 이곳에 있었는지 석진의 볼을 핑크빛으로 물들었고, 어색하게 여주에게 인사하며 자신의 옆을 톡톡 쳤다. 앉으라는 의미였다.


김석진
"여긴 어떻게 왔어?"

김여주
"…그건 제가 할 말인데요.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김석진
"주변 산책하다가 길 잃어서 여기까지 왔네. 혹시 너도 길 잃은 거야?"

김여주
"…아뇨."

신경이 예민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안 좋게 볼까 봐 눈을 돌려 오직 호수만 눈에 담았다.

여주가 말을 안 하니 석진 또한 말이 없었고, 그렇게 둘은 몇 분이나 조용히 호수만 바라봤다. 살살 불어오는 사람, 작게 흔들리는 풀, 은은한 달빛까지.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김석진
"기분이 안 좋나 보네."

김여주
"네. 보다시피요."


김석진
"아까 봤을 때보다 더 차가워진 것 같고."

김여주
"기분이 안 좋으니까요."


김석진
"그럼 내가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해 줄까?"

김여주
"아뇨. 괜찮아요."


김석진
"옛날옛적, 작은 마을에 사는 소년이 한 명 있었어–."

김여주
"……."

괜찮다니까…. 째려보는 여주의 눈초리에도 석진은 살풋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동화책을 읽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듣기 편안했다.


"엄마! 엄마! 나 천재인가 봐요! 사람들 속마음이 다 들려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얼른 손 씻고 부엌에 있는 사과 깍아먹어. 식탁에 올려놨어."

"아, 진짜라니까요?! 내가 엄마 속마음 한 번 읽어볼까요?!?"

아이는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마냥 두 팔을 번쩍번쩍 들며 기뻐했다. 마당에서 빨랫줄에 이불을 널던 어머니는 아이가 또 친구들과 이상한 놀이를 한다 생각하곤 이내 관심을 거두었다.

"아, 진짜라니까요?! 저 진짜로 엄마 속마음 읽을 수 있어요!!"

"알겠어요, 알겠어–. 엄마 아직 아무런 말도 안 했다?"

"응…? 방금 말한 거 아니었어요? 내가 친구들이랑 이상한 놀이를 한다고…."

아이의 말에 어머니는 잠시 멈칫했지만, 딱히 그것을 티내지 않았다. 그것은 추측만으로도 얼마든지 맞출 수 있는 터. 사람의 얼굴로 생각을 맞추는 자신의 아들이 조금 똑똑해졌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도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예요?!?! 우리 애는 한 마디도 안 했다는데, 왜 그쪽 아들이 저희 애한테 부모 욕하지 말라고 때린 건데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애 좀 잘 타일러보겠습,"

"아니야, 엄마…. 진짜로 명욱이가 우리 엄마 아빠 욕했다니까…? 잘못한 건 명욱이야!!! 사과하지 마!!"

"저, 저, 저!!! 쟤가 뭐라는 거니, 정말!!!"

아이가 평범한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걸 인지한 건 아이가 중학교 들어갔을 때였다. 그때만 해도 아이의 부모는 에스퍼라는 것에 무지했고, 그저 자신의 아들이 조금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이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며 달려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모는 아이의 말을 믿었지만 세상은 아이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입밖으로 내뱉지 않은 말은 현실적으로 실행된 것이 아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아이가 폭력성이 강하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특별한 능력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강해졌다. 굳이 보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누군가의 눈동자를 보고 명령을 내리면 그 사람은 언제나 아이의 말을 따랐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보니 아이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는 알고 보니 열등감에 빠져 일부러 친한 척을 하던 것이었고, 자신을 아는 척하던 아저씨도 알고 보니 젊었을 적 아이의 어머니를 짝사랑하던 남자였다.

아이의 앞에선 모든 것이 드러났고, 모든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이런 아이를 감싸줄 수 있었던 건, 오직 아이의 부모 뿐이었다.

"엄마… 아빠…. 나 머리가…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안 돼, 지금 정신 놓지 마!! 금방 도착해, 금방 도착하니까 조금만…."

아이의 부모는 머리를 끌어안은 채 괴로워하는 아이를 산속에 있는 한 성당에 데려갔고, 그곳에 있던 신부님은 아이를 보자마자 안타까워했다.

"그릇에 비해 너무나도 큰 능력을 가졌구나, 아이야…."

"능력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자세한 건 저보다 이쪽이 더 빠를 겁니다. 아, 참. 이 목걸이를 가져가세요. 아이의 목에 걸어주면 덜 고통스러워할 겁니다."

신부님은 아이의 부모에게 주소가 적힌 쪽지 한 장과 호박색의 빛을 띈 목걸이를 건넸다. 아이의 부모는 얼떨떨해 하면서도 감사하다며 그것들을 받았고, 곧장 쪽지에 적힌 주소로 향했다.



김석진
"그 쪽지에 적힌 주소는 사실 북쪽에 있는 특수 학교였어. 그래서 그 아이는 특수 학교에서 교육도 받고 능력도 조절하면서 행복하게 살게 됐지."

김여주
"……."


김석진
"어때. 참 아름다운 이야기지?"

석진이 해 주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여주가 몸을 일으켰다. 흙이 묻는 다리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는 여주의 눈에 석진의 목에 걸린 호박색 목걸이가 보였다.

김여주
"뭐가 아름다운 건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김석진
"왜?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의 따뜻한 마음과 삶을 헤쳐나가는 아이의 의지. 딱 교과서에 실릴 법 하지 않아?"

김여주
"아이가 얼마나 괴로워 했을지 어떻게 알아요. 매일 밤 원망했겠죠."

김여주
"처음에는 자신을 욕한 친구를, 다음에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그 다음에는 자신의 능력을, 또 그 다음에는 자신을 태어나게 한 부모를, 마지막에는…."

여주의 무심한 시선이 석진의 목걸이에서 석진의 눈동자로 향했다.

김여주
"엿같게 느껴지는 자신을."


김석진
"……."

여주를 바라보는 석진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숨을 멈춘 채 달빛을 받는 여주를 바라보니,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김여주
"그리고 누가 알아요. 그 아이가 행복하게 살지, 불행하게 살지."


김석진
"넌… 아이가 불행하게 살 거라고 생각해?"

김여주
"저야 모르죠. 엔딩은 주인공이 정하는 거니까."

김여주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은 제가 아니라, 그 아이잖아요?"

이만 들어가서 자야겠다며 여주는 석진에게 내일 보자는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석진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그때, 잠시 멈춰 말문을 열었다.

김여주
"아. 그 아이에게 전해주세요."

김여주
"해피엔딩이길 바란다고."

그 말을 끝으로 여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숙사로 향했다. 혼자 있고 싶어할 석진을 배려한 것이었다.

여주가 들어가고도 몇 분이 지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석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자신의 옆자리를 바라봤다. 여주는 없는데, 여주가 있는 것 같았다.

"……."

"달이… 예쁘네."

오늘따라 유난히, 달빛이 마음에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