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조선에서 왔어요, 도련님
29 | 과제 메이트(?)



[나는야 망개]


어쨌든 간에 그림을 그려주겠다 한 건 여주가 맞지만, 이 사태를 만든 최초의 원인 제공자는 정국인걸.

자기가 벌려놓은 일을 해결하지 못해 눈물을 훔치는 여주를 보고 있자니... 괜히 죄책감이 들지.



전정국
어··· 울지 마요.


전정국
여주 씨가 울면... 내가 더 곤란해져요

설여주
도련님이··· 곤란해지시면 안 되지요...

언제 울었냐는 듯, 정국의 한 마디에 눈물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주.

걸레를 다시 들고서 먹물 자국을 있는 힘껏 문질러본다.

뒤에서 잠깐 지켜보던 정국이가 여주가 들고 있는 걸레를 가져가면, 여주는 지금 뭐 하냐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전정국
이걸로는... 안 지워질걸요?

걸레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이제는 위아래로 길쭉한 플라스틱 통 하나를 가지고 온다.

설여주
그것은 무엇입니까_


전정국
아세톤이라고, 있는데_ 지워질지는 모르겠다.

가끔가다 제 엄마가 손톱과 발톱을 만지작거리며 네일을 지우는 것을 봐온 정국이가 생각해낸 건 아세톤.

솜 몇 개에다가 충분히 적시고서 바닥을 문지르면_

설여주
오···!


전정국
어느 정도는 지워지는 것 같죠?

뚜렷하게 보이는 변화에, 토끼 눈이 된 여주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다.

이제야 미소가 띠워지는 여주의 얼굴을 확인한 정국이가 심호흡 한 번 하고 팔이 안 보일 속도로 문질 문질 닦아낸 후에야 완전히 사라진 물감 자국.


전정국
다 했다_

설여주
···도련님, 그치만

눈앞에 펼쳐진 다른 자국들에 손짓하는 여주.

설여주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설여주
심지어 먹물은···

아세톤 묻힌 솜으로 벽지를 닦아봐도, 끄떡없는 자국.

설여주
효과도 없는 걸요···.


전정국
벽에 있는 자국들은··· 내가 다 계획이 있어요ㅎ

설여주
네?


전정국
우선···!


전정국
바닥에 있는 자국들 먼저 없애야겠는데-.

설여주
···그러지요! 소녀도 돕겠습니다!


전정국
아, 그럴 필요 없어요. 이건 나 혼자 다 해요-.


전정국
그동안 그림 보고 있어요, 어제 못 보고 잠들었던.

설여주
그림···?

설여주
그림···.

설여주
그림···!

그제서야 어젯밤을 지새워 정국이 그렸던 자신의 그림이 생각난 여주가, 들뜬 마음으로 어디 있냐며 발을 동동 구른다.


전정국
소파 밑에-.

해맑은 표정으로 뒤집힌 도화지를 든 여주는, 그림을 봄과 동시에 한 손으로 입을 가리지.

설여주
헙···.

설여주
이것이 정녕 도련님께서 그린 것이옵니까···?


전정국
잘 그렸죠?ㅎ

설여주
···ㅎ

설여주
소녀와 똑 닮았습니다!

그 이후로 연이어 쏟아진 과찬에, 정국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 정도는 아닌데. 홀로 중얼거리고.

물론 정국은 스스로 자신의 실력을 과소평가한 것. 누가 봐도 사진 뺨치는 퀄리티의 그림이었지.

한 마디로 어젯밤 노동으로 인한 피로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전정국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네요.

설여주
잘 간직하고 있겠습니다-ㅎ

그런 결과물을 받아든 여주는 신나서 입꼬리가 승천 중이고.




전정국
아윽···.

곡소리와 함께 대충 흔적만 지운 정국이가 솜을 모조리 종량제 봉투에 집어넣더니, 이제는 벽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

어제 쓰고 정리는 안 했던 붓을 들고서.

설여주
무슨··· 계획이십니까?

소파에서 여전히 정국의 그림에 빠져있던 여주는, 정국이가 걸음을 옮기자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지.


전정국
그렇게 큰 자국은 없으니까_ 덮어버리려고요.

설여주
네···?


전정국
뭐가 좋을까요, 꽃... 아니면 풀?

설여주
···도련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 어어?!

여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국이 쥐고 있던 먹물 묻은 붓의 끝이 벽에 닿자, 기겁하는 여주.

설여주
도련님···?!

설여주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한껏 격양된 자신의 목소리임에도, 미소만 띠며 과감하게 무언가를 그려나가는 정국의 손놀림에 여주는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입을 크게 벌린다.

설여주
···어라?


전정국
어때요, 이 정도면 심플하고 괜찮은 것 같은데.

아이보리빛 벽지 위에 그려진 검은 선들. 그리고 그 선들이 모여 이룬 적당한 크기의 꽃.

설여주
심···플?


전정국
아, 간-단하다는 거죠.

설여주
아하-.

설여주
···헌데, 도련님 가족분이 좋아하실까요...


전정국
음ㅎ 그건 장담 못 하지만,


전정국
좋아하시게 만들어···야죠?

자신의 말에 자신도 믿음이 없다는 듯 쿡쿡 웃음을 자아내는 정국.

마무리까지 끝낸 그가 더 손댈 부분이 없는지 확인한 후에야 도구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지켜만 보고 있던 여주도 옆에서 정국을 도운 건 물론이고.





전정국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몸 고생 풀코스네-.

몸이 제법 뻐근한지, 계속해서 목을 툭툭 쳐보기도 하고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주물러도 보는 정국.

설여주
소녀가 좀 도와드릴까요?


전정국
아, 괜찮아요-.


전정국
내가 해도 어느 정도는 다 풀려ㅇ,

제가 손이 매워서, 시원하실 겁니다.라며 정국의 의사는 애초에 들을 생각이 없었던 여주가 정국의 양쪽 어깨를 주물러준다.

설여주
히익- 근육이 많이 뭉쳤습니다!


전정국
아···ㅎ 괜찮다니까...


설여주
시원합니까, 도련님?

설여주
제가 어디 가서 이 안마로는 밀리지 않거든요ㅎ


전정국
그럴 것 같네요, 시원하다.

그렇게 잘만 달달한 시간 보낼 것 같던 두 사람에게···


띡_띡_띡_띡-)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

설여주
···?!?!??

동시에 놀란 두 사람. 소파에 앉아있던 정국은 급기야 굴러서 바닥으로 착지. 여주는 그 자리에서 얼음.


철컥-)


전정국
···?!

누구보다 빠른 순발력으로 현관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민 정국이가 손님의 정체를 확인한다.


전정국
···엄마?!?

설여주
?!?!!

휘익, 소파 위에 있던 정국의 그림을 소파 밑으로 대충 던진 여주가 두 눈만 깜빡거리며 얼어있다.

이수민
뭐야, 왜 그렇게 놀래-.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던 수민은 엄마 오니까 싫냐며 질문했지만, 돌아오는 거라곤 정국의 황당해하는 표정뿐.

그렇게 정국이가 아무 말 못 하고 여주 판박이처럼 얼어붙어있으면··· 수민은 점차 거실로 다가왔고


그렇게 마침내 수민의 가벼운 발걸음이 거실에 닿았을 때.

설여주
······.

여주와 정확히 아·이·콘·택·트.


그 사이에 끼인 정국은··· 헙. 손으로 입 틀어막는 중.

그렇게 3초가량 3분 같았던 아이 콘택트가 끝나고 나서··· 먼저 입을 연 쪽은 수민.


이수민
어~ 친구랑 같이 있었네? 과제 하고 있던 중이야?


세이-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