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구원 혹은 딜레마

***

여주와 지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정한은 손님을 쫓아내지 못 했는지 구시렁거리며 초인종 소리의 주인과 함께 다가온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그들이 오면서 어색한 침묵이 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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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그냥 혈팩만 놓고 가지, 왜 들어오고 난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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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

손님한테 차 한 잔 대접도 못 해 줘요? 너무 야박하네~

아무래도 그는 혈팩을 파는 장사꾼인지 양손 가득 혈팩이 든 가방을 들고 어슬렁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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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

안 온 사이에 가구 위치가 좀 바꼈네?

민규는 혈팩이 든 가방을 내려놓고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서 껄렁대며 집안을 훑는다.

정한은 몇 번이고 본 사이임에도, 전에 본 행동임에도 여전히 민규의 이 모든 시선들이 불쾌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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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

어?

주변을 둘러보던 민규는 드디어 여주를 발견했는지 흥미롭다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어느새 옆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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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

이 사람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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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

형이 집안에 사람을 들이는 건 처음 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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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

혹시 애인?

민규의 얼굴에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서린다.

이여주

그런 거 아닙니다.

단호하고 차갑게 대답하는 여주에 민규의 호기심은 더욱 자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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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

너 되게 매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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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

피맛은 어떨지 궁금한데?

민규의 눈이 핏빛으로 물들어간다.

얘도 뱀파이어구나 싶어 여주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다.

뱀파이어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곳이라는 걸 이제서야 깨달은 여주는 갑작스런 공포심이 몰려온다.

이들은 정말로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저 뱀파이어는 정말 계약서에 써진 대로 나의 안전을 보장할까?

의구심만이 돋아날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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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야, 김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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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선 넘지 마.

정한의 말에는 살기와 냉혹함이 감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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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

뭐야, 그냥 장난친 것뿐인데~

핏빛이던 그의 눈동자가 본래의 색을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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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

장난도 못 치게 하네~ 아, 재미없어.

호기심을 머금은 그의 얼굴이 심드렁하게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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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인간들한테는 장난 아니고 위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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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

네, 네~

민규는 듣는 둥 마는 둥 그의 말에 대충 대답하곤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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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

그럼 위협적인 전 이만 가 볼게요~

뒤끝이 센 건지 장난기가 많은 건지 그는 비아냥대듯 말하며 나간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듯 이곳에 남아있는 모두 기가 빨린 느낌이다.

여주는 오늘 하루 내내 쫓기고 웬 이상한 뱀파이어까지 상대하니 피곤한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기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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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피곤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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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앞으로 아가씨가 지낼 방으로 안내해 줄 테니까 거기서 푹 쉬어.

여주는 이제 더 이상 대꾸할 힘도 없어 고개만 옅게 끄덕이곤 정한을 따라나선다.

***

***

들어서자마자 여주는 생각보다 근사하고 넓은 방에 놀란다.

이여주

이런… 곳에서 제가 지내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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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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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그럼 뭐 창고같은 데로 안내해 줄 줄 알았어?

이여주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정한은 또 다시 냉혹함을 유지하던 표정을 무너뜨리며 달콤하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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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내가 데려왔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이여주

그건 그렇네요.

여주는 폭신한 침대에 조심히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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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원래 그렇게 앉을 때 조심하게 앉아?

이여주

아직도 이 모든 게 실감이 안 나고…

이여주

그리고 전 아직도 그쪽을 의심하고 있거든요.

잠시 짧은 정적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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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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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계속 의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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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너무 믿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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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그깟 종잇조각 계약서는 찢어놓고 우기면 그만이니까.

여주는 그의 말에 섬뜩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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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쉬어.

정한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피식 웃으며 쉬라는 말을 툭 내던지곤 그대로 방을 나간다.

이제 이 방에는 여주 혼자뿐이다.

바로 옆에는 창문이 있고,

이곳은 1층이다.

지금이라도 금방 저 창문을 열고 나간다면 달아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주는 내키지 않았다.

나가봤자 여주를 기다리는 가족과 친구 따윈 없으니까.

그녀는 차라리 이곳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이여주

기구한 인생……

혼자 중얼거리며 침대에 눕고는 무거워진 눈꺼풀에 눈을 감는다.

사실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은 꿈이었길.

눈을 뜨고 일어나면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와 산뜻하게 나의 이름을 부르며 나의 단잠을 깨워주는 어머니가 있길.

누구보다 다정하고 가정을 잘 챙기는 성실한 아버지가 있길.

여주는 희망해 본다.

언제나.

잠에 들 때마다.

그러나 하늘은 여주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지 무심하게도 그녀의 희망은 짓밟고 악몽만을 안겨준다.

현실만큼이나 기구한 그녀의 꿈.

매번 누군가에게 쫓기다 죽음을 맞이하는 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악몽을 꿈에도 여주는 멘탈이 워낙 강한 건지 잠에 드는 걸 마다하질 않는다.

현실도 마찬가지라 악몽에 무뎌진 걸까.

그래도 이번에는 하늘이 그녀의 편을 들어준 것인지 악몽 끝에 구원의 빛을 안겨준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쫓기다 한 남자에게 구해지는 꿈.

구원인지 구렁텅이로 더 빠지는 것인지 모를 찝찝함이 들지만 이번에 여주는 죽지 않았다.

여주는 꿈에서도 생각한다.

죽지 않은 게 어디인가.

다행이다.

여주는 환한 빛이 자신의 눈을 내리쬐고 있는 걸 느끼곤 눈을 뜬다.

이여주

…아침인가.

비몽사몽한 상태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곤 창밖을 바라본다.

이여주

이런 불운한 인생을 살면서도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끼다니.

이여주

게다가 꿈에서까지……

여주는 자신이 미련하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