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관전중
조용한 세상이 잔뜩 소란해질 걸



전정국
날 싫어하는 사람들도 존나 떼거지인데, 너라고 없을까.


한예화
그게 무슨 뜻이야?

위로랍시고 건넨 말인 것 같기는 하다. 표정도 분명 쑥스러워하는 것 같고... 그런데 말이지.

뭐, 나도 내가 꼬인 인간이란 건 알고 있지만 아무리 들어도 저건 빈정거림으로 들린다니까! 너 싫어하는 사람 떼거지, 어쩌라고! 얼굴도 존나 잘생긴 게!


전정국
칭찬이 왜 그따위야.

저기요, 안 읽으신다믄서요.


전정국
너무 시끄럽게 생각하잖아. 읽으려고 안 해도 들려.


한예화
대체 얼마나 마법을 쌓아놓고 사는 거야.

전정국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제 왼편으로 떨구는 게 보였다. 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다. 생각도 정리할 겸, 이왕 올라온 김에 유티를 좀 굽어살피어볼 겸.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감정이 여러 곳에서 쏟아졌다. 혀에서도, 뇌에서도, 심장에서도. 각기 다른 분위기의 감정들이 튀어나와서 정신을 어지럽혔다.

난 걔를 좋아해. 아니야, 좋아하지 않아. 이건 내가 악녀여서 그래. 이건 내가 악녀니까 하등 느껴야 할 감정이야.

그렇게 최면을 걸면서도 한편으로는 악녀 한예화였다면 절대 겪지 못 했을 고민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만들어 낸 그 아이를 정말 좋아한다. 정말...

참내, 000. 박지민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면 완전 거품 물고 쓰러지겠다!

좀 잘생겼다고 이렇게 쉽게 넘어가면 앞으로 한예화의 인생은 또 어떻게 살려고... 말세여 말세.


전정국
아니야.


한예화
엥?

생각에 깊게 빠져서 주변을 신경도 안 쓰고 있는데 전정국이 갑자기 툭, 말을 던지듯 한다. 그것도 내가 의미를 형언할 수 없는 한 마디뿐인 말이다.

게다가 의미 전달도 아니고 대답. 아니, 내가 뭘 질문을 했어야 대답을 하는 거 아니니? 내 생각 읽었나?

쓰읍... 아닌데, 나 머릿속으로도 질문은 안 했는데.


한예화
이렇게 뜬금없이?


전정국
싫어하는 거, 아니라고.


한예화
아.

허허, 거 녀석 참. 대답 한 번 더럽게 느리게 하네.

문장까지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정신을 차리자. 말했잖아. 쟤는 소설의 남주인공이라니까. 설레는 게 당연하지 그럼.

아, 전정국한테 뺨이라도 쳐달라고 하고 싶다. 난 지금 진지하게 그에게 들리기를 원하고 있다. 진짜 미쳤네.

네가 싫어하지 않고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어쩜, 역시 관종이라 스토리에서 빠지기 싫은가 봐, 진짜... 으윽, 한예화 존나 제정신 아니네!


한예화
그래, 너 같은 사아기캐 님께서 나를 미워하지 않으신다니 참 불행 중 다행이다 야.

안쓰럽게도 그때의 나는 간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전정국
보태서, 내 기억이 맞다면.

어쩌면 내가 지금 너에게 설레는 거라고 네가 못을 박아줄 수 있어, 전정국.

그럼 나는 계획을 틀어서 유토피아에서 나간다는 결심을 하지 않는 거야, 하는 말들로 희망고문을 하면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기를 바랐다.


전정국
김태형이 좋아하는 것 같던데.

괜한 사람들까지 붙들어가면서.


전정국
선택권을 줄게.


전정국
김태형이랑 사귀기 싫을 때, 여기서 부르면 널 데리고 유리 섬으로 가줄 테니까.



전정국
그때는 날 만나.

하지만 원하던 말을 들은 후에는 목이 메도록 아팠다.

김태형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이해했을 때도 나와 박지민이 수없이 다쳤는데, 전정국은 또 얼마나 심할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들에 파묻혀 있다가 끔찍한 마음이 들어 그만 인사도 없이 옥상에서 계단을 타고 빠르게 뛰어내려왔다.

내 기숙사 방문 앞에 서서야 겨우 숨이란 숨을 다 몰아쉴 수 있었다.

한없이 억울했다. 난 왜 괜히 여주인공이 되면 다치는 세계로 들어와서, 여주인공이 사건 사고의 중심이 되는 세계로 들어와서.

더 억울한 것은 그 세계를 만든 사람이 나였다는 점이다.

하안예에화아. 정신 차리고 여태까지 벌어진 이... 이 거사를 정리해보자고.

나는 아까부터 줄곧 굳어있던 양뺨을 찹찹 때리고 슬슬 털이 다 너덜너덜해진 깃펜을 쥐었다. 아이쿠, 새 걸로 준비해야겠는데.

스프링 노트를 대충 편 후에 꼭대기 부분에 큼직하게 '현재 상황' 이라고 적었다.


한예화
우선 박지민은 집착이 조금 가라앉은 상태.

나는 여태까지 내 학교 탈출에 관해 있었던 일들을 모두 종이에 휘갈겨 썼다. 싸움부터 동맹까지,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정리해 놓으니 아주 깔끔했다.

후후, 여억시 한예화. 쫌 하는데? 하긴, 그때 다른 글들도 포함해서 칠십 몇 화를 꾸준히 연재했던 내 실력은 녹슬지 않지.


한예화
일단 동맹은 조지안이고, 계획은...

그렇게 침대 매트리스에 온 체중을 싣고 긴 시간을 적어내려갔을까, 어느 순간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내 계획이 완벽하게 무너지는 꿈을 꿨다.


한예화
옘병 육시럴. 아니 어쩜 꿈도 이따위로 꿔? 재수가 없으려니까 정말...

교복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물론 양아치처럼 보일 만큼 충분히 대충이었지만, 기숙사 바깥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일단 누구라도 보이면 내 현란한 말솜씨로 싸워서 벌점을 받을 생각이었다.


한예화
근데 형이 여기서 나올 줄은 나도 몰랐지.


김석진
힉! ... 뭐야, 너 왜 수업 안 듣고 여기 있어?


한예화
아니 너 왜 수, 뭐여. 왜 내 말 인터셉트하세요?


김석진
사람이 나무 사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는데 이거 말고 무슨 말을 더 해!

숲길에는, 대단히 놀랍게도, 대한민국 메이트가 있었다. 아, 심장. 갑자기 빛이 튀어나오길래 기겁했네 진짜로.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다가 문득, 김석진은 강다다와 카프카프 친구들이 헛소문을 퍼트리는 데에 큰 부분을 도왔었다는 게 기억이 났다.

아니 얘는 대체 뭐가 좋다고 나를 물고 뜯고 하는 거지?


한예화
야. 기다려 봐, 나 너한테 물어볼 거 있어.


김석진
... 뭔데?

김석진이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눈을 피했다.

이 반응은 지도 뭔가 켕기는 게 있고, 나쁜 일을 했다는 걸 알 때만 나올 수 있는 반응인데 말이지. 아니, 근데 진짜 왜 그런 거지?


한예화
너 내가 다른 대륙으로 갈 예정이라는 거, 강다다한테 왜 말해줬어?


한예화
걔가 내 대가리도 깬 거 알잖아.

김석진은 한참을 입술만 오물거리고 있었다. 윽, 귀엽다.

하, 시방 존잘 아이돌 포스터가 길거리에 마구 붙어있는 한국이랑 다를 게 뭐냐. 여기도 사방팔방이 존잘들인데. 나도 같은 한국 출신자랑 싸우고 싶지 않다고!



김석진
그건 나도 묻고 싶어. 왜 나가는데?


한예화
... 허어?

이 자식이 지금 거울 전법을 써? 초딩들도 요즘은 유치해서 안 쓴다, 이놈아!

나는 턱도 채 닫지 못하고 연신 개나발을 지껄이는 김석진의 영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김석진
나가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대? 난 네가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여기에서 나가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


한예화
지금 그래서 강다다한테 알려준 거라고? 날 못 나가게 하려고?


김석진
... ...


한예화
... 헐, 진심이야?

참내, 니랑 김태형이랑 도대체 다른 게 뭐냐!

마침 바로 어제 김태형이랑 싸우, 음, 싸우고 나온 차라 똑같은 행동을 하는 김석진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몹시 별로다. 얘는 대체 왜 그런 망발을 벌인 거지? 뭐 때문에?


김석진
네 몸은, 원래 여기 있던 거지?

문득 김석진이 내 생각 가운데에 끼어들어 말을 건다. 내용은 상당히 추상적인 것이다.

원래? 이 뭔 개애... 소리지? 그러니까, 원래 소설의 등장인물이었다는 뜻이겠지, 대충 뭐.


한예화
맞아.


김석진
난 아니야.


한예화
...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김석진의 고개가 옆으로 떨어진다. 갸우뚱,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 같은 행동이다.

난 저랬다가 귀여운 척 하지 말라고 김선빈한테 맞았었는데... 하, 귀여운 사람이 하면 느낌이 이렇게나 다르구나.

그래도 신체적, ... 크흠. 이건 어감이 좀 이상하네. 시각적으로나마 질문을 들었으니까 대답은 해 줘야겠지 싶어 말문을 뗐다.


한예화
내가 만들었거든.


김석진
뭐...?

다 안다, 허허. 이해가 안 되지? 시발 나도 처음 떨어졌을 땐 그랬어. 중 삼이 대강 끄적여놓은 마법 세계가 있을 줄이야. 허허.

누가 들으면 중이병인 줄 안다니까.


한예화
이곳을 내가 만들었다고.


한예화
근데... 얘네의 과거까지는 만든 기억이 없어. 그래서 내가 처음에 박지민이랑 부딪히고, 정호석한테 찾아가고. 별 짓을 다 한 거야.


김석진
그러니까, 지금, 니가 여기를. 그렸거나. 썼거나.


김석진
... 했다는 거지?

김석진은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뜬다.

아니 나도 신기한 건 물론 알지만, 이게 막 그렇게까지 익스트림하게 놀랄 일인가...? 누가 보면 예나가 선정이 딸인 줄. 눈 봐, 미친.


한예화
정확히는 썼지.


한예화
하지만 내 글에는 네 존재 자체가 없어, 아예. 그러니까 난 널 만든 적이 없지.


한예화
나머지 애들은 전부 엑스트라인데... 왜 너만 처음부터 엑스트라가 아니었을까 하고 신기했어.


김석진
하하.

... 웃어? 이 파워 시크 악녀 한예화가 지금 오오랜만에 진지한 얘기를 하는데 이 새끼가 웃어?


김석진
하하하하...


한예화
아니, 이게 재밌냐?



김석진
민윤기가 했던 말이 다 맞네.

맞다 얘 민윤기랑 친구였지. 그것도 내가 안 적었다고 말해줄 걸.


김석진
넌 이여주를 망쳐놓고 도망치려는 거지?


한예화
음, 이해를 잘 했느에에... 아니 뭐라고?!

김석진은 그 말 이후 나를 비웃듯이 쳐다보고, 리플럽 쪽으로 향했다. 나는 차마 뭔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예화
별 씨발!

가면서 이 도도하고 찰진 욕이나 들으라지. 강다다랑 놀러다니니까 애가 변했네, 변했어. 에이. 퉤. 더러웡.

정신이 너무 불안했다. 악역으로 살아도 조연으로 살아도 힘들구나. 역시 여주의 자리가... 참, 나 무진장 다쳤지.


한예화
왜 인소 여주들은 다 운이 더럽게 안 좋은 거야, 이씨.

기분이 너무 들쑥날쑥하다 진짜. 이 정도면 롤러코스터도 한 수 접겠네... 에라, 개같은 강다다.


한예화
... 개같은 김석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