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놀러 하민이의 방문을 열었다가 멈칫했다. 왜 이리 지저분한 거야. 놀려댈 생각에 입을 열었는데, 순간 목에 뭐가 낀 듯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방 안에 어질러진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유하민, 뭐 해?”
바닥에 앉아 있던 하민이가 짧게 대답했다.
“짐 싸.”
자세히 보니 그냥 어질러져 있는 게 아니었다. 하민이는 옷을 차곡차곡 개고 있었고, 지저분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정체는 두 개의 캐리어와 작은 상자들이었다.
짐이라니?
하민이는 개던 옷을 내려놓고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 눈은 꼭 왜 모르는 척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하민이가 우리 집에서 잠시 머무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학교에 적응하고 지낼 곳이 정해질 때까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언제 나가는데?”
“내일.”
언젠가는 나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까맣게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일이 그 언젠가가 된 줄도 몰랐다. 내일?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나는 주먹에 힘을 주고 있는 힘껏 하민이를 째려봤다.
“나 처음 듣는데.”
“뭐, 그야 나가도 매일 만날 거고.”
그게 뭐야.
그래도 여자친구한테 이런 건 말해줘야 정상 아니야? 매일 보는 것과 같이 사는 건 정말 천지 차이인데. 방을 박차고 나가서 화났다는 티라도 내볼까 싶었다. 하지만 그대로 나가버리는 것도 괘씸했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잠갔다. 하민이는 등을 보인 채 다시 옷을 접느라 내가 문을 잠근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넌 내가 누나 같지가 않지?”
“뭐?”
나는 한 발짝씩 하민이에게 다가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하민이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자 그대로 박치기하듯 입술을 부딪쳤다.
“읏, 아니. 누나, 뭐 하는…….”
충동적으로 시작된 입술 박치기였다. 나를 떼어내려는 손길과 말투에 나는 한 번 더 핀트가 나가버렸다.
감히 키스 중에 말을 해? 나는 틈을 노려 하민의 입 안에 혀를 욱여넣었다. 키스는 늘 하민이 리드해줘서 어떻게 하는 지 모르겠지만, 속에서 끓던 분노를 쏟아내듯 몇 번이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짜증 나. 나만 안 떨어지고 싶은 거냐고!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서러워졌다. 하민이는 당황한 듯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눈을 살짝 떠보니 역시나 눈도 감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짜증 나는 놈!
나는 그대로 하민이의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아!”
하민이가 짧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뺐다. 입술이 떨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한 손으로 하민이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나만…….”
목소리가 제멋대로 떨렸다. 아, 울먹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나만 떨어지기…….”
고개를 툭 떨구곤 나만 떨어지기 싫은 거냐고 물으려던 순간, 몸이 붕 떠올랐다.
깨물린 입술이 아픈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하민이가 다른 팔로 내 허리를 받쳐 안아 들었다. 그대로 몸이 침대 위로 던져졌다. 등 뒤로 푹신한 매트리스가 닿으며 시야가 뒤집혔다. 그리고 눈앞이 순식간에 하민이로 가득 찼다.
“뭐, 뭐야.”
놀라 몸을 일으키려는데 하민이가 내 양옆으로 팔을 짚었다. 아까까지 짐을 챙기던 무심한 얼굴은 사라지고, 나를 내려다보는 눈이 느릿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누나.”
“왜.”
“이럴 땐 밀어내야지.”
“…….”
“낯선 남자 방에 들어와선 말이야. 무방비하게.”
하민이의 손이 내 허리를 쓸었다. 간지러움과 함께 찌르르, 어떤 것이 느껴졌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긴장으로 온몸이 굳었다. 얼굴에 열이 확 올라왔다.
그렇지만 지금은 절대 지고 싶지 않아.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두 팔을 들어 하민이의 목 뒤로 둘렀다.
되려 하민이의 눈이 커졌다.
늘 나를 당황하게 만들던 애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조금 통쾌했다.
“왜.”
“…….”
“싫어. 안 밀어낼 건데.”
목 뒤에 두른 팔에 힘을 주자 하민이의 몸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할 것처럼 굴더니, 막상 내가 끌어안으니 당황한 모양이었다. 귀 끝이 점점 빨개지는 게 보였다. 흥, 별 것도 아닌게.
하민이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굳어 있는 어깨가 한숨에 잠시 들썩였다. 잠시간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쪽.
입술이 내 이마에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뭐야.”
“뭐가.”
“그게 끝이야?”
하민이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아쉬워하지 마.”
“누가 아쉽대?”
괜히 팔을 풀고 상체를 일으키려 했지만 하민이가 먼저 내 허리를 감쌌다. 내 다리가 자기 허리를 감싸도록 끌어당겼다. 아니, 이 자세 이상한데 …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야!”
나는 놀라서 하민이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하민이는 나를 안은 채 아무렇지 않게 일어섰다. 나는 두 팔로 목을 감고, 두 다리로 허리를 붙잡은 채 하민이에게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되었다.
완전 매미잖아!
하민이의 손이 내 등을 느리게 토닥였다.
토닥.
토닥.
“야, 내가 애냐? 네가 연하잖아!”
“그래그래.”
“뭐가 그래그래야!”
“가지 말라고 칭얼거리길래 애인 줄 알았네.”
“내가 언제 칭얼거렸어!”
나는 씩씩거리다, 이내 민망해서 하민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하민이는 계속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려줬다.
이렇게 붙어 있으니 조금 전까지 답답했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단단한 팔도, 익숙한 체온도 그대로였다. 같은 집에서 지내지 않는다고 해서 하민이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
“…….”
“곧 같이 살 테니까.”
나는 하민이의 어깨에서 얼굴을 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싶은 얼굴로 하민을 쳐다봤다. 하민이는 꽤 즐거워보이는 모습으로 날 내려다보고있었다.
“뭐?”
“나 졸업하면 바로 결혼해버릴까.”
“…….”
“원하는 대로 청혼해줄게.”
“그렇게 혼자 정해도 돼?”
“싫어?”
“아니.”
대답이 너무 빨랐다. 민망해서 다시 하민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하민은 피식 웃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나는 하민의 어깨에 입을 묻은 채로 웅얼거렸다.
“대신 내일 나가도 매일 와.”
“응.”
“하루라도 빠지면 결혼 안 해.”
하민이가 작게 웃었다.
“매일 올게.”
나는 하민이의 목을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누가 더 떨어지기 싫은지는 이제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FIN
짧게 써보려고했는데 생각보다 길어진 것 같은...!! 재밌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ㅠㅠ 더 써볼까 했는데 제 아이디어는 여기까지였습니다...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