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시즌2)
111화. 정아의 그늘

sophie97
2026.10.21Vues 36
"요즘엔 좀 어떠세요?"
"벌써... 6개월이나 지났네요...
잠을 깰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요.
그녀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그러다 문득 깨달아요.
이제는 그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걸요.
그리고 다시, 잔인한 현실로 돌아와요."
"약은 잘 챙겨 드시고 잠은 좀 주무세요?"
"계속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도
못 한 채 잠들고,
눈을 뜨면... 잠깐씩 생각해요.
지금이 현실인지...꿈인지..."
"낮에는 어떻게 지내세요?"
"거의 집 안에만 있어요.
음악 듣고, 책 읽고... 영화도 가끔씩 보구요.
대부분 혼자 있어요.
그러다가 밤이 되면 가끔 차를 몰고
그녀와 함께 갔던 곳을 찾아가요."
"억지로 하실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친구나 가족들을
좀 만나 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가족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친구는... 제가 원래도 친구들한테
속 이야기를 잘 하는 편이 아니라서요."
"그럼 정아 씨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 보는 건 어떨까요?"
"그게 도움이 될까요?
더 슬퍼질까 봐 겁이 납니다."
"함께 추억을 이야기하고,
기억을 나누면서 조금씩 받아들여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네... 선생님.
그럼 그렇게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아직도 자신 때문에
여자 친구가 대신 죽었다는 생각이 드세요?"
"대신은 아니지만...
제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그렇게 죽을 일은 없었을 거에요."
"여자 친구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텐데...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건 훈지 씨가 겪은 것처럼
또 하나의 사고였어요.
이식 수술을 한다고 해서
모두가 죽는 건 아니니까요."
"그녀가 이렇게 된 게 다 제 탓 같아요.
그녀가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라고 했을 때
그렇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러면 나도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테고,
그녀도 지금 내 곁에 있을텐데...
우리 가족이 그녀를 말렸더라면 어땠을까..."
"가족이 말렸더라면
정아 씨가 수술을 받지 않았을까요?"
"... 아니요... 정아 씨는 그래도 했겠죠.
저를 살리고 싶었을 테니까요."
"그녀가 억지로 수술대에 올랐을까요?"
"아니요.
편지에도 본인이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했어요."
"네... 그랬을 거에요.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상담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녀도 나와 같은 하늘을 보고 있을까?
나도 모르게 그녀의 아파트로 향했다.
그녀의 집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저... 혹시 이 집을 파실 생각 없으세요?"
"네? 누구세요?"
"이 집에서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요."
"잠시만요."
잠시 후,
집 안에서 누군가 나와 현관문을 열었다.
"저희가 이사 오기 전에
이 집 주인분의 동생이 살았다고 들었는데...
그 전에 사셨어요?"
"집 주인 동생이요?"
"네... 여자 분이요.
저희도 전세로 살고 있어요.
전에 살았던 동생 분 언니가 이 집 주인이에요."
"아...네 알겠습니다."
'정아 씨 언니가 동생을 살게 한 거였구나...'
나는 의사의 말이 떠올라
정아 씨 언니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혹시 나를 원망하며 전화를 끊어 버리면 어쩌지.
그런 두려움이 들기도 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깊게 하고
전화번호를 찾아 버튼을 눌렀다.
"... 훈지 씨에요?"
"네. 안녕하세요."
"한번은 연락해서 만나고 싶었어요."
"네... 혹시 지금 뵐 수 있을까요?"
"주소 보낼테니 이리로 와 주실 수 있나요?"
"네. 알겠습니다."
정아 씨의 언니는
정아 씨 집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다.
"이제 많이 회복되셨나요?"
"네..."
"죄인처럼 그럴 거 없어요.
저도 처음에는 우리 정아가 훈지 씨 때문에
죽은 것 같아서 너무 원망스러웠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내 동생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까...
존중해 주기로 했어요."
"죄송합니다..."
"훈지 씨... "
"네?"
"그런데 엄마 아빠한테는 찾아가지 말아요.
엄마 아빠는 아직 저도 안 보세요.
제가 정아를 말리지 않고 죽게 뒀다고 생각하세요..."
"죄송합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 정아가 참 용감해요.
나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걔가 원래 사랑에 목숨 거는 스타일이 아닌데.
항상 적당한 선을 그어 놓고
자기도 그 이상은 안 넘어가고
상대가 넘어와도 질색하던 애거든요."
"보고 싶으시죠...?"
"보고 싶죠...
아직도 반찬 갖다 줘야지 하고
싸고 있을 때가 있어요.
보고 싶을 때는 그냥...
옆에 있다고 생각하고 말을 해요..."
"훈지 씨... 죄책감 갖지 말고...
이제는 본인 생활 해요...
그게 정아도 바라는 일일 거에요.
제가 적합성 검사도 반대했을 때,
정아가 제 다리를 붙잡고 애원했었어요.
동생이지만... 그런 모습은 처음이라
참 낯설었거든요.
그만큼 훈지 씨를 사랑했다는 거겠죠..."
정아 씨 언니는 아직도 그 모습이
생생한 것처럼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직도... 정아 씨를 볼 수 없다는 게...
믿겨지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아요."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잖아요.
정아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선택한 거니까...
어쩌면 자기 죽음을 가장 가치있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그냥 나이 들어 죽는 것보다는..."
나는 정아 씨 언니의 말을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그녀와 헤어지기 전,
그 집을 내게 팔 수 있는지 물었다.
정아 씨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 곳으로
다시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반대했다.
정아씨의 그늘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정아 씨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녀를 잊는 것이 정말 그녀를 위한 것일까.
나는 언젠가 그녀를 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정아 씨 언니 말대로,
지금은 그녀가 보고 싶을 때마다
정아 씨가 마치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토스트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 <112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