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어지자

끝이다. 결국 이 관계들도 끝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

“진심이야?”

“아니길 바랐는데…
나는 하나, 통보는 셋. 그들은 나를 갈망했고, 나는 그들을 이용했다. 무슨 소리냐고? 내가 존나 개쓰레기라는 말이다. 양다리도 아니고 세 다리를 걸친 쓰레기. 욕을 먹어도 싼 거지. 게다가 내가 오늘 찬 저 셋은 친구 사이거든. 그 우정이 개박살나는 데에 큰 몫을 차지한 게 바로 나. 최이안. 남들이 보면 버러지라고 욕할 년. 그게 나라는 사실은 나도 믿기지 않는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관계를 맺었는지. 나는 무얼 위해 너희를 이용하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냐마는.
“내가 뭘 더 어떻게 하면 될까.”
제일 처음으로 이별을 고한 박지민에게서 들려온 대답이었다. 그는 그 스스로를 자책했다. 우리의 이별이 자신의 탓인 줄 알고 있는 것 같다. 사실상 나 때문이잖아? 나는 아무 말 않고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의 동요를 지켜봤다. 애써 눈물을 감추려 했던 시도가 실패하고 말았다. 내게서 시선을 돌린 눈망울에서 후두둑 떨어진 눈물이 아스팔트를 적셨다. 저정도로 내게 진심이었다고? 마음이 조금 아픈 것도 같았다. 내가 여린 사람을 울렸네.
“스치는 인연이야. 너무 그러진 마.”
“그런 말이 쉬워서 좋겠다. 너는.”
그의 흐느낌으로 인한 불규칙한 호흡 사이로 한숨을 내쉬자 하얀 김이 서렸다. 붉어진 코끝과 눈시울이 당장이라도 얼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름에 이 말을 할 걸 그랬다. 차라리 덜 슬펐으려나.
다음은 전정국이었다. 앞선 박지민에 비해서는 뭐랄까.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예상을 했다는 듯한 담담한 표정과 말투.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참 종 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지. 감정, 표정, 속내를 알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비밀이었고, 그래서 너와 있는 모든 순간이 신비로웠다. 한때는 그 독특함에 끌려 내가 정말 너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줄 알았다.
“난 안 되겠는데.”
헤어지자는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처음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그의 마음을 듣게 된 건. 많이 늦었지만 오늘이 되어서야 너의 마음을 알게 되는구나. 비록 알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넌 나를 사랑했구나. 안도감이 밀려왔다. 나만 즐거운 관계가 아니라, 너도 날 필요로 했나 보네. 적어도 내가 그런 존재이긴 했네. 다행이었다. 씁쓸한 미소가 튀어나왔다.
”어쩌겠어. 내가 그만하고 싶은데.“
”거짓말 하지 마.“
대뜸 내게 거짓말이랜다.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서는 내 양팔을 붙잡고 고개를 떨궜다.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나는 그런 그를 가만 지켜보았다. 끝내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우리는 꽤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물 섞인 분노인가. 그저 순수한 미련인가. 이 마지막 순간에도 늘 그랬듯 그의 눈빛은 읽어낼 수 없었다.
“내가 놓으면 너도 놓겠다고 했잖아.”
“여태 넌 날 놓아준 적이 없잖아.”
“그게 지금이야.”
점차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꼬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눈동자는… 원망. 원망이었다. 갑작스레 이별을 고한 나에게 느끼는 원망. 내가 놓으면 놓아지는 관계였다는 사실에서 와닿는 비참함. 그래도 어떤 때는 우리가 사랑인 줄 알았던 일말의 희망이 부서진 배신감. 그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나를 향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감정들을 받아들이던 찰나, 그는 내게 증오가 스며든 사랑을 표하듯 입술을 맞춰왔다.
마지막은 김태형이었다. 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했을 때, 그는 어린아이의 장난을 보듯 헛웃음을 보였다. 그저 나의 장난으로 보였을까? 그는 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나를 바라봤다.
“이제 질렸어? 다른 놈한테 가려고?”
“그런 거 아니야.”
“이번에는 박지민 차례인가.“
아니다. 전정국일 수도 있겠네. 능청스런 말투의 그는 날 완전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래. 당신은 표현에 숨김이 없었지. 나에게 잘 보이려 무언가를 숨기려 하지 않았어. 날 위해 헌신하며 스스로를 숨기던 박지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뭐든 비밀로 해야 했던 전정국. 그리고 거짓 없이 자신의 모든 걸 드러낸 김태형. 세 사람이 친구였던 것 치고는, 성향이 꽤 많이 달랐지.
“누구한테도 안 가.“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세 남자가 친구였을 때, 그리고 나로 인해 그 관계가 무너졌을 때. 김태형은 나를 증오했다. 자기도 마찬가지로 친구의 애인인 나와 몸을 섞은 똑같은 사람이면서. 그는 나를 탓했다. 나를 향한 그의 애정의 형태는 조금 특이했다. 증오와 갈망. 그 사이 어중간한 경계에서 그는 나를 놓지 못했다. 원래 금지된 것이 더 달콤한 법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는 나를 사랑한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냥.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어.”
“…미운데 미워할 수가 없네.”
“그렇겠지. 넌 날 좋아하니까.”
나는 김태형을 잘 알았다. 말은 모질게 해도 마음은 나에게 머물러 있다는 점을. 정말이지, 모순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뱉어내는 가시 돋친 말들은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오히려 그 말은, 그러면 안될 걸 아는데도 내게 끌리는 그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겠지. 그런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신기했다. 증오가 애착이 되는 건 한 순간이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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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세 번의 이별을 고하고, 세 번의 이별을 맞이한 나는 집에 돌아와 푹신한 소파에 무겁고 찬 몸을 뉘였다. 그 어느 겨울밤보다도 마음이 시린 밤이었다. 방 안의 불도 켜지 않고, 그저 암흑의 허공을 바라봤다. 눈을 감은 것과 감지 않은 것이 별다른 차이가 없는 공간에서 그렇게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어 작은 램프의 전등을 켜고 그 아래 앉았다. 그제서야 앞 탁자에 놓인 하얀 종이가 보였다. 끄트머리가 조금씩 구겨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망각했다. 오늘 아침에 본 건데 저게 뭐더라. 일어날 힘은 없어서 그냥 그 자리에서 계속 종이를 향해 응시했다. 그 위에 쓰인 인쇄된 문자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대학병원 이름, 내 이름 최이안, 내 생일…
시한부 선고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