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 짐승을 집에 들였습니다

6화 - 네가 신경쓰여

또 다시 돌아온 등교시간. 나는 교복을 다 입고 가방까지 챙긴 뒤 옆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날 졸졸 따라올테니, 이번엔 내가 먼저 데리고 나가야지. 노크를 하려다가 손이 멈췄다.

 

하민이에게 안겼었다. 지금 문을 두드리려는 이 방, 그것도 침대 위에서.

하민은 단단한 팔로 나를 끌어안았고, 나는 그 팔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주말 내내 마주칠 때마다 그때의 감촉이 떠올랐다.

 

이전이었다면 어떻게든 피했을 것이다. 20분 일찍 등교를 한다거나, 약속을 잡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하민이가 나를 좋아하는 티를 조금이라도 내면 방으로 도망가거나, 괜히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거나, 둘만 남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별로 피하고 싶지 않았다. 마주치면 괜히 몸이 뻣뻣해지고, 말도 제대로 안 나오고, 가슴 한쪽이 자꾸 간지러운데도.

그냥 옆에 있고 싶었다. 옆에 있으면 붕 뜨는 기분이 드는게, 정말 좋았다.

 

후, 나 이젠 진짜로 얘를 좋아하나 봐. 마음을 인정하니 오히려 속은 편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유하민. 학교 가자.”

 

침대에 앉아 있던 하민이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발견한 얼굴에 순간적으로 놀란 기색이 스쳤다.

 

“왜, 뭐.”

 

하민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냥.”

“뭐가 그냥이야.”

“피할 줄 알았는데.”

 

내가 조금만 트러블 있어도 피하는걸 진작 눈치 채고있었구나. 머쓱해져 괜히 가방끈만 고쳐 잡았다.

 

“학교 가게 빨리 나와.”

“그럼 나가.”

“왜?”

 

하민이 침대에 앉은 채 멀뚱히 나를 올려다봤다. 나도 영문을 모르겠어서 멀뚱멀뚱 쳐다만 봤다.

 

 

“그럼 지금 갈아입는다.”

 

그러더니 입고 있던 티셔츠의 밑단을 잡아 훌렁 들어 올렸다.

 

“꺄아악!”

 

반사적으로 문을 닫았다.

쾅, 소리가 날 만큼 세게 닫고 나서야 눈앞에 방금 본 장면이 떠올랐다.

 

다 벗은건 아니었다. 티셔츠가 가슴까지는 올라가지도 않았다. 배가 조금 드러났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이 눈에 박혔다. 나는 뜨거워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미쳤나 봐, 진짜.”

 

문 너머에서 하민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

 

 

그렇게 함께 등교하는게 당연시 되었다. 뭐, 원래도 같이 안 간 날이 많지는 않았지만.

나란히 학교까지 걷고, 서로의 교실로 향할 땐 손을 흔들어 인사를 나눴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비슷한 날에는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그게 제법 익숙해졌다.

 

하민이도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이 녀석 맨 처음엔 낑낑대는 강아지처럼 같이 가자고 조르거나, 기다리거나 했는데. 요샌 당연하다는 듯 내 옆에 선다.

 

좀 기고만장해진 거 아냐?

어째 나에게 들이대는 횟수도 많이 줄어들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내 방에 멋대로 들어오고, 아직도 예준이를 좋아하냐고 묻고, 내가 거리를 두랬음에도 멋대로 1시간이나 기다렸다가 함께 하교하는걸 고집한 애가 맞나 싶다.

 

저번 주에는 갑자기 끌어안기까지 해놓고!

왜 이제는 안 들이대지?

혹시 생각보다 나를 별로 안 좋아했던 건가.

 

수업 중에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 칠판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턱을 괴고 창밖을 보는데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을 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하민의 반이었다.

 

1학년들 체육 수업시간이구나. 멀리서도 하민은 금방 눈에 띄었다. 친구들과 공을 주고받으며 운동장을 뛰고 있었다.

한쪽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친구가 뭐라고 하자 웃기도 했다.

 

잘 지내네. 전학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친구가 여럿 생긴 모양이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펜 끝으로 공책 귀퉁이를 꾹 눌렀다.

예전에는 친구가 없어서 나한테 더 집착했던 걸까? 날 좋아했던 건 과거인거지. 그러고보니 직접 고백한 적 처음 뿐이었잖아. 지금은 그냥 오랜만에 만난 누나 정도라든가 ….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먼저 피한 건 나였는데, 막상 하민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에잇.

짜증 나.

 

나는 창가에서 시선을 떼고 칠판을 바라봤다.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집에서도 행동은 이전과 달라졌다. 나는 전보다 자주 하민의 방에 들어갔다. 이유는 그냥, 심심해서.

하민이 책상에 앉아있다면 나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기도 하고, 쿠션을 끌어안은 채 별말 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하민이 별말 없이 내버려두더니, 어느 날은 결국 물었다.

 

“요즘 왜 이렇게 자주 와?”

 

침대에 엎드려 있던 나는 휴대폰에서 눈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그냥.”

“누나 방 있잖아.”

“내 방이랑 분위기가 다르기도 하고.”

“…….”

“뭔가 더 안락한 느낌?”

“…….”

“사실 그냥 심심해서.”

 

유튜브를 보면서 대충 대답했더니 하민도 더 묻지 않았다. 다시 의자를 돌려 책 혹은 핸드폰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슬쩍 하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진짜 아무렇지도 않나.

괜히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

 

 

어느 날은 하민이가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들어온다고 했다. 와, 쟤가 친구도 있구나. 학교에서만 노는 줄 알았다. 내가 너무 왕따로 생각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외부인 없이 엄마, 아빠와 셋이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갔다가 곧장 씻으러 들어갔다.

 

그런데 씻고 나오니 잠옷이 보이지 않았다.

빨래 바구니도 비어 있었다.

 

“엄마! 내 잠옷 어디 있어?”

 

멀리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빨았는데?”

“그럼 나 뭐 입어?”

“그냥 티 입고 자!”

 

뭐 저렇게 매정해! 나 잠옷만 입고자는데 …. 티셔츠는 전부 달라붙어서 입고 자기 불편하단말이야.

투덜거리며 씻기 전에 입던 옷을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방으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나니 굳게 닫힌 하민의 방문에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걔 티셔츠 많던데. 나보다 품도 크니까 잠옷으로 입기 딱 좋을 것 같은데. 잠옷으로.

 

나는 조심스레 하민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옆에 개어둔 검은색 티셔츠가 보였다. 한 다섯장은 있는 것 같네. 단벌신사인가. 한 장 정도는 괜찮겠지...? 들어오려면 먼 것 같으니 후딱 갈아입자.

 

빠르게 찝찝한 옷을 벗어내곤 하민의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밑단이 허벅지까지 떨어졌다. 생각보다 더 크네. 안에 입은 반바지가 보일락말락 할 정도였다. 그래도 잠옷으론 최적이겠어.

 

콧노래를 부르며 내 옷을 개어 내 방으로 향했다. 아, 근데 좀 도둑같은가…? 멋대로 방에 들어와서 훔쳐입은걸 알면 유하민이라도 좀 기분이 안 좋거나, 짜증을 내거나 할 것 같았다.

그래, 바로 설명하자. 그래도 멋대로 입고있는 것보다는, 하민이 돌아오면 바로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 옷을 빨래바구니에 던져둔 뒤 나는 그대로 하민의 침대에 누웠다.

 

언제나처럼 휴대폰을 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 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엇, 돌아온건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니 엄마와 짧게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녀왔습니다.”

“하민이 왔어? 저녁은 먹었고?”

“네.”

 

엄마와 짧게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 앞까지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곧이어 방문이 열렸다.

하민은 문 앞에 선 채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봤다.

 

“왔어?”

 

몸을 일으키다가 그제야 내 모습을 확인했다.

품이 큰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 앉으니 티셔츠 밑으로 반바지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크.

너무 자각이 없었나.

 

나는 어색하게 티셔츠 밑단을 잡아 올리며 웃었다. 바지가 있다는걸 보여주기 위한 무언의 행위였다.

 

“아하하.”

 

하민은 꽤나 놀란 얼굴을 하고있었다. 쟤 얼빠진 얼굴 하는거 처음 보는 것 같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하고있을 게 아니지.

 

 

“그, 내가 잠옷이 없어서.”

“…….”

“너 티셔츠 있는 거 생각나서 빌려 입었는데. 왠지 도둑 같아서.”

“…….”

“너 기다리고 있었어.”

 

하민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화났나? 멋대로 옷 꺼내 입은 게 기분 나빴으려나.

말은 전했으니 이제 나가야겠다. 왠지 기분도 안 좋아 보이고.

 

“하하, 말 전했으니 나는 이만….”

 

침대에서 내려와 슬금슬금 하민의 옆을 지나가려했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중얼거리는 소리라서 잘 들리진 않았다.

 

“내 옷을 입고.”

“…….”

“내 방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

“응?”

 

제대로 못 들어서 걸음을 멈추고 하민을 돌아보려는 순간.

 

“뭐라고?”

“무방비하게 계속 내 방에 들어오네.”

 

하민의 팔이 내 얼굴 옆을 지나갔다.

탁…. 방문이 닫혔다. 나는 그대로 굳을 수 밖에 없었다. 화 난건가…? 티셔츠 하나로?!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고개를 더 돌릴 수가 없었다. 아무말도 하지 않자 그르릉대는 낮은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울렸다.

 

“나 아직 누나 좋아하는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까먹은 건가.”

“헉.”

 

목소리엔 짜증이 묻어있었다. 얘는 지금, 내가 자기 옷을 멋대로 훔쳐가서 화가 난 게 아니다. 지금. 나한테 항의하고있는거야. 왜, 자길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혼란스럽게 하냐고. 그래서 짜증이 난거다.

하민이는 제법 짜증이 났겠지만, 나는 기쁨으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난 네가 이젠 날 안 좋아하는건가 했는데. 이렇게 반응을 해준다는 사실이,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그것도 모르고 하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았다.

 

“내 옷….”

 

하민이 손을 뻗어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 밑달을 만졌다. 맨다리에 손길이 살짝 스쳤을 때는 흠칫 했다.

설마 옷 벗기려는건가?! 그건 안돼!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며 하민을 불렀다.

 

“야…!”

 

예상과는 다르게 ㅡ아니 당연한 거겠지만ㅡ 하민은 옷을 벗기지 않았다. 대신 내 어깨를 붙잡아 자기 쪽으로 돌렸다. 몸이 가볍게 휙, 돌아갔다.

 

고개를 들자 바로 눈앞에 하민이 있었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은 꽤 핀트가 어긋나 보였다. 헤, 나 때문에 정말 짜증이 난 게 맞나봐. 좋아하는 것도 잠시. 나는 내가 무슨 착각을 했는지 깨닫고 식은땀을 흘렸다. 민망하기도 하고,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내, 내가 아무래도 무신경하긴 했지. 남자 애 방에서….”

“어.”

“하, 하하….”

 

웃어봤지만 하민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못마땅한 얼굴은 내 얼굴과 티셔츠를 번갈아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내 고백은 거절해놓고.”

“그, 그때야…!”

“…….”

“그때는 예준이를 좋아했으니까….”

 

하민이는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도 얼굴이 빨개진 채 하민이를 쳐다보고있었다. 얼굴, 지금 엄청 빨간 것 같아. 그게 아닌 이상 말이 안 된다. 얼굴에 이렇게 열이 오른 것도, 하민이의 표정이 내 얼굴을 보고 꽤 풀린 것도.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던 하민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은?”

 

 

고개를 살짝 갸웃한 하민이 내게 물었다. 너무 가까워…! 본인은 자각이 없는건가? 지금 얼굴 공격에, 이 방에서 나는 하민의 체취와, 입고있는 티셔츠에서는 하민이 쓰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폴폴 올라왔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아찔함이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두근.

두근.

두근.

 

나는 마른침을 삼키곤 입을 열었다. 어쩐지 조금 목소리가 떨린 것도 같았다.

 

“지금은….”

“…….”

“안 좋아해.”

“…….”

“예준이.”

 

하민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벌어진 입은, 그가 꽤 놀랐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그럼,”

 

하민이 무언갈 말하려했지만, 내가 급하게 말을 끊어냈다. 네가 원하는 말, 해줄게.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마.

 

“지금은.”

“…….”

“……네가 신경 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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