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쳐다봐. 내 얼굴 닳아.
-깼어요?
막 잠을 깬 제이가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던건지 동그란 눈을 반짝이는 정국이었다.
-응. 몇시야?
-오후 2시 조금 넘었어요. 가려고?
-가야지. 너무 오래 잤다.
-태워다 줄게요.
-싫음.
생각보다 단호하게 거절하는 제이의 대답에 괜히 입을 삐죽거리는 정국이다.
-밥 먹고가요. 누나 좋아하는 시리얼 있어.
-오호! 시리얼만 먹고 가야지
장난스레 웃는 그녀의 얼굴에 씻고오라며 주방으로 가는 정국.
커피를 내리고, 시리얼과 달콤한 두유를 꺼내 식탁에 차려놓으니 말간 얼굴의 제이가 웃으며 앉는다.
-잘 먹겠습니다!!
두유에 시리얼을 부어 입안 가득 넣는 제이.
우적거리며 씹는 동그란볼을 괜히 쓸어내리는 정국.
-나이먹고 살찌면 빼기도 힘든데...저 달달한걸 한그릇 그득먹었어...미친거야...
배를 통통 두드리며 삐죽거리는 제이.
-괜찮아요. 난 누나가 굴러다닐 정도였음 좋겠는데.
-시끄러워. 갈래. 벌써 5시야.
-데려다줄게. 기다려요.
-택시탈거야. 나오지마.
그의 집을 나와 기다리던 택시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할때 즈음 주머니속 휴대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어디야?
-택시 안. 집에 가는 길이야 거의 다 왔어.
[잘 됐다. 저녁 같이 먹자.
-어디서?
[네 집에서. 나 지금 네 집이야.
-그래.
[얼마나 걸릴 것 같아?
-5분 정도면 도착할거야.
[응. 알았어.
전화를 끊고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을 가만히 바라보는 제이.
[전남편 현진]
전에는 뭐라고 저장했었지?
우리집이 아닌 네 집.
한숨을 작게 내쉬고 휴대폰을 가방에 넣는다.
택시에서 내려 고개를 드니 집에 불이 켜져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몸을 감싸는 온기와 음식냄새.
옛 생각이나려는 머리를 가볍게 저어본다.
- 왔어?
- 응. 어쩐일이야? 음식은 뭐고?
- 그냥 시장갔다가 당신 좋아하는 만둣집 문 열었길래 사왔어. 만둣국 끓였으니까 먹자.
- 와. 오랜만이네 이집!
- 고기만두만 먹을거지?
- 응! 손만 금방 씻고 올게.
기분이 좋은듯 슬쩍 웃는 제이를 보며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석진.
- 여전히 이 집 김치만두는 맵더라.
- 맞아. 김치가 매워서 그런가? 다른데 김치만두는 안 매운데 여긴 매워. 그래서 고기만두가 더 맛있나?
만두와 뽀얀 국물이 담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릇을 제이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하는 석진.
- 또 받자마자 만두 조사놓네.
- 조사놓는게 뭐니? 이래야 국물에 만두의 깊은 맛이 베인다고.
만두를 수저로 마구잡이로 터트려 놓는 제이를 보며 하는 석진의 핀잔어린 소리에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대답하는 제이.
- 맛있어!
- 다행이네. 국물 따로 끓여 놨고 만두는 냉동실에 넣어뒀어.
- 뭐하러. 집에서 뭐 먹지도 않는데.
- 이렇게 해놓음 먹잖아. 그래봐야 두끼정도 먹을 양밖에 안되.
- 알았어. 고마워.
후룩 후룩 소리를 내며 잘도 먹는 그녀를 보며 석진은 꽤나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식사를 끝내고 설겆이까지 제가 하겠다고 나선 석진을 이기지 못하고 석진의 옆에서 모카포트로 커피를 내리는 제이.
소파로 가자는 제이의 말에 그냥 여기서 하자. 대답하는 석진. 머뭇머뭇 거의 5분이 다 되어가도록 말을 하지 못하고 커피잔만 만지작거리는 석진을 지켜보다가 결국 제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할 말이 뭔데. 이렇게 생각을 길게 해. 밥까지 해먹여가면서 할 이야기가 뭐야.
- 어....
- 그만 뜸들여. 성격 급한거 알면서.
제이의 성화아닌 성화에 크게 숨을 들이쉰 석진이 입을 열었다.
- 나 선봐.
- 어?
힘들게 쥐어짜듯이 나온 석진의 말.
심장이 쿵 발등으로 떨어지는 기분의 제이.
이내 놀란 마음을 애써 다잡아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뗀다.
- 언제...?
아...말끝을 늘이고 싶지 않았는데...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해. 괜찮은 척 해야해. 가벼운 이야기를 들은것처럼 행동해야 해. 서제이 정신차려.
- 돌아오는 주 일요일 저녁에.
- 아...당신...이혼한 거...상대가 알아?
- 응. 엄마가 말했데.
- 아..어머니가 해주시는 거구나.. 그럼 괜찮은 사람이겠네.
- 글쎄..만나기 전까지는 모르니까.
잘 됐다고 해...서제이...잘하라고 해 서제이..
- 그래. 왜 일요일이야? 토요일도 당신 쉬잖아. 아...상대가 안 쉬는 날인가?
- 세미나있어. 월요일부터 집에 없을거야.
- 아...토요일에 오는거야?
- 응. 밤에 도착하겠지.
- 근데 왜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말해.
- 응?
내내 고개를 숙인채 커피만 바라보며 말하는 석진에게 제이가 말한다.
- 잘 됐네.
- 뭐가?
잘 되었다는 제이의 말에 고개를 들며 되묻는 석진.
- 새로 시작해야지.
- 제이야...
애처로운 부름에 이번에는 제이가 고개를 숙인다.
- 말해줘.
- 뭘?
- 가지말라고. 선 보지말라고. 네가 하지말라면 안할게. 나가지 말라면 안나갈게. 그러니까...
석진의 말에 눈물이 울컥하고 쏟아질 것 같았다.
- 내가 왜...내가 뭐라고.
- 제이야...그냥 한마디면 되.
- 싫어. 내가 몇번을 말했잖아. 당신은 새로 시작하라고. 그래도 된다고. 우리 이혼도 나 때문인거지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당신은 행복해지라고 했잖아.
- 다른 사람을 만나면 내가 행복해질것 같아?
- 행복해질지 아닐지는 모르잖아. 만나서 아닐수도 있지만 만나서 괜찮을 수도 있어. 당신은 행복하지 않을거라고 어떻게 단정해?
- 내가 다른사람이랑 행복할 수 있을리 없잖아.
- 그렇게 말하지마...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것 같은 젖은 목소리에 석진은 뭐라 더 말하려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무슨 마음으로 저 말을 하는지 모르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이가 잡아줬으면 했다.
이렇게라도 괜찮으니 제 옆에 있어달라고. 그렇게만 말해준다면 평생을 이렇게 있을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게 말하지 않을거라는것도 예상하지 않은건 아니었지만,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 그만 가. 선 잘 보고. 예쁘게 입고 가. 단정하고 깔끔하게.
- 후우...갈게..
- 응. 잘가. 안 나갈게.
석진이 가고 나서 제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혹여 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방 문을 꼭 잠근채 이불을 뒤집어 쓰고 배개에 머리를 묻었다.
꾹꾹 누르는 울음소리, 이불속에서도 잘게 떨리는 어깨,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울음이 잦아들고 나서야 제이는 씻고 나왔다.
침대에 눕치도 못한채 앉아 생각했다.
떠날때야. 너무 오래 곁에 있었어. 아무렇지도 않은척하면서 너무 욕심을 채웠어. 벌받는거야..이렇게 해선안될 짓을 한 벌 받는거야.
욕심부리고 싶어. 이대로 있어달라고, 그 누구도 만나지 말고 그냥 지금처럼 내 옆에 있어달라고, 나도 행복해지지 않을테니 당신도 행복해지지 말라고..그냥 이렇게 둘이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채로 영원히 있자고.
이혼하고 계속이었다. 2년동안 거의 보지 않은날이 없었다.
안 본 날 이래봐야 서로가 출장을 가거나 일이바빠 집에 들어오지 못할때, 그마저도 시간이 남는 사람이 도시락을 사가거나 했었지.
서로의 생일도 조용히 챙겼고, 비가오면 함께 막걸리도 마셨었다. 날이 쌀쌀해지면 따뜻한 정종을 날이 더울땐 시원한 맥주를.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는 우리가 그렇게 지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되. 확실해졌어.
내가 당신에게 행복해지라고 해놓고 정작 내가 그 행복을 막았어.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지만, 당신은 아니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