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로잡히다

(38) 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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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히다(38) 회식


몇달 뒤 수사팀 회식이었다. 수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굵직한 인물들의 재판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석진은 서장 권한으로 경찰서 근처의 고깃집을 빌려 회식을 했다. 이날은 2팀을 중심으로 수사를 함께한 경찰들이 회포를 푸는 자리였다. 서장 직속으로 일했던 비밀 요원이었던 해주도 함께 했다.



"이 분이 바로 그 흑해주 요원입니다."



최근에 박사 논문을 마친 해주는 얼굴이 살짝 초췌하긴 했지만 가벼워 보였다. 윤기의 소개에 해주는 벌떡 일어나 꾸뻑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 때 비밀 요원으로 활동했던 흑해주입니다."



해주가 인사를 하자 그동안 해주의 존재만 알 뿐 누군지 모르던 경찰들이 술렁였다. 아, 이 분이 그 분? 정국은 술렁거림이 살짝 거슬려서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 제 짝지입니다. 아무도 눈독 들이면 안 돼요.."


"아후 저 팔불출 치워치워~ 
 아주 해주씨랑 멀리 떨어져 앉으라고 해"



모두 들으라는 듯 정국이가 한마디 덧붙이자, 그동안 전정국에게 시달려왔던 윤기가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정국은 마치 윤기를 약 올리듯 혀를 쭉 내밀더니 해주에게 팔짱을 꼈다. 윤기는 눈꼴시리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고, 불편한 듯한 해주는 정국의 손을 도로 빼서 테이블 위에 가만히 올려놨다.



"자자, 그럼 다들 잔 채우시고, 서장님 건배사 있겠습니다."



윤기의 말에 다들 왁자지껄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얼마 만의 소주냐... 해주의 눈빛이 반짝였다.



"자 지난 몇 달 동안 모두 수사에 매달리느라 고생 많았어요~  
 아직 재판도 진행 중이고, 더 마무리해야 할 일이 조금 남았지만, 우리 오늘만큼은 편하게 이야기도 나누고 좋은 시간 보냅시다. 건배~"





김석진 서장이 일어나 건배사를 하자 다들 건배를 외쳤다.
건배를 시작으로 왁자지껄한 회식이 시작되었다.



.    .    .



얼른 비워버린 잔을 바라보던 해주는 회식 자리가 영 익숙하지 않은 듯 둘러보다가 고기 집게를 만지작거렸다. 앞에서 그 모습을 본 윤기가 얼른 고기 집게를 빼앗았다. 정국은 짝지의 사정도 모른 채 잔을 비운 다른 동료들에게 한 잔씩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해주씨, 요즘 잘 지내죠..?"



치익- 윤기가 잘 달궈진 돌판에 고기를 올리자 기분 좋은 소리가 나며 고기가 익기 시작했다.



"아 뭐... 좀 바빴기도 했고, 잘 지내는 부분도 있고.. ㅎㅎㅎ"



자세히 설명하기 귀찮은 해주가 대충 얼버무렸다.

사실 그동안 해주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김남준 소장이 구속되면서 연구소에는 대대적인 개편이 있었다. 납치 사건 이후 악몽에 시달리던 해주는 연구소에 남지 않기로 결정했고, 이전 지도교수가 해주를 받아주어서 해주는 대학원 연구실로 다시 들어갔다. 연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던 해주는 이후 논문에 매달려서 최종 심사만 남겨놓고 있었다.



"사실 해주씨 근황은 얘한테 맨날 듣고 있어서, 제법 알고 있는 편이라서 굳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요..

지금 뭐랄까 사이버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묘한 기분이네요."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윤기가 고기를 굽던 집게로 정국을 가리켰다. 지지 않는 듯 해주도 대꾸했다. 



"하하... 실은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도 팀장님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요.. ㅎㅎㅎ"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에 약간 당황한 정국이 두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에이, 내가 뭘 그렇게 많이 이야기 했다 그래"


"내가 해주씨 논문이 언제 끝나는지도 하도 많이 들어서 
 몇 월, 몇 일, 몇 시인지도 지금 바로 말할 수 있거든?"



웃어넘기려는 정국이에게 윤기가 쏘아붙였다.



"내가 그렇게 많이 이야기했나? 거참 대충 넘어갑시다요..."


"너 잡담할 때 절반은 해주씨 이야기일 걸?"



분위기가 까칠해지자, 해주가 얼른 넉살 좋게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죄삼다... 다 제 탓이에요... ㅋㅋㅋㅋ 

 제가 요즘 논문 막바지라... 
 얘랑 안 놀아주고 연구실에 처박혀있거든요.."



옥신각신 하는 전정국과 민윤기 사이로 해주가 옆에 있던 소주를 뜯어서 각자의 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자자, 섭섭한 게 있을 땐 마시고 털어버려야죠. 그렇죠? 해주의 넉살에 윤기가 네네 그래야죠 대답하고는 기분 좋게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고기는 여기서 직급이 애매한 제가 굽죠.. ㅎㅎㅎ 
 두 분 섭섭한 거 있는 것 같은데 한번 이야기해봐요."



해주가 윤기 손에 들려있던 고기 집게를 가져가자 바로 정국이 빼앗았다.



"안되... 넌 고기 굽지 마, 내가 구을께"


"얼씨구? 여자친구라고 챙기는 거 보게? 
 내가 들고 있을 땐 신경도 안 쓰더니?"



윤기는 고기를 구우려는 정국이 맘에 안 든다는 듯 핀잔을 주자 정국은 뭔가 억울한 듯 해명하려고 했다.



"그게 아니라, 해주는 요리를 하면 안되... 읍"



정국이가 말을 못하게 갑자기 해주가 입을 막았다. 왜냐하면 뒤에 따라 나올 말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요리를 해보겠다던 해주는 참 많은 냄비와 프라이팬을 태워 먹었었다. 그래서 주방에 서 있는 해주를 볼 때면 정국은 해주를 쫓아내기 바빴었다.



"하하... 그, 그래. 알았으니까 그냥 네가 해.. ㅎㅎㅎ
 우리 정국이 고기 잘 굽잖아 그치??"



해주는 애써 웃으며 집게를 정국이에게 밀어줬다.



"나참... 진짜 여자친구 없는 사람은 부러워서 이거 살겠나... "



물론 이런 속을 알리 없는 윤기는 반찬을 뒤적거리던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아 형 그게 아니라, 정국은 뭔가 변명하려고 했지만, 찌릿한 해주의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약간 주춤했던 정국이 다시 말했다.



"자자, 원래 내가 한 고기 하잖아. 
 내가 그래서 구으려고... 

 우리 팀장님, 맛나게 드쇼잉~
 내가 아주 기깔나게 구워드릴께~"



팀내 먹보로 유명한 정국은 별명에 걸맞게 불판에 가득가득 고기를 올려놓기 시작했다.




.    .    .





한참 식사를 마치고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 김석진이 해주에게 다가왔다.



"그래, 해주야 그래서 괜찮게 지내고 있는 거 맞아?"



석사시절 술을 제법 잘 마시던 해주를 기억하는 석진은 안자마자 소맥을 한잔 말아주었다. 헤~ 서장님 센쓰쟁이... 해주는 기분 좋게 술이 가득한 컵을 받았다.



"그냥 뭐 ㅎㅎㅎ...
 저, 연구소 그만두고 다시 지도교수님 밑으로 들어갔어요.."


"저런..."



스파이 제안을 했던 석진은 해주의 근황에 관해 많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해주도 이 일이 어느 정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시작한 일이긴 했지만, 이토록 해주와 깊숙이 관련된 사건일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 했었다. 

최대 피해자이기도 한 해주는 김태형의 무기징역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감형이 가능할 만한 논쟁거리가 남아있었고, 오소리 모임에 실질적인 운영자였다거나, 투자자들을 통해 해주를 협박했던 것 등 많은 혐의에 대해 부인하고 있어서 재판은 끝도 없이 길어질 것으로 예측되었다. 

도청 장치에 녹음된 여러 증언들이 김태형의 혐의를 입증할 중요한 정황상 증거로 작용하고, 보강수사를 통해 많은 증거들이 수집되어 해주의 바람대로 될 가능성이 컸지만, 어쨌건 재판이 길어진다는 것은 고통스러울 것이 뻔했다. 게다가 연구소도 와해되다시피 해서 몇 달 간의 스파이 활동이 해주의 삶을 얼마나 바꿔놨을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저어... 서장님"


"응, 해주야.."


"저, 진로 상담 좀 해주실래요...?"



해주의 말에 금방 일어서려던 김석진은 다시 앉았다. 윤기와 정국은 이야기가 길어지는 듯하여 보이자 배려해주는 듯 자리를 비켜 다른 팀 자리로 놀러 갔다.



"저, 박사 학위 마무리되면 다시 민간 연구소로 들어가야 할지, 국과수에 연구원으로 지원해볼지 고민 중이에요.."



이야기를 하며 석진과 해주는 술잔을 기울였다. 짤랑~ 기분 좋게 두 잔이 부딪쳤다.



"하는 일이 많이 달라? "


"네, 김태형이 개발했던 외현화를 유지시키는 약물.. 부작용으로 오소리가 돼버린 사람들 있잖아요... 그 해독제를 만들고 싶어요. 지금 외현화 약물을 보강하는 연구에 관심을 보이는 연구소가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쪽으로 갈지... 

아니면 국과수로 가서 약물이나 독극물과 관련된 사건 수사도 돕고 싶기도 하구요.."



해주의 진로 고민은 왠지 그녀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이어서 석진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국과수에서 일하면 종종 얼굴도 볼 수 있겠네.. ㅎㅎ 
 나는 국과수 추천한다. 너 원래 전공은 독극물 쪽이잖아. 내가 예전에 너에게 자문을 받았을 때에도 독극물 전공자라서 갔었는데."


"맞아요... 그렇죠... 외현화 약물 쪽은 부모님 때문인지... 책임감이 느껴지는데 놓아주는 게 좋겠죠...?"


"그래... 그 쪽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으니까 그 분들께 맡겨. 너는 네가 살던 네 삶을 살아야지..."



석진은 과거에서 해주가 빨리 벗어나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해주에게 득이 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공채? 특채? 어떻게 준비할 건데? 뭐라도 좀 도와줄까...?"


"ㅎㅎㅎ 둘 다 일단 준비는 할 건데, 그냥 서장님께 상의 드리고 싶었어요... 그게 괜찮은 생각인 걸까 싶어서요..'


"괜찮은 생각이라고 난 생각하는데... 만약 하게 된다면 수사에 대해 누구보다도 강한 동기를 갖춘 사람이 될 것 같아...ㅎㅎㅎ"



석진의 격려에 해주는 미소 지었다.



"나중에 필기 통과하고 면접 준비할 때 알려줘... ㅎㅎ
 직접 도와주진 못할 지라도, 국과수 분위기라든지, 성향 같은 건 잘 알고 있으니까, 팁이라도 좀 줄게.."


"오, 미리 감사합니다..!"



해주는 서장의 말에 왠지 힘이 났다. 둘은 기분 좋게 잔을 부딪치고는 잔에 남아있던 술을 모두 털어 마셨다.



"정국이는 알고 있어...? 너 그 쪽에 지원하려고 하는 거..?"


"네 알고 있죠.. ㅎㅎ 정국이가 추천해주었어요... 정국이도 국과수 지원할까도 고민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강력계로 오고 싶어서 이쪽으로 왔다고 하던걸요.."



해주는 저쪽 테이블에서 윤기와 자신의 팀원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정국을 쓱 바라보았다. 뭐가 이리 재미있는지, 남자들 여럿이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맞아, 저 녀석은 순발력도 좋고, 상황대처를 잘하는 편이라, 국과수에 처박혀 있긴 좀 아깝긴 하지.. ㅎㅎㅎ 잘 뽑혀 왔어"


"팀도 잘 만난 것 같아요... 
 저 민윤기 팀장님이라는 분, 엄청 따르더라고요.."



전정국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팀원들 한가운데서 일어나 뭔가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 같았고, 그 옆에 민윤기 팀장이 고개를 저으며 정국을 말리는 것 같았다.



"저쪽 무슨 얘기하는지 궁금한데, 우리도 한번 넘어가 볼까..?"



김석진은 해주를 데리고 저쪽 테이블로 갔다. 회식은 한참 동안 끝나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