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하고 씁쓸한
10_씁쓸하면서도 달콤한

훈승전결
2023.05.02조회수 9
여길 떠나는 게 최선인 것 같은데.
밑도 끝도 없이 이게 무슨 소리일까. 그렇게 민규와의 대화가 끝나고 원우는 회복에 집중했다. 제 아무리 믿는 구석이 있다고 하더라도 제 몸이 성치 않은 상태에서 누굴 상대하겠는가. 지금 정한 쪽에는 양날의 검이라고 불리는 승철 쪽 스파이 순영이 있고 그 입으로 직접 말하길. 스파이는 한 배만 타지 않는다. 라고 선포를 했으니 원우는 대비를 했어야 됐다. 여차하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니까.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을 했을 땐 민규와도 마주치지 않고 정한과 둘이서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 나온 말이었다. 여길 떠나는 게 최선인 것 같은데. 정한은 제 조직이 아무리 자유로워도 조직이라는 틀은 벗어나지 못한다며 지금이 조직에서 완전히 벗어날 기회일 것이라고 말했다.
원우도 정한과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생사가 묘연하니 리스크가 크지 않은 안정적인 타이밍이 지금 말고 더 있을까 싶었다. 한 번 느낀 자유는 다시금 자유에 목마르게 만들었고 원우는 날을 더 미루고 싶지 않았다. 민규에게는 갑자기 사라지지 않겠다고 해놓고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민규한테는 나중에 설명해 줄래요?"
"너한테서 오는 원망까지 다 나한테 오겠지만. 기꺼이."
"이전부터 바라고 또 생각한 거지만..."
원우는 정한을 보더니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의 운명은 지금 민규에게로 간 잭 나이프의 영향이 컸다는 것. 제 자신을 피로 적셨던 날들을 기억한다. 누굴 죽이는 것을 자신을 죽이는 것만큼 하기 싫었다. 처음 잭 나이프를 잡았던 날. 사람의 비명이나 저항을 듣고 싶지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구 찔렀다. 반복하면 비명도 저항도 하지 않을 거니까. 그 사람의 고통도 자신의 고통도 제 옷이 다른 이의 피에 몽땅 젖으면 끝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원우 자신과의 합리화였다. 난도질이 된 시체는 차갑게 식어선 온 사방에 피를 뿌렸고 원우에게 남은 건 살인 후의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두려움과 공포보다 더 무서운 공허함이었다. 공허함을 느낄 때 원우는 제 자신이 괴물임을 인지하는 상태였다. 살인자의 이름표를 달고 살인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지만 결국 이 모든 건 자신이 괴물이라서. 라는 합리화를 거치며 원우의 마음은 먼지 한 톨도 내려앉기 무서워하는 텅 빈 방이 되어버렸다.
과거 모두가 같은 조직에서 일을 할 때. 원우는 항상 승철의 파트너였다고 했었지. 매번 마지막은 첫 살인 때처럼 난도질하는 마무리였다. 당연히 승철은 그런 원우를 보며 즐겼겠지. 그렇게 일이 끝나고 돌아오면 원우는 정한과 민규가 눈에 들어왔었다. 살인 후 텅텅 비어 무미건조한 원우의 눈을 보며 민규는 매번 걱정했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민규와 파트너인 정한이 보였던 거지.
민규와 집에서 술 한 잔을 할 때 한 번 넌지시 언급한 적이 있었다. 원우는 같은 조직원이지만 정한과 민규의 방식에 가끔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애초에 할 일이 다른 것이지만 그런 상황이 올 때 칼이나 총 한 번 꺼내지 않는 둘이었으니까. 원우는 잔을 기울이고 그때만큼은 무미건조한 표정보다는 쓸쓸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가끔은 나도 이 그립감을 잊고 싶어."
"잭 나이프? 저번엔 그 그립감을 잊을까 두렵다며."
"그러니까 가끔. 나도 이게 없던 날이 있었으니까."
원우의 말에 민규가 숙연해졌었다. 원우는 짧게 웃음을 내뱉고는 미안하다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때 민규는 원우를 다르게 봤던 것 같다. 제 아무리 믿고 따르는 형이더라도 소문에 신경이 안 쓰일 수는 없었다. 원우에게 붙은 소문들이라고 하면은 "피에 굶주린 괴물", "붉은 정장", "잭 더 리퍼" 등이 있었는데. 민규가 가끔 원우와 눈이 마주칠 때. 아주 가끔은 소름이 돋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나도 이게 없던 날이 있었으니까." 라는 말을 들은 민규는 그때 한 번 원우에게서 희망을 봤던 것이 아닐까. 전원우라는 사람은 아주 평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저 잭 나이프가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 게 아닐까 하고. 그때부터 민규는 원우를 더 챙겼던 것 같다. 이 사람의 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쉽게 드러내지 않는 걸 알지만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없는 날이 늘어갔다. 승철과 다니던 원우에게 미소도 사치였다. 매번 지쳐있는 원우를 챙겨주려고 하면 잠도 제대로 못 자 예민해진 원우는 당연히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민규가 시무룩해져도 원우는 민규를 챙기긴 커녕 바라볼 여유도 없었다.
그래도 원우를 포기하지 않았다. 자유를 느낀 자는 자유를 원하는 것처럼 민규는 자신이 알던 원우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승철에게 잡히면 저 구석으로 숨어들었던 진짜 원우의 모습을 제가 아니라면 아무도 찾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리고 어쩌면 가장 연약할 수도 있는 모습을 제게 비춰준 것에는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그 해답을 듣기 전까지 그 모습을 기억하고 찾아주는 건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해서 원우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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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우는 정한에게 말했다.
그때부터 정한이랑 민규가 부러웠다고. 물론 평범한 일상을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겠지만 적어도 자신을 이렇게까지 죽일 필요가 없어 보였으니까. 이 잭 나이프만 아니었어도. 그때 보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경찰에 자수했다면 이렇게 자신을 잃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제서야 깨달은 자신이 조금은 원망스럽다고.
정한은 원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늦지 않았으니까 조급하지 말고 여길 떠나 진짜 자유를 찾으라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다시는 널 찾지 못 하는 곳으로 떠나서 제대로 된 해방을 느껴보라고. 그걸 느끼는 날이 너에게 찾아오는 광복일 것이라고. 정한이 그렇게 원우를 위로했다.
"광복이라. 조직으로부터 독립, 이런 걸까요."
"많은 변화가 생기겠지. 그 중에 네가 할 일엔 과거청산도 있을 거고."
"청산할 과거가 너무 많은데 쉽지 않겠네요."
"청산할 과거보다 살 미래가 더 길잖아."
정한의 말에 원우의 마음이 한결 편해진 듯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자신이 살아만 있다면 청산할 과거보다 살 미래가 더 길다. 라는 말에 공감을 할 수 있겠지. 자신에게 아직 기회가 남아있다면 공감해 보고 싶었다. 보란듯이 저만의 광복을 맞이하며 과거를 청산하고 속죄하며 평범하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원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정한에게 주먹 쥔 손을 내밀었다. 정한도 같이 주먹을 쥐고 둘은 주먹을 맞대었다. 그 뒤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드시 되찾으라는 응원이, 반드시 되찾겠다는 포부가 두 주먹이 부딪힐 때 느꼈다. 이 대화를 끝으로 정한과 원우가 다시 대화를 할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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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을 체크하는데 그 녀석이 없다. 권순영이. 민규는 곧바로 정한에게 보고했다. 원우를 지켜야 될 것 같으니까 출입을 허가해 달라고. 정한은 어차피 가도 그곳엔 아무도 없을 거라며 계속 인원을 체크하라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정한을 다그치려는데 정한이 간만에 표정을 굳혔다. 결국 궁금한 건 나중에 따로 있을 때 물어보기로 하고 민규는 계속 인원을 체크했다.
잠시 후.
민규는 정한을 따라 정한의 방으로 들어섰다. 민규는 이제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말하라고. 무슨 하루 아침에 원우 형이랑 권순영이 사라지냐고 물었다. 정한이 일단 안심하라고 둘이 이곳에서 사라진 날짜는 달랐다고. 원우가 먼저 이곳을 떠났고 오늘 순영이 사라진 거라고. 하지만 민규의 반응은 정한과 달랐다.
"대뜸 그 녀석이 여길 나갈 이유가 뭐가 있어."
"스파이는 한 배를 타지 않는다잖아."
"그니까. 지금 그쪽에서 연락이 왔으니까 그 자식이 돌아간 거 아니야."
"바로 그거야."
이게 무슨 소리인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는 민규. 정한은 민규에게 진정하라며 상황을 다시 설명했다. 지금 원우는 승철에게 돌아간 것이다. 승철은 원우가 아무리 괘씸해도 원우를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목표를 이룬 승철은 순영을 소환했을 거고 그건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정한은 끝까지 연인 행세를 할 예정이고 원우를 순영이 데려갔다 라는 이유를 만들어 승철 쪽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민규는 왜 진작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냐며 요즘 원우가 저를 안 만나더니 이런 계획을 짜고 있었냐며 서운을 토로했다. 정한이 미안하다며 너무 늦으면 원우가 어떤 상태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테니 곧바로 일을 준비하자고 했다. 조직원도 마치 소집했으니 적당한 연기와 함께 작전을 알려주면 끝이었다.
간만에 큰일이었다. 민규는 잭 나이프를 손에 쥐고 바라보았다. 원우와 한 약속과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민규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자신만 잘하면 그렇게 찾아주고 싶던 원우의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가지고 민규는 준비에 나섰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 그 모습, 내가 기억하고 찾아줄게.
전원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