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하고 씁쓸한
7_씁쓸하면서도 달콤한

훈승전결
2023.04.14조회수 12
민규의 손을 잡고 일어나 민규를 따라 차 조수석 자리에 올라탔다. 타자마자 들려오는 정한의 목소리에 원우가 놀라 뒤로 돌아보는데 세상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도 덜 했는데 민규의 말에 원우는 안전벨트를 맸다. 그리고 곧바로 차는 도로 위를 달렸다.
원우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설마 자신이 탈 차에 정한이 타고 있을 걸 어떻게 예상하겠는가. 원우의 고개는 앞을 향하고 있었지만 힐끔힐끔 뒤에 여유로이 앉아있는 정한에게 시선이 빼앗겼다. 그걸 눈치챈 건지 정한이 민규한테 상황 설명은 안 하냐고 하자 민규가 아차 싶어 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현재 원우의 상황에 대해선 정한에게 알려놓은 상태였다. 원우가 승철네를 나와 도망 중인 걸 알았지만 정한은 기꺼이 원우를 받아주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아까도 그랬던 것처럼 원우는 조직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 이랬다가는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지 자신조차도 겁났다.
"정말 이 방법밖에 없는 거지."
원우의 말에 민규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원우가 원하는 건 조직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이었는데 민규에게는 원우가 원하는 희망이 없었다. 뒷좌석에 앉아 상황을 보니 할 말이 대충 할말이 끝난 것 같은 백미러에 비친 민규 표정에 정한이 말을 이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걸 선택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이것보다 더 안전한 일이 있는지 정한이 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마도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분명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할 수도 있었다. 민규는 당연히 묵묵부답이었고 원우도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답은 정해졌으니 갈 때는 편하게 가자며 정한이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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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우는 이곳에 한 번 왔던 적이 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약에 찌든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눈에 밟혔다. 당연히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원우로 향했다. 그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얼굴. 모두가 원우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승철네를 견제하던 이들에게 원우를 모르는 건 존재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원우를 아니꼬운 표정으로 보는데 정한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원우에게 살갑게 굴었다. 당황한 원우가 정한을 밀어내려고 하는데 정한이 지금 자신을 밀치면 굉장히 이상한 그림이 나올 거라며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미소도 좀 지어보라고.
원우는 괜히 억지 미소는 짓지는 않았다. 그게 더 이상할 걸 아니까. 대신 제 특유의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으며 불편함을 얼굴에서 지웠다. 민규가 그 둘을 따라가면서 조직원들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들의 눈빛에서 나오는 분노와 증오 어쩌면 그 한 구석에 박혀 있던 복수심들이 보였다. 이게 원우가 지금껏 쌓아온 죄업 중 하나였겠구나 싶었다.
"도착했어."
정한의 말에 바닥을 향했던 시선이 앞을 향했다. 눈에 보이는 건 어울리지 않게 세련된 문과 깔끔한 주변이었다. 딱 봐도 이곳의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한 사람을 위한 공간 같았다. 달칵! 하고 문이 열리자 풍기는 향기는 달콤했다. 자신이 항상 드나들던 승철의 방과는 확실히 다른 깔끔하고 달콤한 향기. 나쁘지 않았다.
정한이 자리에 앉자 민규가 자연스레 술잔을 꺼내들었다. 정한이 이어 술 잘 마시냐며 물어왔다. 원우는 고개를 저었다. 정한이 의외라며 승철이 옆에 있으면 꽤나 마실 줄 알았는데 되려 고개를 젓다니. 민규가 정한의 앞에 잔을 두었다. 그리고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예전이랑 달라요. 요즘은 입에도 대지 않아요."
정한이 이유를 물으려다 말았다. 대충 짐작가는 부분이 있었다. 분명 일처리가 끝나면 승철이 항상 원우를 붙잡고 한 잔 했을 것이다. 그때 마시는 술은 그 무엇보다 쓰고 역겨웠을 것이다. 정한은 잔을 내려놓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 처음에는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는 정한. 이번에 원우를 지켜주면서 일종의 거래를 하기 위해 받았다는 것이다. 원우는 그 말에 긴장했다. 제가 해왔던 짓은 정한에게 상당히 큰 위협이 되었다. 팔다리 한 쪽씩 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한은 원우를 지켜주는 대신에 자신의 일도 몇 개 처리해달라고 했다. 원우는 부담스러웠다. 다시는 만지고 싶지 않았던 나이프를 민규에게 넘겼고 민규도 결국 받아드렸다. 그리고 받은 조건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었는데 이 거래 앞에서 받아드려야 했었다. 그런데 정한이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물론 그건 네가 내 쪽으로 들어왔을 경우에만 해당 돼."
"네?"
"넌 조직 활동을 안 하고 싶다며? 그럼 여기에 있을 합법적인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보자는 거야."
그 말은 정한의 조건 없는 배려였다. 원우와 민규 둘 다 고민에 빠졌다. 이곳에 있어도 합법적일 수 있는 방법과 이곳에 있어도 위험에 노출되지 않을 방법. 아무리 조직원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 오랜 고민을 하는 원우와 민규를 지켜보던 정한이 말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그런 취향은 아니고 너도 아니겠지만..."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연인 행세라도 하자는 거야. 승철이 옆에서 일하던 널 꼬신 거지."
원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못할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모든 것은 연기. 그러니까 마치 쇼윈도 부부처럼 정한은 원우를 마음에 들어하면 됐었고 원우도 정한에게 빠진 걸 연기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사이도 좋지 않은 사내 둘이서 사랑 연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민규가 소문대로 흘러가고 싶은 거냐 트집을 잡았다. 정한에게 떨어지지 않는 소문 중 하나는 그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정한의 외모로 멋대로 판단하고 저렴한 이야기들로 어처구니 없는 소문들을 만드는 이들의 얘기들이지만 정한의 얼굴을 한 번쯤은 마주한 사람들은 납득할 것도 같았다.
정한이 뭐 어떠냐며 어차피 그런 거에 신경도 쓰지 않는다며 입을 멋대로 놀린 값은 어떻게든 치루게 할 거라며 무섭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건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뭐 그리 중요한 거라고. 입을 놀리면 그 값은 치뤄야지 라는 생각으로 원우와 민규는 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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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이 본격적으로 계획을 세웠다. 반지라도 맞추는 건 어떨까. 조직의 표식을 몸 한 구석에 새겨놓는 건 어떤지. 이왕 스캔들이라도 나라고 사람이 득실득실한 곳에 가는 건 어떠냐며 꽤나 적극적이었다. 처음에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는 사람은 어디 갔는지 정한이 가장 신났다.
민규도 옆에서 거들었다. 아마 그 중에서 가장 즐기지 못한 사람은 원우 한 명뿐이었을 것이다. 정한을 보며 뭐 저리 신났나 하며 한숨 쉬던 민규가 어느 순간 저 옆에서 정한의 계획에 살을 덧붙여주고 있었다. 마음대로 하라지. 원우는 정한의 술잔을 빼앗아 들었다.
"안 마시는 거 아니었어?"
"제정신으로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요."
이 사이에서 장단이라도 맞추려면 알코올의 힘이 필요했다. 취하진 않아도 알코올이 퍼지며 조금씩 어질어질해지는 신경에 모든 것을 떠넘기다 보면 괜찮지 않을까. 그래 어차피 해야 될 일이라면 어설프게 하지 말자. 그 뒤로 셋이서 많은 작전들을 짜기 시작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흥미를 잃은 원우는 사실 정한에게 넘어가 조직을 배신한 것이고 그런 원우를 지켜주는 조건으로 원우는 정한에게 평생을 바친다. 이것이 그들의 기본 스토리가 되었다.
그 둘 사이를 알던 조직원은 민규 혼자였지만 어느 순간 퍼진 소문은 사실인 것처럼 조직 전체에 알려지게 될 것이고 정한은 공식적으로 원우가 제 사람이라고 털끝이라도 건드는 녀석이 있다면 그 녀석은 제가 팔아넘겼던 약으로 죽게 될 거라는 말을 내뱉을 것이다.
그럼 승철의 입장에선 생각보다 복잡해지겠지.
그렇게 되면 원우를 처리하는 것이 전쟁을 선포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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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이서 말을 맞추고 원우는 민규를 따라 건물 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민규가 창밖을 바라보며 정한의 방에서 몰래 가져온 맥주를 깠다. 몇 모금 마시다가 원우를 바라보았다.
"형, 지금 어때?"
"살기 위해서 뭐든 하는 내 자신이 조금 웃겨."
"보호 받고 있다는 기분은 어떤데?"
"이런 게 안도감이라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다. 원우는 술을 마시고 있진 않았지만 민규가 술을 마시며 풍겨내는 분위기에 같이 젖어들고 있었다. 그래 이게 그때 느꼈던 소소한 행복이었지. 하지만 그때랑 다르다. 소소한 행복마저도 억압처럼 느껴졌었던 과거. 지금은 달랐다.
"드디어 형이 웃는 걸 내 눈으로 보는구나."
"보여준 적 없었던가."
"응 아마도 예전과는 다른 지금이 형을 무방비하게 만든 거겠지."
"무방비라. 무방비해도 위험하지 않은 지금...그래,"
분위기에 한껏 젖어든 원우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매일 땅으로 들어가던 시선이 오늘따라 저 넓고 푸른 하늘을 향했다. 답답하던 마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저 하늘을 보니 잊어가는 것 같았다. 저를 지켜주는 민규 이제는 조력자가 된 정한.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안도감과 편안함. 조금은 불안함이 있겠지만 원우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자유구나.